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민우회와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전국 208개 여성인권단체가 속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회원들이 2019년 9월18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정부가 유엔 기구에 ‘비동의 강간죄’(상대방 동의 없이 이뤄진 성관계를 성폭력 범죄로 처벌) 도입에 반대한다는 취지의 의견을 밝힌 것으로 확인됐다. 강간죄를 판단할 때 ‘저항 못할 폭행·협박’ 유무만 따지지 말고,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중점에 두도록 하라는 유엔 쪽 권고를 한국 정부가 5년째 수용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12일 <한겨레> 취재 결과, 정부는 최근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소위 ‘비동의 간음죄’ 도입은 성폭력 범죄의 근본 체계에 관한 문제로서, (도입할 경우 검사에게 있는) 입증 책임을 사실상 피고인에게 전가시키고, 여성의 의지나 능력을 폄하할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긴 서면답변서를 제출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각 국가들이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감독하는 기구로, 위원회가 지난 3월 쟁점별 질의(쟁점 목록) 중 하나로 한국 정부에 ‘형법 제297조를 개정하여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을 정의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묻자 이렇게 답변한 것이다.앞서 위원회는 2018년 3월 ‘형법 제297조를 개정해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을 정의할 것’을 한국 정부에 권고한 바 있다.
하지만 정부는 올해 초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에 ‘비동의 강간죄 신설을 검토한다’는 내용을 담았다가, 법무부의 반대에 부딪쳐 막판에 번복하는 등 5년째 이런 권고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정부의 이런 태도는 영국·독일·스웨덴 등이 비동의 강간죄를 신설하는 등 강간죄를 동의 여부로 개편하는 세계적인 추세와도 어긋난다.
서혜진 변호사(더라이트하우스 법률사무소 대표)는 특히 ‘강간죄 처벌 여부가 전적으로 피해자의 의사에 따라 좌우될 것’이라는 정부의 주장에 대해 “피해자가 당시 동의가 가능한 상태였는지, 동의할 자유가 있었는지, 가해자와의 관계에서 우열은 없었는지,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가 온전히 가능한 상황이었는지 등과 같은 맥락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