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인 근력 찾아드립니다>를 쓴 샤크(사진 왼쪽)와 에리카. 샤크 제공
#2013년 20대 직장인 황현정씨는 점심시간을 틈타 한 크로스핏 체육관에 들어섰다. 펜슬 스커트에, 굽높이 10㎝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코치는 말했다. “이게(크로스핏) 되게 어렵고 힘들거든요. 안 될 거예요.” 심드렁한 그의 말이 황씨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아뇨, 저 이거 할건데요? 오늘 저녁부터 나와도 되죠?”
#같은 해 20대 체대 출신 이윤주씨도 크로스핏 체육관을 처음 찾았다. 당시 체중 95㎏. 트레이너를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겉모습을 바꿔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운동하는 걸 1시간정도 지켜본 끝에 내린 결론은 ‘못하겠다’였다. 한 시간의 고강도 훈련을 소화할 자신이 없었다. 조용히 집에 가려는 순간 관장도, 코치도 아닌 한 회원이 그를 불러세웠다. “왜 그냥 가세요? 이거 진짜 재밌어요!”
크로스핏과의 첫 만남은 서로 달랐지만 8년이 지나 두 사람은 함께 여성전용 크로스핏 체육관 ‘샤크짐’의 공동 대표가 됐다. 황현정 대신 ‘에리카’, 이윤주 대신 ‘샤크’ 코치라는 새 이름으로. 이달 초 나온, 크로스핏을 하며 겪은 몸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기록한 책 <떼인 근력 찾아드립니다>(위즈덤하우스)도 함께 썼다. 지난 14일 서울 성북구 샤크짐 1호점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문과 출신 평범한 사무직 직장인이었던 에리카와 체대 출신 엘리트 체육인 샤크. 두 사람이 살아온 궤적은 다르지만 포개어지는 부분이 있다. 청소년기부터 주변의 ‘다이어트 영웅담’을 끊임없이 들으며 성장했고, 큰 가슴에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일본 만화 캐릭터를 동경했으며, 수차례 다이어트를 거쳤다는 점이다.
“누가 방학 동안 살을 쫙 빼서 개학 때 나타나면 반 전체가 난리가 났다.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하루에 밥 두 숟갈만 먹기를 2주 동안 반복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책 중에서, 샤크)
“하루는 학교에서 체험학습으로 등산을 갔는데, 다음 날 옆 반 여자애네 엄마가 다리에 알 배어서 미워질까봐 그 애 종아리를 밤새 맥주병으로 밀어줬다는 얘기를 들었다.”(책 중에서, 에리카)
성장과정 내내 이들을 조여왔던 ‘여자는 하얗고 말라서 연약해 보여야 한다’는 사회적 코르셋은 두 사람을 극단적인 다이어트로 몰아갔다. “20대 중반, 검지 손가락만한 과자 3조각으로 하루 끼니를 때운 적이 있어요.”(에리카)
크로스핏을 만나고 사회적 코르셋을 내던졌다. 오로지 자기 신체의 기능에만 몰두한 채, 타인의 시선을 잊었던 경험은 신선했다. 자유로움과 해방감이 밀려들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의식을 많이 했는데, 크로스핏을 하면 내 스트렝스(힘)에 집중을 하니까 자신을 스스로 대상화 하던 습관을 멈추게 됐어요.”(에리카)
