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종철의 여기
‘56년 만의 미투’ 나선 최말자씨
사법체제 보호커녕 유죄 처벌돼
‘여자가 똑똑하면 안된다’ 이유로
집에선 중학교 진학조차 거부당해
택시기사 되길 원했으나 좌절
사회적 편견에 처음부터 당당히 맞서
“잘못 없으니 합의금 주지 마” 요구
늦깎이 공부로 눈 떠 재심 결심
“억울함 혼자 담아두면 아무도 몰라
스스로 권리 찾아 행복 누려야”
‘56년 만의 미투’ 나선 최말자씨
사법체제 보호커녕 유죄 처벌돼
‘여자가 똑똑하면 안된다’ 이유로
집에선 중학교 진학조차 거부당해
택시기사 되길 원했으나 좌절
사회적 편견에 처음부터 당당히 맞서
“잘못 없으니 합의금 주지 마” 요구
늦깎이 공부로 눈 떠 재심 결심
“억울함 혼자 담아두면 아무도 몰라
스스로 권리 찾아 행복 누려야”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어놓은 게 말이 됩니까. 이제라도 바로잡아야죠.” 성폭행을 시도하면서 강제 키스하는 남자의 혀를 잘랐다는 이유로 유죄 선고를 받았던 최말자씨가 지난 18일 오후 부산시 가야대로에 있는 부산여성의전화 근처의 아파트 쉼터에서 당시 상황 등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부산/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사법 지식인이 쓴 판결문 맞나” ―평생 마음속에 눌러뒀던 것을 쏟아낸 뒤 마음은 좀 편해졌나요? “편해졌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신경이 많이 쓰여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후련하죠. 제가 혼자서 그 상처를 끌어안고 56년 넘게 살아왔지 않습니까. 여태까지도 친구들이나 부모 형제에게조차 전혀 아픈 속을 얘기하지 않았거든요. 기자회견 하기 전에 초등학교 친구들 모임에 가서 처음으로 이런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고 터뜨렸어요. 말없이 그냥 듣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너도 억울하지만 너보다 더 억울한 일을 당하고 사는 사람도 엄청 이 사회에 많으니까 너무 분분하지 말고 그냥 네 소신껏 해봐라 하고 응원해주는 친구도 있었어요. 사실 저는 이걸 묻어두고 갈 수는 없다고, 기자나 유능한 소설가를 만나서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어요.”
“제 억울함을 푸는 것도 있지만, 여성들에게 힘을 주고 싶어요.” ’56년 만의 미투‘에 나선 최말자씨가 18일 오후 부산시 가야대로에 있는 부산여성의전화 근처 쉼터에서 최근 재심 신청을 한 이유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부산/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변호사조차 “양쪽 혼인 중매할 터” 변론 ―검찰이 조사할 때 강하게 윽박질렀다고요? “처음에 한두 번은 내가 얘기한 대로 쓰더니 그 뒤로는 이년, 저년, 죽일 년이라고 욕을 하면서 ‘네가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니냐, 너 계획적으로 했지’라면서 책상에 일어서서 의자에 발을 올려놓고 때릴 것처럼 막 협박을 했어요.” ―사회 경험도 없는 미성년자가 변호사나 보호자도 없이 강압 수사를 받았으니 얼마나 공포스러웠겠어요. “그러니까요. 검사가 그렇게 발광을 하면 그냥 눈을 딱 감고 있었죠. 그러면 ‘왜 말 안 하냐, 바르게 말해라, 네가 고의적으로 한 거 아니냐’고 또 고함을 쳐요. 그런 분위기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난 모릅니다 하고 버텼죠.” 법정에서도 그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무죄를 주장했다. 1964년 10월22일 <부산일보>는 전날 결심이 열렸던 법정 모습을 자세히 보도했다. “변호인: ‘(검사 조서를 전부 인정한다고 전제하고 피고에게) 지금의 심정은?’ 최: ‘미안한 생각 없습니다.’ 재판장: ‘처음부터 노 피고에게 호감이 있었던 게 아니냐?’ 최: ‘없었습니다.’ 재판장: ‘노 피고와 결혼해서 살 생각은 없는가?’ 최: ‘없습니다.’” 가해자와의 결혼 얘기는 경찰, 검사, 판사에 이어 변호사조차 했다. 변호사는 최후 변론 때 “‘총각 혀 자른 키스 사건’으로 ○○군이나 ○○양이 이미 딴 처녀 총각과 혼인하긴 우리 사회 풍습으로 보아 어려운 일이니 본 변호인이 팔 걷고 나서 양쪽 부모들로 하여금 한 번 더 마음을 돌리게 해서 ○○군과 ○○양의 혼인 중매에 나서겠다고 열변을 토했”다.(<부산일보> 위 보도) 그러나 어린 최말자는 내내 단호했으며, 자기 의견이 분명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조기 석방을 위해 가해자 쪽과 합의를 추진하는 일도 그는 강하게 만류했다. “그놈이 경찰서에서부터 저랑 결혼을 시켜달라고 했대. 내가 짐승보다 못한 저 인간을 쳐다보기도 싫은데 그게 말이 됩니까? 내가 당한 걸 생각하면 법이 없으면 돌이라도 가지고 죽이고 싶은 심정인데 결혼을 하자는 게 이게 말이 됩니까? 경찰에서도 검찰에서도 그렇게 결혼 얘기를 했지만, 저는 절대로 못 한다고 했죠. 못 한다고 하니까 그럼 돈을 주고 합의를 하라고 해요. 왜 돈을 줍니까? 내가 뭘 잘못했는데 돈을 줍니까? 아버지가 면회를 오셨길래 ‘단돈 십원도 주지 마세요.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돈을 줍니까. 만일 내가 죄가 있다면 더 살죠’라면서 당당하게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안 주겠다고 저한테 말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석방돼서 알아봤더니 땅 한 뙈기를 팔아서 돈을 줬더라고요.”
