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성미래센터에서 열린 '성평등 정책 강화를 요구한다' 여성·시민 긴급 기자회견에서 선언 연서명에 참여한 8709명이 남긴 말과 명단이 붙어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여성가족부 폐지’ 논의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 외에 구체적인 폐지 및 개편 계획이 공개되지 않아 정치권에서는 ‘설왕설래’만 있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여가부를 폐지하고 기존 사업을 다른 부처로 이관하는 방안, 여가부를 대통령 직속 위원회로 대체하는 방안 등이 ‘폐지 시나리오’로 제시되고 있다. 두 방안 모두 큰 우려를 낳고 있다. 여성정책 전문가들은 법률제출권·예산편성권을 가진 독립된 성평등 주무부처의 폐지가 정부 차원의 성평등 추진체계의 현격한 약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민의힘 일부에선 현재 여가부 소관인 한부모 가족과 학교 밖 청소년, 경력단절 여성 등에 대한 각종 지원 사업을 보건복지부·교육부·고용노동부 등으로 이관하면 ‘기능의 공백’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여가부의 기능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대상에 대한 정책이 여러 부처에 흩어져 있어 정책 수요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되는 사항을 개선해 실효성 있게 기능하도록 부처를 재구성하는 데 주안점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업무 이관이 지원 축소를 부를 것으로 우려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을 지낸 차인순 국회의정연수원 겸임교수는 “청소년 정책, 가족 다양성 문제 등은 거대부처에서는 ‘곁다리 업무’로 홀대받던 이슈였다. 이를 주요 업무로 삼는 여가부로 이관하고 난 뒤에야 국회에서 논의가 시작됐고, 정책과 법이 정비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차 교수는 ‘가정·노인·여성·청소년부’라는 이름으로 대상별 지원을 포괄하는 부처를 둔 ‘독일 모델’이 여가부 개편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짚었다. 차 교수는 “여가부가 지난 20년 동안 대상 중심의 정책을 수행하면서 쌓아온 정책적 노하우가 있다. 인권과 다양성의 관점에서 대상 정책을 수행하는 감수성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복지부 등에 산재한 아동·청소년 정책 등 ‘대상 중심 사업’들을 여가부로 모아서 부처 규모를 키우는 게 여가부 개편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5일 서울 보신각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37회 한국여성대회. 한국여성단체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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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부처 형태의 현재 여가부를 폐지하고 대통령 직속 위원회 등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지난해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 당시 유승민 전 의원은 여가부를 폐지하고 대통령 직속 양성평등위원회를 신설하겠다고 공약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독립된 집행부서인 여가부를 위원회가 대체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정부의 성평등 추진체계 개편 방안을 연구해온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위원회로 존재하던 여성특별위원회의 한계 때문에 2001년 여성부가 신설됐던 ‘역사적 교훈’을 강조했다. 박 연구위원은 “법안제출권이나 국무회의 참여권, 예산편성권이 없는 위원회는 성평등과 관련된 사업을 실질적으로 해나갈 수 없다. 콘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집행부서가 있어야 성평등 이슈에 관한 부처 간의 조정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차인순 교수도 “주무부처가 독자적으로 법률을 발의할 수 있고, 예산을 편성해 사업을 진행할 수 있고, 성평등 이슈가 불거졌을 때 국무회의에 참석해 다른 부처 장관을 설득할 수 있어야 국가 전반의 성평등 추진체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며 “이러한 기능을 위원회로 대체할 수 있다는 건 비현실적”이라고 짚었다.
‘독립부처’ 형태의 성평등 주무부처를 위원회 형태로 대체하는 방식은 세계적인 추세와도 맞지 않는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국내외 성평등 정책 추진체계 현황과 시사점’ 보고서를 보면, 2020년 기준 194개 나라에 성평등 정책 전담기구가 설립되어 있는데 독립부처 형태가 160개 나라로 가장 많고, 위원회 형은 17개, 하부조직 형은 13개 나라에 불과하다.
“성평등 가치 실현 위한 기능 재편 논의 선행해야”
여가부를 둘러싼 논쟁의 장이 ‘폐지 혹은 존속’ 프레임에 갇히는 걸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둘러싼 대결로 여론지형이 정치화하면서 정부 차원의 성평등 추진체계에 대한 발전적 논의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김은희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연구위원은 “현재 여가부가 성평등 주무부처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여성계도 동의했던 바이다. 하지만 세부 내용 없이 ‘폐지하라’는 식의 주장이 내걸리면서 발전적 개편 논의조차 사라진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김 연구위원은 “성평등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어떤 기능이 어떻게 재편되어야 하는지 논의하는 것이 순서에 맞지, 이렇게 단순히 ‘없앤다’고 전제한 뒤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