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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체시계는 1년 365일 돌아가지만 노화는 어느 날 갑자기 필요해진 돋보기 안경처럼 인생의 한 순간에 훅 들어온다.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인가’라는 고민 역시 중년 이후 머릿속을 맴도는 주제이지만 맴돌기만 할 뿐 구체적인 계획을 짜기는 쉽지 않다.
기자 출신으로 여성가족부 차관으로도 일했던 김희경(56)씨는 5년 전 아버지의 뇌병변 장애를 지켜보면서 비로소 혼자 나이 들어가는 상황을 직시하게 됐다. 그는 중년(40~64살)의 비혼 여성 19명에게 지금과 앞으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관련된 제도적 현실과 문제의식을 담아 지난달 <에이징 솔로>(동아시아)를 출간했다. 솔로뿐 아니라 나이 들어가는 누구나에게 궁금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김은형(51) <한겨레> 선임기자가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김희경씨와 만나 대담을 진행했다. 김 선임기자도 4년째 ‘너도 늙는다’ 칼럼을 쓰고 있다.
서로의 꼴을 봐주는 사이
김은형: ‘에이징 솔로’의 ‘현타’가 왔던 순간이 언제인가?
김희경: 건강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진 뒤 뇌병변 장애로 인지증(치매)을 앓게 됐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불안이 몰려오더라. ‘나도 아버지 같은 상태가 되면 어떡하나, 나는 아버지처럼 대리해줄 자식도 없는데’ 이런 생각이 들면서 한동안 되게 우울했다.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해봐도 사람이 어떻게 죽을지는 선택하지 못하잖나. 완벽히 대비가 되는 일도 아니고. 거기서부터 고민이 시작됐던 것 같다.
김은형: 40대부터 60대 여성 19명을 만나 심층 인터뷰로 책의 뼈대를 삼았다.
김희경: 처음엔 불안한 마음으로 이런저런 책을 많이 봤는데 혼자 사는 중년으로 참조할 만한 이야기가 별로 없었다. 노후 대비 관련 책들은 배우자와 자녀가 있는 조건을 상정하고 이야기를 풀어가니까. 나처럼 혼자 사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인터뷰를 하게 됐다. 이 사람들은 생애 말기를 포함해 노후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대책을 갖고 있는지 직접 듣고 싶었다.
김은형: 책에 연령대도 하는 일도 다양한 인터뷰이들의 생각과 생활 방식이 담겼는데 관통하는 주제가 있나?
김희경: 미래에 대한 걱정거리에 대해 물어봤을 때 돈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는 않았다. 뜻밖이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은 분들도 그랬다. 돈이 없어서 생길 법한 여러가지 문제들을 관계에 기대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혼자 살지만 혼자 살지 않는다. 돈이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돈보다 주변의 관계망이 미래의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은형: 책에 등장하는 전북 전주의 1인가구 생활공동체 ‘비비’나 노년의 여성들이 함께 사는 경기 여주 ‘노루목향기’ 등은 그런 관계망을 구체화한 사례인데 취재를 하면서 본인이 선택하고 싶은 관계망의 방식을 찾았나?
김희경: 책을 쓰기 전부터 공유주택이나 공동주거에 관심이 있어 기웃거려본 적이 있다. 그런데 공동주거를 하겠다고 모였다가 상처받고 깨지는 경우가 적지 않더라. 그런 점에서 1인 독립주거를 하면서 아파트 앞동 옆동에 친구가 있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가지고 사는 비비의 방식이 이상적으로 보인다.
김은형: ‘2년 전 솔로 친구와 가까운 거리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고 쓰셨는데 일종의 약식 공동체 생활 실험인 셈인가?
김희경: 꼭 그 이유만은 아니지만 솔로 친구가 가까이 있다는 게 이사 이유 중 하나였다. 산책하고 싶을 때 가끔 불러낼 수 있고 중요한 기념일을 함께 보낼 수 있는 동네 친구가 있다는 게 굉장히 좋더라. 그래서 비비의 지금 사는 형태가 부럽다. 비혼 1인 23가구가 모여 있는데 모두 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친구들이 대여섯명 정도는 가까이 있으면 좋을 거 같다.
김은형: 비비가 20년 동안 깨지지 않고 유지돼왔다는 것도 좀 신기하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함께하는 이상적인 노후를 꿈꾸면서 공동체주택을 짓다가 또는 짓고 살다가 깨지거나 상처받고 집을 나온 사람이 제 주변에도 꽤 된다. 사실 거의 다 그런 거 같다.(웃음) 그만큼 가까운 사람들과 가까이 산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 아닐까.
김희경: 20년 동안 좋은 일만 있었겠나, 내부의 갈등도 있었겠지. 인터뷰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다 들은 건 아니지만 “우리가 서로 꼴을 봐주는 사이니까 이렇게 유지될 수 있었다”는 답변이 인상적이었다. ‘꼴을 봐주는 관계’라는 건 서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기꺼이 감당하면서 살아가는 사이라는 뜻이다. 가족이나 부부처럼 틀을 깨기 어려운 구속력 있는 관계 안에서 보통 가능한 것인데 공동체도 서로의 꼴을 봐주는 태도가 있어야 유지가 되는 거 같더라. 요즘 ‘느슨한 연대’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느슨’에만 방점이 찍혀 있으면 연대는 잘 안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김은형: 다시 듣고 보니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얻어지는 연대를 바라는 말 같기도 하다.