‘56년 만의 미투’에 나선 최말자씨는 지난 18일 부산여성의전화 회의실에서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재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법원 앞에서 1인시위를 끝까지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도중 맞잡은 최씨의 두 손. 부산/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검찰, 강압과 편파 수사 진행
남자는 강간미수죄 기소도 안돼
사건 직후부터 “언젠가 재론” 다짐 “시대 변해도 여성들 아직 피해 봐
성폭력 관해선 사법 전혀 안 변해
법은 정의 편이라는데 맞나 의심
재심 안되면 법원앞 1인시위 할 것” ____________
“언니, 어떻게 여태 참고 살았어?” 최말자는 1946년 경남 김해시 대동면의 한 농가에서 1남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언니들에 이어 셋째도 딸이자, 집안 사람들은 딸은 이제 그만 나오라는 뜻에서 그를 ‘마자’라고 불렀다. 호적 등록할 때 면사무소에서 한자어인 ‘말자’로 바꿨다. 어른들의 소원대로 그의 바로 밑 동생은 남자였다. 최말자는 그제야 집안에서 이쁨을 받았고, 특히 외갓집에서는 사내를 점지한 복덩이라고 기를 세워줬다. 아버지는 성실하고 머리가 좋았다. 논농사 소출이 남들보다 월등했을 뿐 아니라 여름에는 수박, 겨울에는 배추 농사를 지어서 돈을 많이 벌었다. 고향 기와집의 마루 찬장 하나가 웬만한 집 한 채 값이 나갈 정도의 부잣집이었다. 자녀들 가운데 최말자는 유독 공부하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언니 두 명과 마찬가지로 초등학교까지만 보내고 중학교에 진학시키지 않았다. ―56년 만에 재심 신청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뭐였어요? “제가 어릴 때 공부를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초등학교밖에 못 다녔잖아요. 아버지한테 중학교를 보내달라고 혼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이틀 동안이나 투쟁을 했는데도 안 됐어요. 그렇게 투쟁을 했는데도 우리 아버지는 조금도 안 흔들렸어요. 저나 아버지나 다 최씨 고집이죠.(웃음)” ―여자라고 안 보냈군요. “그렇죠.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안 된다면서요. 그때 공부 못 한 게 한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걸 잘 아는 여동생이 어느 날 엄마들도 공부할 수 있는 학교 광고를 신문에서 보고 전화를 해줬어요. 다음날 바로 그 학교(보경보건고등학교 및 병설 중학교)로 찾아가서 공부를 시작했죠. 2009년이었으니까 우리 나이로 64살 때였어요. 중·고등학교를 4년 만에 마쳤는데도 너무 아쉽지 않습니까. 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나 생각하고 있는데 같이 공부한, 나보다 다섯살 많은 형님뻘 되는 동창이 방송통신대를 간다고 하더라고요. ‘형님, 나도 가면 안 되나’ 물었더니 ‘왜 안 돼’라고 해서 둘이 부산 방통대를 찾아갔죠. 학교 관계자하고 얘기를 했더니 문화교양학과를 가라고 추천을 해줬어요. 그게 뭔지도 모르고 시작했죠.(웃음) 공부를 한 게 큰 힘이 됐죠.” ―어떻게요? “저희 과는 졸업을 하기 위해서는 논문을 써야 했어요. 저는 저한테 제일 중요한, 그동안 쌓여 있는 한을 논문으로 쓰려고 마음먹고 대략 써놓았어요. 그걸 써놓고 우리 과 동기회장을 집으로 불렀어요. 저보다 나이가 젊지만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제가 처음 입학해서 2학년까지는 노력을 많이 해도 과락이 많았는데 그걸 알고는 회장이 한번은 우리 집에 와서 ‘언니, 앉아봐라’ 하면서 노트북 사용법 등 그야말로 고기 잡는 법을 알려준 거라. 그때까지 컴퓨터에 파일을 저장하고 다시 불러오는 것을 몰랐는데 그걸 배우니까 밤새 안 해도 되고, 그렇게 쉽더라고요. 그 뒤 스터디도 같이 하는 등 제가 의지를 많이 한 사람이에요. 그 회장한테 글을 보여주기 전에 먼저 사실대로 제가 걸어온 것을 쭉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기가 차서 가만히 있더라고. 그러고는 ‘이걸 어떻게 여태까지 참고 살았냐’면서 나를 끌어안고 우는 거예요. 내가 ‘이게 너무 큰 숙제인 줄은 아는데 근데 안 할 수는 없어서 이렇게 했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물었어요. 회장은 ‘논문은 논문이고, 사건은 사건이니까 분리를 해서 논문을 먼저 끝내놓고, 이 문제는 다시 풀자’고 하더라고요.” 최말자는 2019년 8월에 졸업하고, 동창회장은 재심 기자회견을 돕는 등 지금도 가장 큰 후원자 중 한 명이다. ―졸업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했겠네요? “네. 회장이 이건 자기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라면서 인터넷에서 샅샅이 검색을 해서 신문기사를 몇개 찾았어요. 그걸 보고는 ‘언니, 이건 서울로 가야 되겠다. 서울로 가서 문을 두드리자’고 했어요. 당연히 ‘나는 따라간다’고 해서 시작됐지요.”