재미는 곧 능력으로 발휘됐다. 특히 체대를 나온 샤크의 기량은 남달랐다. 크로스핏 입문 아홉달 만에 크로스핏 게임즈 오픈에서 단숨에 한국 1위를 차지한 이래 수없이 1등을 거머쥐었다. 에리카 역시 샤크에 이어 아시아 세번째 ‘아이언 메이든’(24㎏ 케틀벨로 한 다리 스쾃, 프레스, 무게 턱걸이를 한 여성)에 올랐다.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서도 샤크에게는 좀처럼 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포디움(3위까지 설 수 있는 시상대)에 서지 못한 여성 선수도 후원을 받는데, 수없이 많은 대회에서 1등을 한 제게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더라고요. 그들이 바라는 ‘여성성’이 없어서겠죠. 어떤 대회는 본선에 진출한 여성 참가자에게 브라톱과 쇼트 팬츠를 주고 꼭 입을 것을 요구하기도 해요. 저는 거부하고 티셔츠를 준비해달라고 했는데 준비를 안 했더라고요.” 에리카는 남성들과 함께 운동하면서 ‘예상 외로 배꼽이 예쁘다’는 등의 외모 평가를 숱하게 들었다고 했다. 체육관 내 ‘성별 임금 격차’도 존재했다. “명백히 제가 국내 랭킹도 높고 자격증도 더 많이 땄는데도 남성 코치 급여가 저보다 1.5배 많았어요. 왜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쟤는 가장이잖아.’”(샤크)
샤크와 함께 <떼인 근력을 찾아드립니다>를 쓴 에리카. 샤크 제공
사회의 축소판처럼 성차별과 성희롱이 만연한 체육관을 떠나 두 사람은 여성을 위한 체육관을 제 손으로 만들었다. 2020년 샤크짐 1호점을 열었다. 66㎡(20평)규모인 이 공간은 여느 크로스핏 체육관과 다르다. 세 가지가 없다. 간판, 거울, 성별 고정관념. 에리카 코치는 “여성 전용 체육관이라고 하면 남성 취객에 괜한 타깃이 될까봐 간판을 달지 않았다”고 했다. 그 흔한 거울도 없다. ‘보여지는 몸’이 아니라 ‘기능하는 몸’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대신 여타 체육관과 비교해 훨씬 많은 것이 있다. 0.5∼1㎏ 단위로 촘촘하게 나눠진 운동 기구가 있다. “대부분의 체육관이 남성을 디폴트(기본값)으로 설정하고 기구를 들여요. 바벨의 경우 중량도 20㎏부터 시작하니 여성들은 퍼스널 트레이닝을 수십회 받으면서도 바벨로 하는 운동을 할 엄두를 못내죠. 저희는 7.5㎏ 연습용 바벨부터 들여 놨어요. 보통 4㎏ 단위로 구비된 케틀벨도 저희는 2㎏ 단위로 잘게 쪼개어 갖춰놨죠. 여성 손 크기에 맞는 메디신볼(공 모양의 운동도구)도 들여놨고요. 여성들이 보다 쉽게 한계를 돌파하도록 했어요. 그렇다고 절대 가벼운 것만 두진 않아요. 여자니까 좀 가벼운 것? 그런 건 없죠.” (에리카) 한 회원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다니던 체육관에 덤벨이 4㎏와 8㎏ 밖에 없어서 평생 4㎏만 들고, 그게 한계라고 여겼는데, 이곳에서 5㎏, 6㎏도 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철봉 높이도 여성 평균키에 맞춰 달았더니 적잖은 회원들이 그토록 무서워하던 턱걸이를 척척 해냈다고 한다.
샤크짐을 연 지 3년째, 이들은 ‘여성의 운동=다이어트 용’라는 납작한 인식이 달라지길 바란다. “초반에 40㎏대인 한 여성이 와서 ‘30㎏대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랬던 그분도 운동하면서 ‘100㎏ 들기’로 목표를 바꿨어요. 여기는 무거운 무게를 잘 드는 게 제일 멋있는 공간이거든요. 다이어트 말고, 체력을 키우기 위해 운동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샤크)
“운동은 내 몸에 내구성을 높이는 일이에요. 삶의 가동범위를 넓히는 활동이고요.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은 말라야한다’는 거대한 가스라이팅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요. 아기코끼리를 쇠사슬에 묶어두면 나중에 엄청난 힘이 생겨도 그 사슬을 끊어낼 생각을 못하잖아요. 여성들이 근력 운동을 통해 자유를 맛보면 좋겠습니다.”(에리카)
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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