김희경: 그런데 나도 관계에 서툴러서 이런 걸 잘 못한다. 진짜 큰 과제야, 과제.(웃음)
김희경씨(왼쪽)가 김은형 선임기자와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대담을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김은형: 책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남에게 폐 끼치는 상황을 극도로 꺼린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만큼 다른 사람이 나에게 폐를 입히는 상황을 꺼린다는 사실을. 이야말로 ‘인색한 사람’의 정의가 아닌가”. 하지만 다들 폐를 끼치지 않는 게 미덕인 것처럼 배우지 않았나.
김희경: 남한테 신세 안 지고 손 안 벌리는 걸 자율이나 독립이라고 배웠지. 나 역시 자율이나 자립·독립이 내 존재를 구성하는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쓰러지는 걸 보면서 그 믿음이 와장창 깨졌다.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죽을지도 결정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 아닌가. 솔로로 혼자 산다는 것도 가족을 구성하지 않았을 뿐이지 관계 안에서 살아간다. 젊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
김은형: 젊을 때는 철이 없어서 그런 생각을 못 하는 게 아닐까.(웃음) 지금도 자신이 자립적이라고 생각하는 젊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주거나 식사 등을 부모한테 의지하면서 자기가 돈을 번다는 것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 도움 없이 사는 것처럼 착각하지 않나.
김희경: 맞다. 옛날에 내가 스스로 자립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할 때도 가사나 생활의 여러 부분들을 외주로 해결한다든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망이 있었는데 마치 내 힘으로만 다 살아온 것처럼 착각했다. 그런 착각이 아버지를 보면서 박살 난 거다. 이제 주변을 보면 그 사람을 개인으로 살게 만드는 주변의 관계망들이 더 눈에 보인다.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망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 거고. 근데 나 역시 참 그게 안 된다.
김은형: 이런 점도 있다. 작가님도 기자로, 다른 직업인으로 바쁘게 살아왔잖나. 일로 바쁘게 살면 관계망의 상당 부분이 업무 동료고 그들이 심리적 지지대가 되면서 생활적인 면에서도 관계망 역할을 한다. 비록 퇴사를 하면 멀어지는 관계라도 말이다.
김희경: 2년 반 전 여성가족부 일을 그만두면서 날마다 출퇴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돼서 그런 생각을 더 하게 된 거 같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늘면서 이전과 다른 친밀함에 대한 욕구가 점점 커지는데 사람을 만날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다른 솔로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궁금해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던 것도 있다.
김은형: 아버지가 책을 쓰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되셨는데, 여러 이유로 많은 사람이 인지증을 겪는다. 그런데 치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부족하고 막연한 두려움만 퍼져 있다. 마치 갑자기 사람이 정신을 완전히 놓고 미치광이가 되는 것처럼. 하지만 책에서 투병하는 아버지에 대한 묘사를 보면 치매에 대한 오해와 현실을 알게 된다.
김희경: 요양병원에 계신 아버지가 한번은 불같이 화를 낸 적이 있다. 병원 사람들이나 간병인들이 말이 잘 안 통한다는 이유로 노인들을 아기 다루듯이 한다. 인지장애가 있어도 평상시의 기질은 그대로 남아 있고 자신의 의지라는 게 있는데 “우쭈쭈, 착하다, 잘한다” 이런 식이니까 오히려 불쾌하게 느끼면서 폭발하신 거다. 치매 관련 책을 몇권 찾아봤는데 치매 환자 돌볼 때 아이 다루듯 하지 말라고 강조하더라. 또 재활치료 가면 만날 어린아이들이 하는 세모, 네모, 별 모양 끼워 넣는 것들만 반복하는데, 사람의 인지수준에 맞게 치매 치료가 발달하지 않은 거 같아 아쉽다. 병원에서 자꾸 그런 걸 시키면서 “이거 재밌죠?” 이러니까 아버지는 “그렇게 재밌으면 너나 하라”고 하신다.(웃음)
김은형: 루이즈 애런슨의 <나이듦에 관하여>를 보면, 암이나 다른 병은 걸리면 다양한 특성과 종류가 있어 세세한 설명을 해주는데 치매는 그냥 걸렸다는 통보 말고는 다른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만큼 연구 자체가 안 돼 있다는 거다. 치매에 무지하니까 공포심만 생기고, ‘치매 걸리면 안락사할 수 있는 데 가서 죽어야지’, ‘똥오줌 못 가리면 스위스 가야지’ 이런 말만 손쉽게 쏟아내는 것 아닌가.