’56년 만의 미투‘에 나선 최말자씨가 18일 오후 부산시 가야대로에 있는 부산여성의전화 상담실에서 <한겨레> 취재진과 만나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였던 자신이 사법권력에 의해 가해자가 되어버린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부산/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강물은 무서워서 수면제를… 최말자는 지난해 12월 한국여성의전화를 처음 찾았다. 여성의전화는 판결문을 입수하고, 변호사를 연결하는 등 재심 신청 준비를 도왔다. ―2018년 초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미투 물결이 이어졌는데, 그런 것도 힘이 되지 않았나요? “그런 면도 많죠. 나도 해야겠다고. 그런 뉴스를 텔레비전에서 보면서 속에서 막 화가 치밀어 올라왔어요. 또 학교에서 ‘성, 사랑, 사회’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그 공부를 하면서 여성이 과거 농경시대, 가부장시대에 얼마나 보호를 못 받고 차별받았는지를 알게 됐어요. 우리 삶의 질이 그런 농경시대하고는 지금 대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잖아요. 저도 사회복지 혜택을 받으면서 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성폭행에 대해서는 사법이 전혀 안 변했어요. 그게 너무 안타깝고 충격이었어요. 분노했죠.” ―선생님 성격상 미투 열풍이 없었어도 문제를 제기했을 것 같은데요. “당연히 하려고 했죠. 그랬는데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서 더 분노하고, 나의 것은 당연히 해야 한다고 더 결심을 한 거죠.” ―왜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 억울한 것도 밝혀야겠지만, 여성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어요. 각자 내용은 다르겠지만, 저와 같은 피해 여성이 엄청 많이 있을 거라고 봐요. 그들이 말을 못 하고 있을 뿐이지요. 근데 이걸 끌어안고 나도 50년 넘게 살았지만, 그런다고 누가 알아줍니까. 그냥 혼자만 억울하고 말죠. 결국 피해자만 이중, 삼중 피해를 입고 살 뿐이죠. 근데 저도 글자라도 한 자 배우니까 이게 그냥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서더라고요. 그래서 용기를 내 여성의전화 문도 두드리고 했죠. 여성의 힘이 지금 대단하다고 느끼고 있어요.” 최말자 사건이 있고 난 뒤 24년이 지난 1988년 2월 경북 영양에서 한밤중에 골목길에서 성폭행을 시도하던 남성의 혀가 잘린 사건이 벌어졌다. 1심은 성폭력 피해자인 변월수에게 유죄를 선고했으나, 2심과 3심은 정당방위를 인정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억울한 심정을 가슴속에 50여년 동안 담고 살아왔는데, 어떤 점들이 제일 힘들었어요? “사건이 나고 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러 가려면 촌이니까 읍까지 들을 건너고 마을을 지나 5리나 되는 길을 걸어가야 해요. 제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서 ‘가시나 저기 간다’고 했어요. 그게 얼마나 큰 상처입니까. 그거는 무기를 안 썼다뿐이지 사람을 죽이는 거나 별로 다른 게 아니에요. 그래도 참으려고 했어요, 왜? 내가 만약 거기서 문제가 생기면 부모 형제가 뒤집어써서 피해를 보잖아요. 참고 또 참았지만, 그런 시선이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래서 낙동강에 빠져 죽으려고 신발을 벗어놓고 둑 아래로 내려가니까 물이 그렇게 무서운 거야. 무서워서 들어가지를 못했어요. 그게 안 돼서 이번에는 약국마다 다니면서 수면제를 사서 자살 기도를 했죠. 했는데 그것도 내 운명인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눈을 떠보니 엄마와 사촌들이 둘러서 있고, 의사도 와 있었어요. 정신은 들었는데 미안해서 꼼짝을 못 했어요. 엄마가 콩을 갈아서 순두부를 만들어줘서 속을 씻어내고 겨우 상처가 나을 만할 때 이번에는 검찰청에서 소환장을 받았어요. 아버지랑 같이 갔더니 그날 바로 수갑을 채우고 조사를 한 뒤에 구속하더라고요.”
