나의 와인 선택 기준은 대외적으로는 맛이다. 하지만 적금 만기로 목돈을 쥐는 날이 오면 내가 마시는 화이트 와인은 따로 있다.
지갑이 두둑해져 겁이 없어지는 날, 나의 선택은 프랑스 부르고뉴의 뫼르소(Meursault)다. 뫼르소는 탄탄한 바디감에 향도 맛도 우아하다. 마셔보면 정신줄을 놓게 된다.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그리고 인사성 밝고 효심까지 깊은 ‘엄친아’를 현실에서 만난 기분이다.
뫼르소는 프랑스 부르고뉴 남쪽의 마을 이름이다. 북쪽의 코트 드 뉘가 피노 누아르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레드 와인을 만든다면, 남쪽의 코트 드 본은 샤르도네로 가장 비싼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곳이다.
뫼르소는 고도가 300m로 높아 일교차가 커 포도의 산도가 좋다. 또 토양이 자갈과 석회암에 기반을 둔 점토질이어서 미네랄이 풍부하다. 화이트인데도 불구하고 와인을 오크통에서 12~16개월을 숙성시킨 뒤 스테인리스통에 옮겨 다시 몇개월을 더 숙성시킨다. 이렇게 오랜 숙성 기간 덕분에 뫼르소 가격은 일반적인 화이트 와인에 견줘 2배 이상 비싸다.
뫼르소에는 많은 화이트 와인 양조장이 있다. 이 가운데 도멘 올리비에 르플레브(Olivier Leflaive)는 1984년 도멘 르플레브에서 독립한 젊은 와이너리다. 이곳 와인은 100% 유기농이다. 그리고 겨자색 캡실(cap seal)과 파란색 문장의 세련된 병 디자인도 다른 양조장의 디자인에 견줘 경쾌하다.
뫼르소는 긴 숙성 덕분에 버터 향에 바닐라 등의 풍미가 느껴진다. 무게감도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화이트 와인의 안주인 치즈나 과일은 이 와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해산물이나 가금류가 좋다. 해산물도 올리브유보다는 버터로 조리하는 것이 좋을 정도로 이 와인의 바디감은 남다르다.
나는 주로 가자미를 버터에 익혀 생크림 소스를 얹는 뫼니에르나 비스크 소스(새우껍질로 만든 소스)를 곁들인 새우요리와 함께 뫼르소를 마신다. 새우나 가자미 등은 모두 날씨가 쌀쌀해지는 요즘이 제철이다. 이 와인은 버터로 익힌 새우나 가자미 살이 가진 단맛과 감칠맛을 입안 가득 증폭시키는 마력을 갖고 있다. 마지막에 코끝에서 느껴지는 꽃과 과일 향으로 여운을 준다.
올리비에 르플레브는 뫼르소뿐 아니라 화이트 와인 가운데 가장 고가인 퓔리니몽라셰와 샤사뉴몽라셰도 생산한다. 몽라셰 가운데 슈발리에몽라셰 같은 그랑 크뤼 밭이나 로마네콩티 같은 유명 도멘의 몽라셰는 생산연도에 따라 가격이 100만원을 훌쩍 넘는다. 몽라셰는 뫼르소 바로 옆 마을인데 그랑 크뤼 등급의 포도원이 포진해 있다. 뫼르소에는 그랑 크뤼 밭은 없고 한 단계 낮은 프리미에 크뤼만 있다.
그렇지만 나는 한 등급이 낮은 뫼르소로도 충분하다. 지갑을 움직이는 힘이 가성비인 탓은 아니다. 몽라셰를 ‘신포도’쯤으로 여기는 인지부조화는 더더욱 아니다. 나는 와인을 음식의 한 범주로 본다. 그래서 지불할 와인값이 음식값보다 비싸서는 곤란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나에게 버터로 요리한 해산물 요리와 어울리는 궁극의 와인은 아직까지는 뫼르소다. 권은중(음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