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 남편 안병무 전 한신대 교수의 구속으로 활동을 시작한 구속자가족협의회 시절 박영숙 선생의 모습(뒷줄 맨 왼쪽).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앞줄 왼쪽 둘째)씨도 보인다.
박영숙 전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의 삶
평생 자가용 없이 “BMW 몬다”
2008년에야 “선풍기 시원하더라”
열정·헌신·소탈…여성리더십 전형 87년 대선패배 뒤 정치인 변신
여성·생태 정책의제 활발히 제기
99년엔 여성재단 창립 외연 넓혀 박영숙 전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은 평소 “생을 마칠 때까지 현역으로 살고 싶다”는 말을 버릇처럼 되뇌었다고 한다. 그를 따르던 후배들은 박 전 이사장에 대해 열정과 헌신, 소탈함으로 모범을 보여준 여성 리더십의 전형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박 전 이사장은 1956년 이화여대를 졸업한 직후 같은 학교 선배인 이희호씨의 뒤를 이어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 들어가 이후 57년 동안 이어질 여성·시민·환경운동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10살 연상의 1세대 민중신학자이자 민주화운동가인 안병무(1996년 작고) 전 한신대 교수와 결혼한 뒤 민주화운동에도 발을 들이게 된다. 1976년 안 교수가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되자 거리에서 구속자 가족 시위를 시작했다. 와이에이치(YH) 여성노동자 투쟁 때는 손수건에 수를 놓아 팔고 음식을 만들었다. 고인이 민주화운동의 일선으로 한발 더 내딛게 된 계기는 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면서 피해자인 권인숙씨가 유죄를 받은 데 충격을 받은 그는 이후 투사적 면모까지 보였다. 박 전 이사장은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가 1987년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재직을 내려놓자 이듬해 총재대행을 맡으면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여성·시민사회계와 긴밀하게 협력한 박 전 이사장이 아니고선 가족법·남녀고용평등법 개정이 이뤄지기 어려웠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이미경 민주당 의원은 “박 선생님은 늘 ‘시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정치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여성·생태 등 정책적 의제를 제기해 당의 이미지를 새롭게 하셨다”고 말했다. 그의 사회활동의 화룡점정은 1999년 한국여성재단을 창립한 일이다. 여성재단은 어려운 형편 속에서 전국에 흩어진 여성단체들의 구심점 구실을 하며 여성운동의 외연을 크게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십줄에 걸친 수많은 이력을 가졌음에도 그는 말이 아닌 행동하는 활동가였다. ‘모든 회의에 시작부터 끝까지 참석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외부 기고도 자신이 직접 작성했다. 인생 후반기 환경운동가로도 활약한 그는 평생 자가용을 소유하지 않았다. 평소 “난 비엠더블유(버스·지하철·도보)를 몬다”고 자랑했다. 2000년대에 고인과 함께 한국여성재단에서 손발을 맞춘 강경희 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는 “2008년에 뜬금없이 ‘선풍기가 제법 시원하더라’ 그러셨어요. 알고 보니 그때까지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이 사셨던 거예요”라고 기억했다. 많은 후배들은 고인을 ‘소탈한 언니’로 기억한다. 그는 한국여성재단을 만든 뒤 해마다 연말에 여성 정치인과 활동가 등 100여명을 집으로 불러 송년회를 하면서 음식을 직접 대접했다. 강 대표는 “축사 한마디 안 하고 부엌에서 앞치마 두르고 머리가 산발이 돼 음식 만드시던 모습이 선하네요. 이젠 누가 이어받을지…”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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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야 “선풍기 시원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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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생태 정책의제 활발히 제기
99년엔 여성재단 창립 외연 넓혀 박영숙 전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은 평소 “생을 마칠 때까지 현역으로 살고 싶다”는 말을 버릇처럼 되뇌었다고 한다. 그를 따르던 후배들은 박 전 이사장에 대해 열정과 헌신, 소탈함으로 모범을 보여준 여성 리더십의 전형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박 전 이사장은 1956년 이화여대를 졸업한 직후 같은 학교 선배인 이희호씨의 뒤를 이어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 들어가 이후 57년 동안 이어질 여성·시민·환경운동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10살 연상의 1세대 민중신학자이자 민주화운동가인 안병무(1996년 작고) 전 한신대 교수와 결혼한 뒤 민주화운동에도 발을 들이게 된다. 1976년 안 교수가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되자 거리에서 구속자 가족 시위를 시작했다. 와이에이치(YH) 여성노동자 투쟁 때는 손수건에 수를 놓아 팔고 음식을 만들었다. 고인이 민주화운동의 일선으로 한발 더 내딛게 된 계기는 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면서 피해자인 권인숙씨가 유죄를 받은 데 충격을 받은 그는 이후 투사적 면모까지 보였다. 박 전 이사장은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가 1987년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재직을 내려놓자 이듬해 총재대행을 맡으면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여성·시민사회계와 긴밀하게 협력한 박 전 이사장이 아니고선 가족법·남녀고용평등법 개정이 이뤄지기 어려웠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이미경 민주당 의원은 “박 선생님은 늘 ‘시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정치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여성·생태 등 정책적 의제를 제기해 당의 이미지를 새롭게 하셨다”고 말했다. 그의 사회활동의 화룡점정은 1999년 한국여성재단을 창립한 일이다. 여성재단은 어려운 형편 속에서 전국에 흩어진 여성단체들의 구심점 구실을 하며 여성운동의 외연을 크게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십줄에 걸친 수많은 이력을 가졌음에도 그는 말이 아닌 행동하는 활동가였다. ‘모든 회의에 시작부터 끝까지 참석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외부 기고도 자신이 직접 작성했다. 인생 후반기 환경운동가로도 활약한 그는 평생 자가용을 소유하지 않았다. 평소 “난 비엠더블유(버스·지하철·도보)를 몬다”고 자랑했다. 2000년대에 고인과 함께 한국여성재단에서 손발을 맞춘 강경희 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는 “2008년에 뜬금없이 ‘선풍기가 제법 시원하더라’ 그러셨어요. 알고 보니 그때까지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이 사셨던 거예요”라고 기억했다. 많은 후배들은 고인을 ‘소탈한 언니’로 기억한다. 그는 한국여성재단을 만든 뒤 해마다 연말에 여성 정치인과 활동가 등 100여명을 집으로 불러 송년회를 하면서 음식을 직접 대접했다. 강 대표는 “축사 한마디 안 하고 부엌에서 앞치마 두르고 머리가 산발이 돼 음식 만드시던 모습이 선하네요. 이젠 누가 이어받을지…”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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