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한 남성 기획사 대표가 체중감량 점검을 이유로 연습생들에게 겉옷을 모두 벗고 찍은 사진을 요구한 일이 경찰에 고발돼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게티이미지뱅크
2012년 연예기획사 대표가 연습생들을 대상으로 저지른 성범죄 사건이 여럿 알려졌다. 당시 정부 등이 나서 여성 연예인 및 연습생에 대한 성범죄 근절·예방 방안이 마련됐다. 그로부터 꼭 10년이 지났지만, 기획사 대표의 성범죄 소식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22일 한 남성 기획사 대표가 체중감량 점검을 이유로 연습생들에게 겉옷을 모두 벗고 찍은 사진을 요구한 일이 경찰에 고발돼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획사 대표-연습생’이라는 권력관계에, 연습생 10명 중 4명이 미성년자라는 조건이 더해져 연습생 대상 성범죄는 근절되지 않고 있다. ‘2021 대중문화예술산업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국내 기획사에 소속된 연습생 1895명 가운데 43%(826명)가 19살 미만 미성년자다. 29일 <한겨레>는 지난 2년간 법원 판결문 열람시스템에 올라온 1심 판결문을 통해 연예기획사 대표가 연습생을 상대로 저지른 성범죄 사건들을 들여다봤다.
가해자들은 연습생의 ‘끼’와 ‘외모’를 점검한다는 명목으로 과도한 신체 노출을 요구했다. 10대 여성인 연습생 ㄱ씨는 지난해 소속사 대표 ㄴ씨에게 “요즘 어떤 노력을 하고 있냐”는 연락을 받았다. 대표는 사무실로 ㄱ씨를 불러 입고 있던 옷을 벗으라고 했다. 이어 성추행을 했다.
이 사건의 1심 재판부는 “연예기획사 운영자인 피고인이 소속 연습생인 피해자를 추행한 것으로서 그 죄질이 매우 좋지 않다”면서 대표에 대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40시간의 성폭력 치료강의 이수를 선고했다. 그러나 ㄴ씨에게 아동·청소년·장애인 시설 취업제한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성범죄자 취업 제한 시설에는 연예기획사 같은 대중문화예술기획업소도 포함된다. 결과적으로 ㄴ씨는 연예기획사를 직접 운영하거나 취업하는 데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게 됐다.
‘데뷔’나 ‘성공’을 미끼로 한 기획사 대표의 성 착취도 반복된 범죄 유형이었다. ㄷ씨는 그룹 활동을 하는 소속 연예인에게 “전체가 다 뜰 수는 없다. 나한테 잘하면 밀어주겠다”고 말하면서 신체 접촉 요구에 응하면 단독 기사를 내주거나 일감을 줬다. 그렇지 않으면 피해자들은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어, 그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ㄷ씨는 “피해자들이 계약 종결을 하려 펼친 억지 주장”이라고 반박했고, 실제 피해자들을 모욕·무고죄로 고소까지 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ㄷ씨가 과거에도 면접보러 온 연습생에게 술을 먹이고 추행해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고, 집행유예 중에 다시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을 들어 ㄷ씨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지난해 1월 재판부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혐의로 ㄷ씨에게 징역 1년의 실형, 성폭력 프로그램 80시간 이수와 함께 5년간 아동·청소년·장애인 시설 취업제한 명령을 선고했다.
대중문화예술산업 기획사 성폭력·성희롱 예방교육 이수율(단위:%). 2021 대중문화예술산업 실태조사 갈무리
피해자의 고발로 기획사 대표의 성범죄 사실이 드러나곤 하지만, 연습생이 신고하기를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사례도 많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20년 12월 공개한 ‘대중문화산업 종사 아동·청소년 인권상황 실태조사’ 보고서에는 이런 실태가 드러난다. 보고서는 “(성적 피해를 입어도) 불이익이나 문제제기에 대한 부담감을 이유로 피해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업계 관계자의 심층 인터뷰에도 이같은 실상이 담겨있다. 연습생을 가르치는 ㄹ씨는 “(매니저가) 스트레칭 할 때 도와줄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스킨십한다. 그건 너무 빈번하다. 그런 것을 회사에 얘기하지 못한다.”고 했다. 연습생인 ㅁ씨는 “남자 선생님이 말을 할 때 터치(신체접촉)을 하신다. 나는 이 정도만해서 괜찮은데, 내 친구에게 허벅지를 댔다거나 하는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직접 신고를 하지 않더라도, 피해에 대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연습생을 상대로한 각종 성범죄 등에 대응하기 위해 ‘콘텐츠성평등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임규빈 콘텐츠성평등센터 담당자는 “미성년이 많은 연습생은 피해를 당해도 성범죄인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며 “성평등센터 등 전문기관을 통해 꼭 상담 받기를 권한다”고 했다. 성평등센터는 심리상담·법률지원 등을 제공한다.
연습생에 대한 피해가 있기 전 성범죄 예방을 위한 교육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연예기획사의 성폭력·성희롱 예방교육 이수 비율은 업체 규모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2021 대중문화예술산업 실태조사’을 보면, 직원이 10명 이상인 기획사의 교육 이수율은 94.4%에 달했지만, 직원이 5인 미만인 기획사의 이수율은 40~49%에 그쳤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