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순 씨.
[짬] ‘한식대첩’ 음식평론가 명성 심영순 씨
아들 잃고 난 셋째딸 섭섭해 ‘엄격’
결혼 뒤 전국 맛집 돌며 나홀로 공부 네 딸들 소풍 도시락 맛 소문나 강사로
재벌가 모시기 경쟁 ‘옥수동 선생님’
“손 많이 가는 정성이 좋은 한식 기본” 그의 어머니(유별례)는 충남 한산의 부잣집 외동딸이었다. 어릴 때 살던 집에는 넓은 부엌이 있었고 가마솥도 크기별로 여러개 걸려 있었다. 어머니는 요리도 잘했다. 잔치가 벌어지면 수십명의 찬모가 달라붙을 정도였다. 바로 위 아들 둘을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잇따라 잃은 어머니는 셋째로 태어난 딸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어린 그에게 부엌일을 혹독하게 시켰다. 반찬을 하면 간이 안 맞는다고 퇴짜를 놓기 일쑤였고, 생선을 구우면 맛없이 구웠다고 혼을 냈다. 하지만 그에게 어머니는 ‘하늘’이었다. “세모시 옥색 치마를 입고, 고운 명주 앞치마를 두른 채 장독대를 닦곤 하던 어머니는 여인이 아니고 천사처럼 보였어요.” 어머니는 그렇게 요리의 기초와 한복의 멋을 가르쳐준 셈이었다. 심씨는 요리를 잘하고 싶어 10대 후반후터 각종 요리학원을 다녔다. 그런데 학원에서 배운 요리를 내놓으면 어머니는 화를 냈다. “이것이 어느 나라 음식이냐? 한식도 아니고, 중식도 아니고, 배우지 마라.” 학원비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꿋꿋이 궁중요리까지 배운 그는 결혼한 뒤에 스스로 요리를 공부했다. 전국의 소문난 맛집을 찾아다니며 끈질기게 비결을 터득했다. 서울 신촌시장의 기주떡(술떡) 맛을 배우기 위해서 다섯번 찾아갔다. 처음엔 외면하던 떡집 주인은 그의 열의에 감동해 술 냄새가 심하게 나지 않으면서 부드러운 기주떡 만드는 비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심씨가 수천명의 제자를 거느린 인기 요리강사가 된 것은 딸이 다니던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선생님들 덕분이었다. 소풍날 교장·담임 등 선생님들에게 싸 보낸 도시락 맛을 보고 ‘어머니교실에서 다른 학부형들에게도 가르쳐주라’고 권고를 받은 것이다. 마침 그 학교엔 재벌집 딸들이 많이 다녔다. 소문이 나면서 재벌가에서 딸과 며느리에게 요리를 가르쳐달라며 외제차를 집 앞까지 보내 모셔갔다. 그는 기죽지 않았다.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보고 배운 것처럼 엄하고 당당하게 말하고, 매사에 분명했다. 재벌들은 심씨의 그런 모습을 높이 샀다. 1988년 서울 옥수동에 문을 연 그의 요리학원은 맛있고 품위있는 한식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곧 명성을 얻었다. “사실 우리의 전통음식은 좀 소박하고, 맛도 짜거나 매워요. 가난한 시절, 그저 허기를 채우고자 만든 음식들이 많잖아요?” 양반 음식으로 알려진 전주비빔밥만 해도 그에겐 개선의 여지가 많았다. 그가 만든 콩나물비빔밥은 접근부터 다르다. “잔뿌리가 없는 5㎝ 정도 자란 콩나물이 가장 맛있어요. 콩나물을 살짝 데쳐 기름에 무쳐 놓아요. 밥은 콩나물을 데친 물에 소금과 다시마, 멸치국물을 넣어 고슬고슬하게 해요. 밥이 되면 콩나물을 올리고 뜸을 살짝 들여요. 이래야 명품 콩나물비빔밥이 되죠.” 그는 한식의 기본인 양념장을 만드는 데 시간이 많이 든다고 여기고, 2004년 계량화된 ‘향신양념’을 개발했다. 무·배·마늘·양파·생강·대파 등 양념장에 꼭 들어가는 채소와 과일을 모은 즙이었다. ‘즙 선생’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어릴 때 어머니가 해주던 그 한식 맛은 이제 불가능해요. 우선 식재료부터 나빠졌어요. 그 시절 모든 채소는 천연 유기농이었어요. 게다가 지금 주부들은 요리를 귀찮아해요.” 그는 한식 세계화를 위해서라도 요리법을 간편하게 하거나 한식요리사 자격증을 쉽게 내주면 안 된다는 역설을 편다. 쉽게 만들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고급으로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 결국은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좋은 음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씨의 딸 네명도 모두 음식 관련 일을 하고 있다. 40년 요리한 깐깐한 엄마의 기가 전수된 덕분일까?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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