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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미투 1년, ‘피해자다움’ 굴레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등록 2019-01-28 05:00수정 2019-01-28 11:54

[미투, 용기가 만든 1년 ① ‘피해자다움’이란 없다]

사회 각계 ‘미투’ 터져나오지만
수사·재판과정 뿌리깊은 ‘사회적 통념의 벽’
피해자의 말 왜곡되고 의심받고...

[미투, 용기가 만든 1년] 2018년 1월29일, 서지현 검사의 고발로 한국의 ‘미투’ 운동이 시작됐다. 여성들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고발에 함께하겠다는 연대도 이어졌다. 이들의 말하기는 그동안 한국 사회가 묵인해온 비뚤어진 권력관계에 대한 문제 제기이자 이제는 새로운 시민성이 필요하다는 외침이다. ‘미투’에 한국 사회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3회에 걸쳐 살펴본다.

‘미투’하는 성폭력 피해자들은 ‘피해자다움’의 굴레가 씌워져 또 다른 고통을 받는다. 그림 김대중
‘미투’하는 성폭력 피해자들은 ‘피해자다움’의 굴레가 씌워져 또 다른 고통을 받는다. 그림 김대중

“가죽 재킷 같은 옷 말고, 웬만하면 여리여리하게 입고 법정에 가세요.” 증인 출석을 앞두고 국선변호인이 충고했다. 일부러 빨간 바지를 입고 나가, 당당하게 증언했다.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않네요.” 피고인 변호사는 에스엔에스(SNS)에서 피해자가 웃고 있는 사진을 증거로 제출하며 말했다. “그럼 우울증에 걸린 피해자는 하루 24시간 웃지도 말고 울고만 있으란 건가요?” 음악인 김다은(가명)씨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씌워지는 굴레인 ‘피해자다움’을 깨고 싶었다.

2018년 5월, 김씨를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친 혐의로 기소된 음악인 ㅅ씨에게 징역 2년이 선고됐다. 판결은 지난해 11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경찰, 검찰, 법원을 거치는 동안 같은 질문이 반복됐다. “사건 당일 짧은 치마에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면서요?” 마치 김씨가 성폭력을 유발했다는 식이었다.

한창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던 2018년 1월29일, 서지현 검사가 ‘미투’(MeToo)에 나서는 모습을 보고서야, 김씨는 ‘내 탓’이라는 자책을 그만둘 수 있었다. “처음엔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으면 하고 자책했거든요. 서 검사님의 당당한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어요. 이건 내가 어떤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당할 수 있는 일이구나….”

서 검사의 ‘미투’ 이후 1년이 흘렀다. 문화예술계, 국회, 언론계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스포츠계에서 ‘미투’가 잇따른다. 피해자들은 성폭력이 ‘수치스러운 일’,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사회적 통념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말들은 끊임없이 왜곡당하고, 의심받는다. 피해자의 나이, 출신, 평소 행동, 성폭력 전후로 보인 태도 등을 기준으로 ‘피해자다움’을 감별한다. ‘진짜’ 미투와 ‘가짜’ 미투를 나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피해자다운 피해자란 없다”며 “지금까지 상담소의 상담사례 8만2천여건을 분석해보면 같은 유형의 피해를 당했더라도 가해자와의 관계, 피해 후 여러 상황 등에 따라 피해자의 반응은 다르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왜 거부하지 못했냐”, “왜 즉시 말하지 않았느냐”, “그 후에도 어떻게 계속 일했냐”. 서지현도, 김지은도, 심석희도 모두 같은 질문에 답해야 했다. 저항하면 성폭력을 피할 수 있고, 성폭력 피해자는 수치스러움을 느끼면 즉시 신고할 것이란 ‘사회적 통념’이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그 잣대로 ‘순결한 여성’과 ‘꽃뱀’으로 피해자들 사이에 서열을 매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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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기에 ‘피해자답지 못하다’는 말은, 강력한 힘을 가진다. 가해자에게 무고죄로 고소될 수도, 피해자의 말을 의심할 여지도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을 고발한 수행비서 김지은씨를 향한 불신과 의심,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서울서부지법의 1심 판결이 대표적이다.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성폭력이 있고 나서도) 김지은씨가 수행비서로서의 본분에 충실히 하려고 애쓴 모습이, 심석희 선수가 지난 몇년간 열심히 훈련한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1심 판결에서 재판부가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갖춘 성폭력 피해자라면’ 어떻게 행동했어야 하는지, 성차별적인 통념에 기초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오는 2월1일 서울고법은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2심 판결을 선고할 예정이다.

