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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성폭력 대응 개선책 10여 번 권고에도…법안 처리 ‘0건’

등록 2023-01-31 07:00수정 2023-01-31 08:36

지난 2021년 10월2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고검 의정관에서 열린 ‘디지털 성범죄 등 전문위원회’ 제2차 권고안 발표 자리에서 당시 전문위원을 맡은 사이버 위협 대응 보안기업 ‘에스투더블유’(S2W) 이지원 부대표(왼쪽)가 설명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당시 서지현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등 대응 태스크포스(TF)팀장. 연합뉴스
지난 2021년 10월2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고검 의정관에서 열린 ‘디지털 성범죄 등 전문위원회’ 제2차 권고안 발표 자리에서 당시 전문위원을 맡은 사이버 위협 대응 보안기업 ‘에스투더블유’(S2W) 이지원 부대표(왼쪽)가 설명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당시 서지현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등 대응 태스크포스(TF)팀장. 연합뉴스

‘엔(n)번방 사건’을 계기로 2021년 8월 출범한 법무부 ‘디지털 성범죄 등 전문위원회’(이하 위원회)가 성폭력 대응체계 개선방안에 대해 십여차례 권고했으나, 지난해 국회에서 법안으로 처리된 권고안은 단 한 건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위원회는 지난해 5월 해산할 때까지 9개월동안 총 11차례 권고안을 발표했다. 대부분 법률 개정이 필요한 사항이다. 위원회가 구체적으로 법률안의 예시를 들며 개선을 권고한 내용은 총 22건으로, 이 중 5건을 제외한 17건이 의원 입법안으로 발의됐다. 위원회 발표 이후 권고안 내용을 반영해 발의된 법안은 모두 19건이다.

발의된 주요 법안 중에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재판 증인신문 과정에서 피고인 쪽으로부터 성관계 행위를 구체적으로 묘사해달라는 요구를 받거나 부적절한 질문을 받는 일을 막기 위해 재판장이 미리 피고인 측 신문사항을 제출받아 검토하도록 한 법안(형사소송법 개정안)이 있다. 또 최근 게임과 메타버스(가상현실) 등 온라인 공간에서 여성으로 인식되는 캐릭터를 대상으로 성적 행위를 하거나, 여성 이용자에게 언어 성폭력을 하는 일이 늘면서 이를 처벌하기 위한 법안(정보통신망법 개정안)도 국회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이외에도 성폭력 범죄를 처벌하는 법령에서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를 삭제하고,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등의 표현을 ‘사람의 신체를 성적 대상으로 하는'으로 바꾸는 내용의 법안(성폭력처벌법 개정안)도 발의돼 있다. 이를테면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영상’을 ‘사람의 신체를 성적 대상으로 하는 영상’으로 바꿔 가해자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식이다.

그런데 30일 <한겨레>가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통해 확인한 결과, 발의된 법안 19건 중 지난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법안은 전무했다. 각 법안 심사는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법률안을 심사하는 소관 상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 회부돼 안건으로 상정된 법안은 단 3건으로, 나머지 16개 법안은 소위원회 회부에 그쳤다. 상정된 법안 3건도 국회의원과 관계기관이 의견을 주고받는 심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각 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했다. 이효린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사무국장은 “현재는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온라인상의 성폭력을 명예훼손죄나 모욕죄 정도로 처벌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성폭력 사건을 성폭력으로 다루지 못하고 가해자가 가볍게 처벌돼 피해자 보호에 미흡한 게 가장 큰 문제”라며 “온라인상에서 은밀하게 이뤄지는 성폭력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선이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증인신문에서 유·무죄 인정과 무관한 피해자의 성적 이력을 묻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은 오래 전부터 그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며 “성폭력 범죄 성립 여부를 판단할 때 피해자에게 계속 성적 수치심을 느꼈는지 아닌지를 묻기보다 가해자가 한 행동에 주목해서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회원들이 지난 2019년 3월5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의 디지털 성범죄 엄중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회원들이 지난 2019년 3월5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의 디지털 성범죄 엄중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처리되지 못한 법안 중에는 보호관찰 대상자가 보호관찰 기간에 피해자에게 정보통신망을 이용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신설한 법안(보호관찰법 개정안)도 있다. 현재 보호관찰이 야간 시간대 외출 제한, 특정 장소 출입 금지 등과 같이 현실 세계 시·공간을 전제로 하는 한계를 보완하려는 취지다.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리셋’(ReSET)은 “디지털 공간에서의 보호관찰은 미국 등 해외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정책”이라며 “차단 대상이 되는 불법촬영물을 어떤 기준으로 설정할 것인지, 보호관찰 대상자가 소지한 정보통신기기 일체를 어떻게 관리할지 등 세부적인 논의가 필요하지만, 디지털 성범죄가 일상화된 우리 사회 현주소를 고려했을 때 디지털 공간에서의 보호관찰을 도입할 필요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위원회가 권고했지만 발의되지 못한 법안 중에는 수사기관이 정보통신망을 통해 유포되고 있는 피해영상물을 발견하면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기 전이라하더라도 전기통신사업자에게 영상물을 보전하라고 명령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배상명령(법원이 피고인에게 유죄판결을 선고하면서 그의 범죄행위로 발생한 피해를 피해자에게 배상할 것을 명령하는 제도) 대상을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불법촬영물 이용 협박 등 디지털 성범죄로 확대하자는 위원회 권고를 반영한 법안 역시 발의돼 있지 않다. 다만 위원회 권고 전에 배상명령 대상을 모든 범죄로 확대하는 내용의 법안(소송촉진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리셋은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후로도 디시인사이드와 같은 남초 익명 커뮤니티 사이트에 디지털 성범죄 가해 게시물이 게시되는 행태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며 “단순히 (피해영상물을) 보전하기 위한 목적을 넘어 확산 방지를 위해, 게시된 디지털 성범죄 정보에 대한 보전명령뿐만 아니라 접근 차단명령도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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