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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유산·조산 산재 신청률 0.0032%…‘개인 탓 편견’에 묻힌 위험

등록 2023-06-26 05:00수정 2023-06-26 16:09

업무상 질병 포함됐지만 높은 벽
직장여성 유산율 1.03%…피부양자보다 2배 높아
게티이미지뱅크 코리아
게티이미지뱅크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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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센터 전화상담원 ㄱ(41)씨는 2020년 12월 뱃속에서 자라던 아이를 잃었다.

ㄱ씨가 일하던 콜센터는 “근무시간 중에는 하루에 한번 화장실을 못 갈 만큼 (직원들의 행동을) 심하게 통제”를 했다. “배 뭉침으로 몸이 좋지 않아, 휴게실에 10분만 있어도 상사가 쫓아와 업무 복귀를 강요”할 정도였다. 임신 35주차에 아이를 사산한 ㄱ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업무상 질병(업무상 유해 환경에 노출된 데 따른 산업재해)이라며 요양급여 지급을 신청했다.

지난해 12월, 근로복지공단 업무상 질병 판정위원회는 “임신 35주에 사산이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며, 진료 기록에서 발병 1주일 전에 조기 진통이 확인되는데 (전화가 없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쪽지를 받거나 태아검진휴가를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사산과 업무의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ㄱ씨의 산재를 인정했다.

유산 여성 노동자 산재 신청률 0.0032%

ㄱ씨는 2010~2022년 사이, 유산(사산·조산 포함)으로 산재를 인정받은 직장 여성 10명 중 1명이다. 2016~2021년, 직장 여성 30만8002명(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 질병코드 변경으로 2010~2015년 수치는 포함되지 않음)이 유산을 경험했다는 걸 고려할 때 턱없이 적은 수치다. 유산에 따른 산재 신청률(10명)은 0.0032%, 이 가운데 산재로 인정받은 사람은 5명이다. 유산이 업무상 질병에 포함(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된 지 5년이 다 돼 가지만, 사실상 유산이 산재로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유산도 산재가 되나요?”

유산에 따른 산재 신청·승인율이 저조한 까닭은, ‘유산은 여성 개인의 탓’이라는 사회적 편견 속에, 업무상 유해 환경 노출이 유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식 및 의학적 연구가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실제로 수도권 한 종합병원 응급실 간호사인 이아무개(30대)씨는 “응급실에서 환자를 이송하고, 쪼그려 앉아 주사를 놓거나 수액 팩 20개가 든 20㎏ 상자를 나르다 (임신 6주차에) 유산이 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면서도 “이게 산재가 될 수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뇌졸중 환자가 입원한 병동에서 일했던 간호사 진아무개(30대)씨도 두차례 유산을 겪었지만 “산재 신청을 할 생각도 못 해봤다”고 말했다. 진씨는 “의사에게 ‘일이 힘들고, 쉬지 못해서 유산 된 거냐’고 물었지만, ‘임신 초기엔 자연 소진(유산)되는 일이 많다’는 말을 듣고, 그냥 내 탓인가보다 했다는 것이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유산한 여성 10명 중 6명은 직장인

하지만 노동 조건이 임신 유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근거들은 여럿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2016~2021년 ‘연령별·가입자별 유산·분만 진료 현황 등’ 자료(가임기 연령 19살 이하~49살 여성 대상)를 보면, 유산을 경험한 여성 10명 중 6명(58.9%)은 직장인(30만5610명)이었다. 직장 여성(국민건강보험 직장가입자 기준)과 여성 피부양자(비취업 포함)의 유산율을 비교해보니, 직장 여성의 유산율이 1.03%로, 여성 피부양자 유산율(0.53%)보다 2배가량 높았다. 특히 저출생으로 임신 자체가 줄어들면서, 여성 피부양자 유산 인원은 2016년 4만3169명에서 2021년 2만8242명으로 1만4927명(34.6%)이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직장 여성의 유산은 5만3611명에서 4만9019명으로 8.6% 줄어드는 데 그쳤다.

<한겨레>가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고용노동부의 연구용역 보고서 ‘여성 근로자의 유산에 대한 산재 판단 등에 관한 연구’는 이와 관련해 “노동조건과 유산 등의 관련성을 분석한 해외 논문 22편 중 17편에서 야간근무 또는 교대근무를 수행하는 여성이 유산, 조산을 포함한 부정적 임신 결과들과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보였다”는 점을 짚고 있다.

보고서에 담긴 2021년 스웨덴의 한 연구는 ‘야간근무가 잦거나, 야간근무 후 다음 업무 복귀 전까지 휴식시간이 28시간 미만인 경우 조산 위험이 커진다’고 지적했다. 또 야간근무를 포함한 교대근무를 하면 유산 위험이 1.2배 증가한다는 2014년 연구(덴마크)도 있었다. 연구진은 보고서에서 “최근 산과학, 직업환경의학 교과서에서는 특히 장시간 노동, 야간근무, 정신적 스트레스 등이 조산과 연관성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임신 초기 유산은 흔해”…‘사고’ 위주의 산재 판정

하지만 산재 판정 심사에선 이런 요소들이 적극적으로 고려되지 않고 있는 듯했다. 2010~2022년 유산으로 인한 산재 신청 22건에 대한 ‘업무상 질병 판정서’를 보면, 업무량과 스트레스, 업무 자세, 야간근무 등 ‘사회 심리적 유해 요인’에 따른 유산으로 산재 신청을 한 사람 13명 가운데, 산재가 인정된 사람은 4명에 그쳤다. 나머지 9명은 “개인의 신체적 조건에 의한 것”, “임신 초기 자연유산은 여성에게 비교적 흔하다”는 등의 이유로 산재 인정을 받지 못했다. 특히 “업무 스트레스가 유산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도 주된 불인정 사유였다.

한 예로, 안마시술소에서 사무 및 고객 관리, 시술 후 침대 뒷정리 등의 업무를 담당했던 ㄴ씨는 ‘고객 급증으로 업무량이 늘고, 주로 서서 일해서 조산을 했다’며 산재를 신청했으나, 질병판정위는 “직업적 요인의 강도, 지속 시간과 조기 진통 유발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현재까지 없다”는 등의 이유로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노동안전 분야 전문가들은 산재 여부를 판정할 때, 임신하지 않은 몸 혹은 남성을 중심으로 설계된 일터 환경이 여성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나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는 “그동안 일터에서의 ‘위험’은 주로 사고, 중대재해로만 인식되는 등, 무엇이 여성에게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는지 고려하지 않은 채 작업 환경이 구축됐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무엇이 임신한 여성에게 작업상 유해 요인인지를 업무상 질병의 구체적 인정기준으로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임신한 여성에게 중량물 취급이나 장시간 노동, 업무 스트레스 등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세진 이주빈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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