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비공개 촬영회’에서 당한 성추행과 사진 유출 피해를 폭로한 유명 유튜버 양예원씨에게 또다시 온라인 악성 댓글이 쏟아지면서 ‘2차 가해’ 우려가 커지고 있다. 양씨가 5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피의자 최아무개(45)씨에 대한 1차 공판기일에 참석해 언론 앞에 서면서다. 이날 양씨 변호인은 “2차 가해가 많이 일어나고 있고 그 부분에 대한 고소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는 양씨에 대한 2차 가해를 멈춰달라고 호소했다.
‘비공개 촬영회’는 지난 5월17일 양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서울 마포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노출 사진 촬영을 강요당하고 성추행을 당했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이후 같은 피해를 주장하는 피해자가 여럿 등장하면서 경찰의 수사가 확대됐다. 이 과정에서 비공개 촬영회를 주관한 해당 스튜디오 실장 정아무개(42)씨가 7월9일 “억울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북한강에 투신해 사망하기도 했다. 경찰은 지난달 초 사건에 연루된 피의자 6명을 형법상 강제추행과 촬영물 유포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양씨의 유출 사진을 최초로 촬영하고 유포한 최씨는 6명 가운데 유일하게 구속된 인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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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전 서울 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유튜버 촬영물 유포 및 강제추행 사건' 제1회 공판을 방청한 피해자 양예원씨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양씨에 대한 악성 댓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사망한 스튜디오 실장 정씨는 5월25일 한 매체를 통해 양씨와 주고받았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공개한 바 있다. 사진 촬영은 양씨가 ‘돈 때문에’, ‘합의하에’, ‘자발적으로 한 일’이라는 주장이었다. 당시 사건을 수사 중이던 경찰까지 나서 “피의자가 여론전 하느라 뿌린 걸 그대로 보도하다니, 경찰에 제출되지도 (않았고) 진위도 모르는 것”이라며 “(해당 보도는) 심각한
2차 가해”라고 비판했지만, 이 대화 내용은 지금껏 양씨를 비난하는 주요 근거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정씨 사망 이후에는 양씨에게 ‘정씨 죽음에 책임을 지라’는 식의 댓글이 지속해서 달리고 있다.
양씨 쪽은 법적 대응을 시사했다. 5일
<연합뉴스> 보도를 보면, 양씨의 변호인 이은의 변호사는 법정에서 진술 기회를 요청해 재판 절차를 공개해달라고 요청하면서 “피해자가 공개적으로 피해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사법 현실이 있다. 2차 가해가 많이 일어나고 있고 그 부분에 대한 고소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재판 종료 뒤 취재진과 만나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의 일이나 선택은 유감이지만, 그런 것에 대한 비난이 고스란히 피해자 어깨에 쏟아진다.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한 것이 잘못이라는 비난이 쏟아지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지적이 부족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사성도 5일 오후
페이스북 공식계정에 글을 올려 “유포 가해자는 자신의 가해 사실이 밝혀진 기사 댓글란에서조차 양씨만큼 악플에 시달린 적이 없다. 지금은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고통받고 있는 부조리한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한사성은 “최씨가 양씨와 타 모델의 사진들을 유포한 사실을 인정했다. (최씨는) 재판 전까지만 해도 절대 자신이 유포하지 않았다며 혐의를 극구 부인했고, 피해자에게 의심과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게 하는 데 일조해 왔다”고 지적했다. 한사성은 “(그런데도) 대중들은 피해자들의 일관된 진술보다 가해 사실을 강하게 부인했다가 결국 자백한 범죄자의 말을 더 신뢰해 주고 있다”고 밝혔다.
한사성은 양씨에 대한 2차 가해를 멈춰달라고 호소하며 “유포 가해도 잘못됐지만 양예원도 잘못했다는 말은 틀렸다”고도 했다. 가해자가 유포 범죄라는 사이버 성폭력을 저지른 것과 피해자가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성범죄 피해자가 제3자가 쓴 온라인 댓글을 통해 2차 가해를 당하고 고소를 진행한 사건은 양씨 사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직장 동료와 상사로부터 연쇄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한 ‘한샘 성폭력 사건’ 피해자는 최근 누리꾼 수 천 명을 허위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 및 모욕 혐의로 고소했다. 피해자의 변호인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피해자가 자신을 ‘꽃뱀’으로 몰아가는 등의 악성 댓글을 보고 쓰러지기까지 할 정도로 정신적 충격이 컸다고 전했다. 그는 “익명이 보장되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해서 타인에 대해, 특히 성범죄 피해자에 대해 함부로 해선 안 된다. 그 부분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라고 고소 이유를 밝혔다.
경찰은 지난달 피해자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직장 동료를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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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에 대한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8월1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1심 무죄를 선고받은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악성 댓글을 단 사람을 잡고 보니 피의자 측근이었던 일도 있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지난 3월 ‘미투’ 폭로한 김지은씨는 폭로 직후부터 각종 음해성 댓글에 시달려야 했다. 3월12일 김씨는 자필 편지에서 “저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숨죽여 지내고 있다. 신변에 대한 보복도 두렵고, 온라인을 통해 가해지는 무분별한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고 피해를 호소한 바 있다. 김씨는 편지에서 “저에 대해 만들어지는 거짓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다.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고, 누가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누구보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며 조직적인 움직임을 의심했다.
결국 김씨를 돕고 있는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3월16일 ‘2차 가해를 막아달라’며 서울지방경찰청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그런데 지난달 경찰이 잡은 ‘악플러’가 알고 보니 안 전 지사의 전 수행비서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관리자였던 것이다. 이들은 포털의 기사 댓글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성폭행 혐의와 상관없는 김씨의 사생활과 품행에 대한 글을 올리거나 원색적인 욕설 등 2차 가해에 해당하는 글을 쓴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이들 이외에도 김씨에 대해 악성 댓글을 단 사람들을 추가로 수사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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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이유진 기자
n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