지난 6일 오후 부산 연제구 부산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성폭력 피해자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청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1964년 성폭행을 시도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했다는 이유로 중상해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최말자씨는 이날 56년 만에 재심을 청구했다. 연합뉴스
택시 한 대 사주면 갚겠다고 제안했지만 최말자는 6개월여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65년 1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를 향한 따뜻한 시선은 주위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입은 마음의 상처에 대한 치유는커녕 고려조차 아무도 하지 않았다. 부모는 오히려 결혼을 빨리 시키는 게 해법이라고 여겼다.
최말자를 만든 시간들
‘56년 만의 미투’ 당사자인 최말자(오른쪽)씨가 지난 6일 오후 부산 연제구 거제동 부산지법에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을 청구하러 법원 청사로 들어가고 있다.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독신 여성들 생활공동체 꿈꿔 ―만약 재심이 안 받아들여지면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안 되죠. 반드시 재심이 이뤄져서 정당방위이고 무죄가 되어야 하죠. 재심 결정이 안 나오면 나는 법원 앞에서 1인시위라도 할 겁니다. 싸워야죠. 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제가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습니까. 여기서 더 잃을 것도 없고요. 끝까지 갈 겁니다.” ―결심이 단호하시군요. “제일 중요한 건 여자들이 아직도 피해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시대가 성평등 시대로 이만큼 변했는데도 말이죠. 그런데 왜 말을 못 하고 있어야 됩니까. 자기 피해를 끌어안은 채 있지 말고 당당히 자기 주권을 찾고 행복하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백성이라면 자기 권한을 찾아야죠. 언제까지 이 사법이 안 변하고 갈 것인지 이 대한민국 여성들이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어요. 그때는 농경시대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56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우리 생활수준은 변했어요. 그러니 당연히 우리는 두 눈으로 끝까지 지켜볼 겁니다.” ―선생님의 투쟁이 약자들 특히 여성들에게 큰 힘이 될 거 같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법이 배가 고파서 한 소년이 빵을 하나 훔치면 절도로 감옥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근데 권력자들은 매번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교묘하게 법을 피해서 처벌을 안 받지 않습니까. 법은 정의 편에 선다고 했는데 그런 것을 보면 정의가 살아 있기나 한지 모르겠어요.” 최말자는 독신 여성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 설립을 한때 꿈꿨다. 잠은 각자 방에서 자되 식사 등은 공동으로 하는 작은 빌라 건물을 지어서 나이 들고 외로운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조금만 덜 남자 중심의 사회였더라면 그의 타고난 기개와 자질로, 그 정도의 꿈을 실현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주위 사람들과 명소 여행이나 하면서 좋은 음식을 먹는 등 재미있게 지내는 것 외에 뭐가 더 남아 있겠느냐”는 그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원하는 공부를 더 가르쳤다면, 성폭행에 저항한 사건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면, 하다못해 택시운전사라도 됐더라면’ 하는 가정법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부산/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녹취 홍혜원
▶김종철: 1989년 기자로 첫발을 내디딘 뒤 정치부, 사회부 등에서 일하다 현재는 토요판팀 선임기자로 현장을 뛰고 있다. 국가나 사회, 민족 등 추상적인 단어보다 그 실질을 이루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람을 더 좋아한다. ‘지금 여기’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여운이 오래가는 기록’을 지향한다. ‘김종철의 여기’는 4주에 한 번 연재된다.
’56년 만의 미투‘에 나선 최말자(왼쪽)씨가 18일 오후 부산시 가야대로에 있는 부산여성의전화 관계자와 함께 사무실 근처를 산책하며,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였던 자신이 사법권력에 의해 가해자가 되어버린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부산/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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