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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그래픽뉴스] 10살 이후 나는 엎드려 자기 시작했다

등록 2016-05-23 16:11수정 2016-05-25 10:49

여성 삶의 주기로 보는 ‘상시화된 공포’
지난 17일 새벽 ‘강남역 살인사건’ 발생의 충격으로 여성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와 강남역 10번 출구 추모 공간 등에서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지하철과 택시, 옷가게 탈의실과 길거리 등 매일같이 지나치는 공간에서 성추행과 성희롱 등 폭력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평범하고 안전해야 할 일상 공간에서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고 나면, ‘안전한 곳은 없다’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도 합니다. 여성들이 겪는 ‘일상화된 공포’를 생애주기에 맞춰 정리했습니다. 이 기사는 사건 발생 이후 제 주변 여성들이 구술로 전해온 실제 사례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에스엔에스(SNS) 등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여성들의 목소리도 보탰습니다. 실제 사례를 전해온 여성들은 생애주기 허들을 한국 여성들이 하나도 겪지 않고 지나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하나도 걸리지 않고 무사히 통과한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운이 좋아서’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시작하며.

나는 술을 좋아한다. 술자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즐긴다. 그래서 귀가가 늦어지는 경우도 있다. 내가 35살일 때 함께 일을 하던 상사는 술자리에서 “딱 한 잔만 더 마시자”라며 자신의 집에 데리고 갔다. 내가 짧게 술자리를 정리하고 집을 나서자, 상사는 손님방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늦은 시각 외진 지역이라 택시가 안 잡힌다는 게 이유였다.

호의로 생각하고 빈방에서 잠을 청하려는 찰나, 그는 방으로 불쑥 들어와 나를 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쫓기듯 집을 나온 뒤 공포 속에 간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고민 끝에 사과를 요구하는 메일을 보냈지만 “같이 잘 마음 없으면 왜 따라왔느냐”라는 답이 돌아왔다. ‘쿨하게’ 용서하는 것도 후배인 내 몫이었다.

돌이켜보면, ‘젊거나 어린’ 여성인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림을 클릭하면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허들1. 10살, 내가 엎드려 자는 이유

12살이던 사촌오빠는 낮잠을 자고 있던 내 가슴에 손을 올렸다. 2차 성징이 시작돼 유방이 생기기 시작하던 때였다. 인기척을 느꼈지만 당혹감에 눈을 뜰 수 없었다. 사촌오빠가 조용히 방을 나가기를 기다렸다. 가족들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 뒤론 누가 들어올까 두려워 문을 잠그고 자는 버릇이 생겼다. 잠귀도 밝아졌다. 무엇보다 엎드리지 않고는 잠을 청할 수 없게 됐다.

허들2. 16살, ‘바바리맨’의 악몽

남자의 성기를 맨눈으로 처음 본 것은 16살 여고생 때였다. 두통 탓에 야간자율학습에 빠지고 홀로 학교를 나서던 날이었다. 학교 후문 인근에서 버버리 코트를 입은 남자를 마주쳤다. 중년의 남성은 자신의 성기를 만지며 웃어댔다. 내가 소리를 지르자 즐거워하며 자신의 성기를 더 세게 흔들었다. 부끄러워하거나 도망치려는 기색도 없었다. 나는 으레 들려오던 여고생들의 무용담처럼 면전에서 웃어주거나 호기롭게 대응할 수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한숨에 집으로 뛰어왔다.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 시절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혼자 밤길을 걷지 못하게 됐다. 집 앞에 위치한 독서실에서 귀가할 때도 가족에게 전화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허들3. 20살, 파인 옷 탓이라네요

대학생 시절,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목이 드러나는 라운드 티를 입었다. 버스 옆자리에서 흘끔흘끔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또래의 남성이었다. 그는 손을 자신의 성기로 가져가더니 자위행위를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전부터 이런 일이 있으면 소리를 지르겠노라 머릿속으로 수차례 시뮬레이션을 하며 다짐했었다. 실전에서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이 얘기를 주변 사람에게 털어놓는 데만 수개월이 걸렸다. 어렵사리 속내를 털어놓자 “파인 옷은 조심하는 게 좋겠다”는 반응이 돌아오기도 했다.

허들4. 27살, 밀폐된 택시에서 마주한 성희롱

사회초년생 시절, 새벽까지 이어지던 야근 때문에 종종 택시를 이용했다. 무심결에 보조석에 앉은 날, 노년의 택시기사는 “남자친구가 있느냐”며 말문을 열었다. “새벽 4시인데 마누라가 씻고 기다리고 있대. 왜 그럴까”라고 묻기도 했다. 내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늦은 시각까지 일하려면 하체운동을 많이 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기사가 흥분할 것이 우려돼 불쾌함을 드러내거나 차에서 내리겠다고 말하기도 두려웠다. 달리는 택시는 사실상 밀폐된 공간이다. 게다가 조종하고 있는 것은 그다. 나는 무력감 속에서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 뒤론 불가피하게 택시를 타야 하는 날이면 번호판부터 확인한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차 번호를 알려주고,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허들5. 29살, “인사 고과에서 불이익 받고 싶으냐”

영업직으로 일하기 때문에 사람을 자주 만난다. 음식점을 운영하는 고객의 가게에 방문한 날, 차장은 쌈을 사서 중년의 고객에게 대접하라고 했다. 매출이 가장 큰 고객이라는 게 이유였다. 동기가 머뭇거리자 “쟤가 저렇게 답답하다”며 내게 같은 행위를 강요했다. 머뭇거리는 내게 “인사 고과에서 불이익 받고 싶으냐”는 얘기도 들려왔다. 동기 남자 직원을 포함해 십수 명의 동료가 있었지만, 모두 침묵을 지켰다. 눈을 마주쳐도 시선을 피했다. 동료를 신뢰할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허들6. 30살, 아직도 숨어서 담배를 피우는 이유

나는 흡연자다. 대학생 때부터 십년 가까이 담배를 피웠지만 다른 사람의 눈길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다. “여자도 담배 피우나”라는 말을 흘리고 지나가는 이들은 셀 수 없다. 일면식도 없는 어른들은 “애 낳을 때 어쩌려고 하느냐”며 소리를 질렀고, 손에서 담배를 뺏기도 했다. 처음 보는 노인이 뺨을 손으로 내리친 경우도 있었다. 그 뒤 나는 건물 구석이나 큰 차 뒤에서 숨어서 담배를 피운다. 남자들에겐 ‘교류’의 장이라던 흡연실은 애써 피한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그래픽 정희영 기자 hee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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