‘피해자답다’는 뿌리 깊은 통념 때문에 피해자는 ‘미투’에 나서거나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2차 피해’에 부닥친다. 성폭력 사건 이후에 가족이나 주변의 반응, 경찰·검찰·법원에서의 경험 등을 통해 때로는 사건 그 자체보다 더 큰 상처를 입기도 한다. 서지현 검사는 “방송에 입고 나왔던 옷이 명품이라느니, 재판을 핑계로 자리를 비웠다는 등의 2차 피해가 더 힘들었다”며 “이런 2차 피해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홀로코스트라고 본다”고 말했다. 김지은씨도 수많은 악성 댓글과 거짓 정보 등 “2차 피해로 인해 제 삶은 이미 망가져버렸다”고 지난 9일 항소심에 제출한 최후진술문에서 밝혔다.

빙판은 계속 그의 자리가 될 것이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는 다음달 1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개막하는 2018~2019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쇼트트랙 월드컵 5차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27일 오전 출국했다. 그가 두른 초록색 목도리는 김정숙 여사가 심 선수에게 편지와 함께 전달한 것이다. 인천공항/연합뉴스
빙판은 계속 그의 자리가 될 것이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는 다음달 1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개막하는 2018~2019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쇼트트랙 월드컵 5차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27일 오전 출국했다. 그가 두른 초록색 목도리는 김정숙 여사가 심 선수에게 편지와 함께 전달한 것이다. 인천공항/연합뉴스

성폭력 피해자의 경험을 다룬 여러 연구에서는, 피해자가 주변이나 사회의 반응에서 2차 피해를 많이 겪을수록 트라우마도 더 커진다고 지적한다. 잘못된 성폭력 통념에 터잡은 사람들의 반응과 태도 때문에, 피해자는 조직 내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자책, 자기혐오, 자기 비하 등의 고통을 겪게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폭력 피해의 크기는 사건 당시보다 점점 커진다.

배우 반민정씨는 영화 촬영 도중에 자신을 성추행한 배우 조덕제씨를 고소했다가 악성 댓글에 시달렸다. 조씨의 혐의는 지난해 9월 대법원에서 유죄로 인정됐다. 하지만 반씨는 “사건 이후 4년 넘게 친구도 못 만나고 여행도 못 다니며 그들이 원하는 ‘피해자다운 생활’을 했는데 아직도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며 “피해자라는 주홍글씨가 어딜 가도 나를 따라다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조씨는 지금도 반씨를 비난하는 방송을 유튜브 등을 통해 하고 있다. 반씨를 변호하는 이학주 변호사는 “이런 식의 2차 피해는 명예훼손 혐의로만 처벌할 수 있다 보니 벌금형에 그친다”며 “가중처벌하는 입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사회가 어떤 2차 피해를 주는지 봤기에, 대다수의 성폭력 피해자들이 여전히 침묵을 선택한다. ‘피해자다움’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주는 학습 효과다. 김보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책임연구원은 “지난해 상반기에 미투를 언급하면서 상담 요청을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며 “유명인의 미투가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일상적인 권력관계 안에서 드러나지 않는 피해들도 컸다”고 말했다.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피해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피해 사실을 증명하고 이를 인정받아야지만 겨우 피해자로서의 ‘목소리’를 획득한다. 피해자들의 자리에 서 있을 때에만 이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권리를 얻기 위해 피해자가 고통받는 악순환은 반복된다. 김현미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과)는 “미투를 이야기했던 사람들을 세상을 바꿔가는 혁명가처럼 긍정하는 미국과 달리, 우리 사회는 여전히 미투를 피해자의 문제로 사소하게 축소하면서 개인의 책임으로 넘긴다”고 지적했다. 이제 ‘미투’가 개인의 말하기에서 사회의 말하기로 한발 더 나아가야 하는 이유다.

이미 성폭력 피해자들은 스스로 ‘피해자다움’이라는 알을 깨고 나오기 시작했다.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인 권김현영은 “미투 운동의 가장 큰 힘은 ‘나 혼자 겪은 일이 아니다’, ‘내가 침묵하면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방관할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이라며 “피해자들이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에 나서겠다고 한다는 점에서 ‘피해자다움’의 정의가 바뀌는 상황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기존의 ‘피해자다움’이 침묵하고 고통받는 존재에 가까웠다면 ‘미투 운동’ 이후 새롭게 나타난 ‘피해자다움’은 적극적으로 말하고 나아가 연대와 공존을 고민하는 존재에 가깝다는 것이다. 음악인 김다은씨는 서지현 검사의 당당함이 고마웠다고, 전직 유도 선수 신유용은 쇼트트랙 선수 심석희를 보며 용기를 냈다고 털어놨다. 피해자들끼리 말을 건네고, 서로에게 귀 기울였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분법을 넘어서지 못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거나 반대로 ‘가해자 처벌’만을 강조하는 대책을 쏟아냈다. 하지만 공동체 안에 똬리를 튼, 성폭력을 당연시하는 문화, 잘못된 성폭력 통념으로 인한 2차 피해가 바뀌지 않는 한, 미투는 1년 뒤에도 다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피해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대신에 국가와 사회가, 공동체가 묻고 답할 차례다.

박다해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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