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진 동아제약 사장. 유튜브 <네고왕2> 갈무리
“(면접을 본) 그날은 2020년 11월16일, 조남주 작가의 소설인 <82년생 김지영>이 ‘2020년 타임지에서 선정한 100권의 책’에 선정되었다고 기사가 난 날이었습니다. 점심시간쯤 연구원에 도착한 저는, 아무도 다니지 않는 연구원 비상계단에 쪼그려 앉아 놀이동산에서 풍선을 놓친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습니다.”
동아제약의 채용 면접 성차별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해당 면접자는 8일 자신의 블로그에 직접 글을 올려 면접 전후 상황과 당시 심정을 자세히 공유하며 동아제약에 “제대로 된 사과문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SNS에는 다른 회사 채용 면접 때도 이와 유사한 성차별적 질문을 받았다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면접 당사자 “나는 면접 병풍이었다” 조목조목 반박
면접자인 ㄱ씨는 8일 모바일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에 올린 글에서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 출근길 지하철에서 이런 글을 쓰게 될 줄 몰랐다”며 면접 상황과 자신이 문제제기를 하게 된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앞서 지난 6일 동아제약은 <네고왕2> 유튜브 영상에 댓글 형태로 “면접관 중 한 명이 면접 매뉴얼을 벗어나 지원자를 불쾌하게 만든 질문을 한 것을 확인했다. 해당 지원자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는 사과문을 올린 바 있다.
ㄱ씨는 지난해 11월 치러진 동아제약 면접 당시 다른 남성 지원자 2명과 달리 자신은 “병풍에 머물러야 했다”고 밝혔다. 면접관인 인사팀장이 남성 지원자에게 공통적으로 “어느 부대에서 근무했는지, 군 생활 중 무엇이 가장 힘들었는지, 군 생활 중 무엇을 배웠는지”를 물은 뒤, 자신에게는 “ㄱ씨는 여자라서 군대를 가지 않았으니 남자보다 월급을 적게 받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냐, 동의하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이에 ㄱ씨가 “친오빠가 직업군인이었기 때문에 군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으나, 임금은 회사 업무와 무관한 노동의 대가로 지급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면접관은 재차 “군대에 갈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ㄱ씨는 이런 대화의 맥락을 봤을 때 “군필자의 처우를 개선하는 신인사 제도 검토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회사의 해명이 합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ㄱ씨는 또 “저러한 사람이 인사팀장이고 또 인사팀장이 채용 과정에서 성차별을 자행했다는 것은 성차별이 조직 전체의 문화와도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한다”고 했다. 동아제약 사과문 내용처럼 단순히 ‘면접관 중 한 명이 면접 매뉴얼을 준수하지 않은’ 정도의 문제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ㄱ씨는 동아제약이 공식 사과문을 댓글의 형태로 단 점 등을 지적하며 “동아제약에 ‘제대로 된’, 그리고 ‘진정성 있는’ 사과문을 요구한다”고 썼다.
동아제약이 <네고왕2> 영상 댓글에 단 사과문. 유튜브 갈무리.
“미투 때문에 여자 안뽑아” SNS에 쏟아진 성차별 면접 경험담
ㄱ씨 글은 SNS 등에 4400여번 공유되고 900여개 댓글이 달리는 등 빠르게 전파됐다. 트위터 이용자들은 해당 글을 리트윗하며 “동아제약 성차별 면접 피해자분이 직접 쓴 글인데 한 줄 한 줄 버릴 게 없다. 이런 똑 부러진 ‘기센 여자’가 조직 안에 들어가는 게 어지간히 두려웠던 모양”, “저렇게 똑똑한 사람은 왜 안 뽑았는지 궁금한 분들도 있나 본 데 똑똑해서 뽑지 않은 것이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ㄱ씨처럼 최근 면접 과정에서 성차별적 질문을 받았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한 트위터 사용자(ll***********)는 지난달 자신이 한 디스플레이 전문기업에서 면접을 보던 중 성차별적 질문을 받은 사례를 공유했다. 그는 당시 면접관이 “미투 때문에 여자를 뽑을 생각이 없는데 불러봤다. 미투 때문에 요새 회식을 안 한다” “결혼할 생각이 있나? 여자들은 결혼하고 애 낳고 금방 회사를 관둬서 문제”라는 등 성차별적 질문을 쏟아냈다고 밝혔다. 이 이용자는 “동아제약 사태를 보면 다들 한 번씩 그런 경험을 하는 듯 (하다). 아직 우리나라 바뀌려면 멀었다”고 덧붙였다.
성차별 면접 여파는 동아제약 불매운동으로도 번지고 있다. 누리꾼들은 SNS에서 ‘#동아제약_불매’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동아제약이 판매하는 상품 리스트를 공유하는 등 “제대로 된 사과와 후속 조처 없이는 불매하겠다”는 취지의 글을 올리고 있다.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34년…여성 구직자 44% “채용 과정서 성차별 경험”
고용·채용 과정에서 성별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 남녀고용평등법은 1987년 제정됐다.
공교롭게도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뒤 처음으로 처벌받은 4개 기업 중에는 이번에 논란이 된 동아제약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 동아제약을 비롯해 신도리코·대학교육보험·대한생명보험 등 4개 회사는 채용 대상을 남성으로 제한한 사원모집 광고를 냈다.
서울지역 여대생대표자협의회는 해당 광고가 “사업주는 근로자의 모집 및 채용에 있어 여성에게 남성과 평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규정한 당시 고용평등법을 위반했다며 검찰에 고발했다. 이후 1990년 3월 검찰은 이들 기업과 대표들을 벌금 100만원에 약식기소했고, 법원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국에서 성차별 채용으로 사업주가 처벌받은 첫 사례다.
이후 몇 차례 개정을 거친 남녀고용평등법은 “여성 근로자를 모집·채용할 때 그 직무의 수행에 필요하지 않은 용모·키·체중 등의 신체적 조건, 미혼 조건, 그 밖에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하는 조건을 제시하거나 요구해서는 안된다”(제7조)고 규정하고 있지만, 채용 과정에서의 성차별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8년 20∼49살 구직경험자 20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실태조사(노동시장 성 격차 해소를 위한 전략개발) 결과를 보면, 구직 경험이 있는 여성 중 44.2%가 채용 과정에서 성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남성 응답자(22.4%)에 견줘 2배 가까이 많은 숫자다. 특히 여성 지원자는 결혼과 출산 계획(58.6%), 결혼·출산 뒤 계속 회사에 다닐 것인지 여부(60.2%) 등에 관한 질문을 남성 지원자보다 2배 이상 많이 들었다. 이외에도 여성은 직장에 타성별 직원이 많은 데 근무하기 불편하지 않겠는지 여부, 커피 심부름 등 외적 업무수행에 관한 질문도 남성보다 많이 듣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