김희경: 생산가능인구가 아니면 다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하니까 노인들을 쓸모없는 사람처럼 본다. 또 아픈 노인이 자기 손으로 먹고 배변 활동을 하지 않으면 존엄성을 상실한 것처럼 얘기하는데 참 불쾌하다. 나 역시 아버지 일을 겪기 전까지는 불쾌하다는 생각을 못 했고 친구들과 스위스 이야기를 하곤 했다. 자다가 예쁘게 죽는 것만 미디어에 나오니까 생애 말기에 인간이 어떤 상태에 처하는지 너무 무지해서 그런 것 같다. 요새 ‘쓸모’라는 말을 좀 싫어하게 됐다. 쓸모가 없어진 사람이 인간성 자체를 상실한 건 아니지 않나.
김은형: 누구와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에 대한 공감을 하면서도 가정을 꾸린 사람과 솔로 간의 차이를 느낀 건 책에서 나온 “1인가구가 의지할 수 있는 인생 마지막의 대리인” 문제였다. 가족이나 자식이 있으면 내가 의사표시를 할 수 없을 때 생애 말기에 대한 결정을 자연스럽게 맡길 수 있지만 솔로들은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이 비혼자와 아닌 사람을 가르는 중요한 차이인 것 같다.
김희경: 혼자 사는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그 문제다. 아플 때도 내가 의식이 있으면 전화를 하거나 누구한테 부탁할 수 있지만 인지능력을 상실해 전적으로 돌봄에 의존하는 상태가 됐을 때 누가 나를 위해서 의사결정을 해줄 것인가, 식물인간으로 병원에서 숨만 쉬게 되는 것 아닐까, 이런 공포가 제일 크다. 지금으로서는 별 방법이 없다. 당장 병원에서도 가족이 아닌 친구는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없지 않나. 얼마 전에 북토크를 갔는데 한분이 우시면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시더라.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더 아픈 노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서 결국 노모를 보호자로 모셔와야 했다고. 건강이나 돌봄 관련한 의사결정의 대리인을 가족 아닌 사람도 할 수 있게 열어놨으면 한다. 다른 나라들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
김은형: 이와 관련된 정책 결정권자들이 가족이 있고 돌봄을 받는 데 익숙한 남성들이 대부분이라 그런 게 아닐까.
김희경: 그런 부분도 있고 1인가구의 정치세력화가 안 돼서 그렇다는 말씀도 하더라. 세력화가 돼야 목소리를 내는데, 그런 부분에 대한 공적인 논의가 너무 없다. 언제쯤 이런 사안들이 좀 진척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족이 아니라도 생애 말기에 나 대신 의사결정을 해줄 수 있는 대리인 제도와, 지금은 돈 있는 사람들만 은행을 활용하는 신탁 제도 같은 걸 공적으로 지원하는 공공수탁 제도만이라도 현실화되면 생애 말기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김은형: 늙어가면서 우울한 이야기들만 계속 한 거 같다. 사실 나이 들어 뭔가 좋아지는 것처럼 말하는 건 다 거짓말 아닌가.(웃음) 그래도 청년기와는 다른 생애 주기에 들어서면서 새롭게 시작하거나 기쁨을 느끼는 것들도 있지 않나. 없나?(웃음)
김희경: 2년 전부터 대학 친구들과 아마추어 극단을 시작했다. 우연한 계기였는데 연극을 하는 친구가 주도해서 한 10명 정도 모였다. 못 하는데 재밌다. 그래도 우리끼리는 되게 진지하다.(웃음) 친구는 바빠서 지금은 지도를 못 하고, 다른 연극배우를 연습실로 모셔서 배우는데 그분 정말 몸에 사리가 몇개는 쌓였을 거다.(웃음) 작년 춘천연극제에서 아마추어 경쟁부문으로 진행하는 소소연극제에도 참여했고 2주 전에도 공연을 했다.
김은형: 진짜 새로운 도전이다.
김희경: 얼마 전에는 콜센터 이야기로 우리끼리 워크숍 공연을 했는데, 그 삶을 잘 모르지 않나. 극본을 읽으면서 몰랐던 이야기와 삶에 대해 공부하게 된다. 나이 들면 사람이 굳고 자기 세계에 갇히지 않나. 내가 안 살아본 인생을 연기하면서 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왜 이런 행동을 할까 이해하려고 애쓰게 된다. 굳어진 내 세계를 깨려고 노력하는 시도로 좋은 거 같다.
김은형: 50대가 되면서 술자리도 친한 친구들과만 만들고 싶을 정도로 인간관계의 폭이 줄어들기도 하지만 반면 또 이 나이에 다시 복원되는 친구들도 있다. 그런 건 좋은 거 같다.
김희경: 어제도 40대 초반의 솔로 후배가 우울해하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결혼한 친구들과는 이제 이야기도 안 통하고 다 멀어졌다고. “10년만 기다려라. 그때 다시 다 만난다”고 말했다. 육아와 직장 일로 40대까지 가장 바쁘지 않나. 50대가 되면 아이들도 웬만큼 크니 솔로와 비솔로 친구들이 다시 편하게 모이고 극단도 하면서 놀게 되는 거다. 작지만은 않은 새로운 기쁨이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