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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이름’은 공간에 서사를 불어 넣는다

등록 2021-06-24 09:36수정 2021-06-24 21:35

오무사·법원·수도원·헌술방
독특한 네이밍으로 관심 끌어
상호 자체가 독특한 내러티브
추억 만들게 하는 장치로 작용
서촌의 오무사. 임지선 제공
서촌의 오무사. 임지선 제공

오래전 소개팅을 한 적이 있다. 달랑 이름 세 글자만 건네받았다. 그렇게 나는 이 사람이 어떤 음악을 좋아하고, 무슨 술을 마시는지, 어떤 곳에 살고 어떤 취향을 가졌는지 이름 석 자를 가지고 한참을 상상했다. 결국 싸이월드 검색창에 이름을 치고 눈 빠지라 클릭하며 이 사람일까, 저 사람일까 한참을 뒤져봤다. 상대방에게 알려주기는 싫은 추억 덕분일까, 그 이름 석 자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브랜딩에서 브랜드 네이밍, 즉 공간의 이름을 짓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가게 이름 하나 짓는데, 뭐 그리 공을 들이냐’고 힐난할 수도 있겠지만, 네이밍이란 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 우리도 아이를 낳으면 용하다고 소문난 작명소나 역술관에 찾아가서 비용을 지불하고 이름을 받아오지 않나.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일단 이름으로 그 사람의 이미지를 유추하는 건 기본이다. 첫 만남에서 본관이 어디인지 묻고, 어떤 한자를 쓰는지 물어보는 건 “오늘 날씨 좋네요”·“점심에 뭐 드셨나요”처럼 흔한 대화의 스킬 가운데 하나다. 그만큼 이름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브랜드의 이름은 단순한 상호가 아니다. 브랜드가 이름을 갖는 순간,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생명이 되어 구체적인 취향과 살아왔던 이야기, 자신만의 서사를 갖게 된다.

헌술방. 임지선 제공
헌술방. 임지선 제공

공간과 이름은 운명 공동체

황정은의 소설 〈백의 그림자〉를 읽으면 작고 오래된 조명가게 ‘오무사’가 나온다. 소설 속 오무사는 곧 철거될 전자상가의 조명가게다. 허름하고 낡은, 슬프고 따스한 빛이 깜빡거리는 곳으로 묘사된다. 서촌의 외진 골목길엔 소설 속 오무사가 현실로 튀어나온 것 같은 바(BAR)가 존재한다. 이름도 소설과 같은 ‘오무사’다. 오무사에 들어가면 노을빛 전구가 드문드문 공간을 밝히고, 오래된 나무 천장과 나무의자가 빛을 받아 모닥불 같은 색을 낸다. 조명가게가 연상되는 장치들이다. 먼 길 온 손님이 헛걸음하지 않도록 예비 전구를 꼭 하나씩 넣어주는 소설 속 오무사 노인의 따뜻함처럼, 그 불빛이 꼭 여기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조용히 의자를 끌어당겨 앉고, 술을 하나 시켜 천천히 마시며 오래된 기억을 더듬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마냥.

서촌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혜화동의 술집인 수도원과 보틀숍(주류 판매점) 헌술방도 참 재미있다. 한 건물 지하에 위치한 수도원은 붉은 고벽돌로 공간을 아래부터 위까지 마감해 꼭 중세 유럽 어느 도시의 수도원에 온 것만 같다. 천장에, 벽에, 테이블 위 켜진 촛불이 유일한 빛이다. 완전히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온 듯한 분위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수도원에서 빚은 맥주를 시켜본다.

수도원. 임지선 제공
수도원. 임지선 제공

거친 질감이 느껴지는 테이블, 흔들리는 촛불을 보면서 향이 진한 맥주를 마시고 있자면 정말 여기가 벨기에나 네덜란드가 아닐까 싶은데, 실은 딥퍼플이라는 엘피(LP)바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그 후 한 온라인 쇼핑몰이 이곳의 벽돌 벽을 다 흰 벽으로 가리고 스튜디오로 쓰다가, 수도원이라는 이름을 만나 탈바꿈한 것이다. 몇번의 손 바뀜으로 거듭난 공간과 이름이 꼭 운명공동체 같기만 하다. 실제로 같이 간 지인은 맥주 리스트들을 보고 공간을 보더니 실제로 가 보았던 맥주를 파는 유럽의 수도원보다 더 수도원 같다고 했다.

