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성미래센터에서 열린 '성평등 정책 강화를 요구한다' 여성·시민 긴급 기자회견에서 선언 연서명에 참여한 8709명이 남긴 말과 명단이 붙어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지켜서는 안 되는 공약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내놓은 성평등 공약 가운데는 전문가들로부터 이와 같은 평가를 받는 것이 적지 않다. ‘여성가족부 폐지’와 ‘무고죄 처벌 강화’ 공약이 대표적이다. 전문가와 야당은 물론 국민의힘 안에서도 재검토 요구가 나온다. 공약의 당위성을 설득하기 어렵고,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당선자의 실행 의지도 큰 만큼, 향후 정국의 갈등 수위를 가름할 사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성별 근로 공시제’처럼 비교적 전향적이라고 평가받는 공약은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석열 당선자는 여가부를 폐지하고 아동·가족·인구감소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룰 부처를 신설하겠다는 입장이다. 여가부 사업 중 상당 부분이 다른 부처와 ‘중복’된다는 게 그 이유다. 현 정부에서 아동정책은 여가부(가족지원과)·보건복지부(아동복지정책과)·교육부(교육복지정책과)가, 가족정책은 여가부(가족정책과)·복지부(보육정책과)가, 인구정책은 여가부(가족정책과)·복지부(인구정책총괄과)가 맡고 있다. 효율성을 위해 새 부처를 신설해 아동·가족·인구감소 문제를 맡기겠다는 구상이다.
정책 효율화를 위한 조직 개편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여가부 폐지가 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지 △중복되는 정책 외에 여가부가 주도적으로 해오던 다른 업무는 어떻게 할지에 대한 설명과 대안의 부재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부)는 “여가부가 아닌 다른 부처에서 이 업무들을 맡았을 때 더 효율적일 거란 근거가 없다. 면밀한 분석·평가 뒤에 이뤄져야 하는데, 지금은 최소한의 절차조차 없이 ‘우선 해체’만 외치고 있다”고 말했다.
아동·가족·인구감소 문제 대처 논의에서 여가부가 견지해온 관점과 경험을 배제하는 전개 방식도 비판받는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한겨레>에 “인구감소 문제는 젠더 관점 없이 해결하기 어렵다. 여성이 겪는 경력단절, 노동시장에서 성차별, 미비한 복지 체계 등을 종합해 바라보고 개선할 여성 담당 부처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지난해 0.81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1명을 밑돌고 있다.
중복 업무 외 여가부가 주도하던 기능을 어느 부처가 대신할지 등 대안 마련도 과제다. 대표적인 게 ‘성 주류화’ 제도다. 성 주류화란 국가의 모든 정책 집행 과정에서 성평등을 고려하는 걸 뜻한다.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성평등 업무를 총괄하는 컨트롤타워는 반드시 필요하다. 여가부가 있었기에 성평등 정책이 지금 수준 정도로나마 자리 잡을 수 있었다”고 했다. 세계 194개 나라(2020년 기준)는 정부 차원의 성평등 정책 전담 기구를 두고 있다. 이 가운데 160개 나라는 성평등 기구를 독립부처(부·청) 형태로 운영한다.(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22년 2월 ‘국내외 성평등 추진 체계 현황과 시사점’)
결과는 알 수 없다. 173석을 가진 민주당은 대선 뒤 윤 당선자의 여가부 폐지 방침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340쪽에 이르는 ‘제20대 대통령선거 국민의힘 정책공약집’에는 “엄벌”이란 단어가 딱 한 차례 등장한다. 무고죄 처벌 강화를 약속하는 부분이다.
윤 당선자는 선거 기간 수차례 무고죄 처벌 강화를 주장했다. 지난해 10월21일 청년 공약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사법 질서를 훼손하는 무고죄 처벌을 강화하기 위해 강력범죄 무고의 경우 선고형을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조정하고,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무고’ 조항을 신설해 거짓말 범죄를 근절하겠다”고 했다. 대선 하루 전날이자 ‘여성의 날’이었던 3월8일 에스엔에스(SNS)에 자신이 그동안 올렸던 여성 관련 단문 공약을 재게재하며 거듭 ‘무고죄 처벌 강화’를 강조했다.