혜화동의 또 다른 공간, 헌술방은 정말 어딘가에 있을 법한 헌책방처럼 보인다. 다만, 먼지 먹은 책들 사이사이에 와인이 있는 것이 책방과는 다른 풍경이다. 헌술방은 오래된 헌 책 속에 파묻혀 방해받지 않고 책을 고르듯 와인을 고르길 바라며 만든 곳이라고 한다. 이곳 술병 앞에는 보틀숍에 흔히 붙어있는 테이스팅 노트 대신 술에 대한 짧은 에세이로 대체되어 있다. 하나하나가 단편소설 같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된다. 마치 대학로 오래된 헌책방에 온 것처럼. 책은 살 수 없지만 와인 한병 사는 것만으로도 책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성으로서 책이 갖는 그 분위기와 무드를 전달하기 위해, 이름을 짓고 공간을 만들었구나 싶었다. 그저 소매업을 하는 공간이 아니라 이야기를 가진 브랜드로써 추억을 바탕으로 말을 건네는 곳인 것이다.

법원. 임지선 제공
법원. 임지선 제공

이름이 먼저일까, 공간이 먼저일까

종로의 북촌 헌법재판소를 지나 조금만 걸으면 위스키바 법원이 나온다. 유서 깊은 오래된 건물처럼 움직이는 나무 칸막이가 있고, 옛날 물잔이 나오고, 정갈하고 반듯한 책상들이 정돈되어 나를 맞이하는데, 그 무엇보다 이름이 참 감탄스럽다. 법원 옆 법원에서 파는 버번 위스키라니. 그래서 법원을 만든 현현의 하덕현 대표를 만나 슬쩍 물어보았다. 이름을 어떻게 지었냐고. 어떻게 이런 곳을 만났냐고.

하 대표는 “공간에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 꼭 영화를 만드는 것 같다”고 했다. 홍상수 감독이 영화를 만들 듯 장소를 보고 그 곳에서부터 서사를 만들어가는데 어느 구체적인 한 장면이 이름이 된다고 했다. 오랫동안 담아두었던 생각 속 그 장면처럼 적절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맞는 날씨가 찾아온 날 생각했던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그려질 때 이름이 공간을 찾아가는 것 같다고.

나 역시 그러하다. 브랜딩을 할 때 먼저 이름을 지어 두고, 공간을 찾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공간을 찾을 수 없다. 수많은 메모들 사이에서 이 공간과 들어맞는 이름을 건져 올려 이름표를 달아주는 것이다.

바 법원도 이런 방식으로 이름을 지었다. 30년 역사를 지닌 한정식집 우원이 자리를 내놓아 공간을 둘러보는데 우원의 사장님께서 “이 곳에 정치인도 오고, 판사도 오셨다”고 하는 말을 듣고 법원 옆 버번을 떠올렸다고.

이름과 딱 어울리는 분위기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더 깊게 기억에 남는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세련된 외관의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가게를 보면 우리는 더 인상 깊게 기억한다. 공간으로 기억되는 브랜드는 꼭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 곳의 음악, 조도, 소재, 의자와 책상, 향, 이 모든 것들을 사람의 이야기처럼 기억하고 추억하게 되니까.

다가오는 주말에 특별한 약속이 없다면 자신과 똑 닮은 이름을 가진 공간을 만나러 가 보면 어떨까. 법원에서 버번위스키를, 수도원에서 수도승이 빚은 맥주를, 또는 오무사의 일렁이는 전구 빛 아래 붉은 와인을 마셔보기를. 이런 과정 속에서 자신 또는 자신의 이름에 맞는 공간을 찾아낸다면 꽤 쏠쏠한 소득이 되지 않을까. 임지선 브랜드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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