현행 형법은 무고죄를 10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한다. 윤 당선자는 이를 개정해 강력범죄(살인·강도·강간 등)에 대한 무고 형량은 3년 이상 유기징역으로 상향하는 동시에 성폭력처벌법에 무고죄 조항도 따로 신설하겠다는 구상이다. 이중의 강화 장치다.
전문가들은 처벌 강화의 당위성이 없는 것은 물론, 역효과가 클 것이라고 우려한다. 박수진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기존 법체계에 처벌 공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폭력범죄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한 특별법(성폭력처벌법)에 무고죄 조항을 넣는 것은 법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며 “공약이 현실화하면 수사기관도 무고죄 여부를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성범죄는 진술 외 추가 증거를 확보하기 쉽지 않다. 이런 조건에서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해야 하는 피해자에게 무고죄 처벌 강화는 신고 자체를 포기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미투 운동’을 거치면서 수사·재판 과정에 겨우 자리 잡기 시작한 ‘피해자 중심주의’를 무너뜨린다는 측면에서 ‘퇴행’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성범죄 관련 무고 조항 신설은 ‘꽃뱀론’ 같은 그릇된 신념을 법률로 만들어 쐐기를 박겠다는 의미”라고 했다.
‘2022 페미니스트 주권자행동’ 회원들이 11일 오전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대통령 당선자에게 차별과 혐오의 정치를 끊어낼 것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문재인 정부는 임기 동안 피해자를 위축시키기 위한 가해자의 무고죄 역고소 남발에 수사기관이 분별력 있게 대응할 것을 주문해왔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선거 더불어민주당 정책공약집’을 보면, ‘성폭력 무고 수사지침 및 절차 마련’ 공약이 있다. 이후 2018년 5월 대검찰청은 가해자 쪽의 무고죄 역고소 남발로 성폭력 피해 신고가 위축되고, 원치 않는 합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을 수용했다. 대검 성폭력 수사 매뉴얼에는 사건 수사 종료 전까지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무고, 사실 적시 명예훼손의 고소 사건 수사를 중단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한국의 무고죄 처벌 형량이 낮다거나, 성범죄 무고 사범이 급증하고 있다고 볼 만한 근거도 없다. 독일·프랑스, 미국의 형량은 5년 이하의 구금 혹은 자유형으로, 우리나라보다 가볍다. 성폭력 가해자에 의해 무고로 고소당한 사람 가운데 유죄 판결을 받은 비율은 6.4%에 불과하다. 대검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7~18년 성폭력 피해자가 무고죄 피의자인 사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다.
송란희 상임대표는 “윤 당선자 공약의 가장 큰 문제는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과 신고율을 높이기 위한 정책이 빠져 있다는 것”이라며 “당선자가 말하는 개별 피해자에 대한 구제책만으로는 범죄피해자 보호도, 일상 회복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채용에서 퇴직까지 ‘성별 근로공시제’…대신 자발적으로
윤 당선자는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양성평등 관련 정책을 공약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성별 근로공시제’다. 입직부터 퇴직까지 단계별로 성별 데이터를 수집해 공개하겠다는 게 골자다. 500인 이상 기업부터 △채용 시점에는 지원자, 최종 합격자 성비(경력직 포함) △부서별 근로자, 승진자, 육아휴직자 성비 △해고자, 정년퇴직자, 조기 은퇴자 성비 등 데이터를 “자발적으로” 공개하도록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실행만 된다면 문재인 정부가 추진했던 ‘성평등 임금공시제’보다 한발 더 나아가게 된다. 정부는 2018년 양성평등기본법을 개정해, 여가부가 공공기관과 일부 민간기업의 성별 임금 현황과 임원 수 등을 조사하고 결과를 공표할 수 있는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9월 여가부는 처음으로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과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사이트에 사업보고서를 제출한 2149개 기업을 대상으로 성별 임금 격차를 조사해 발표했다.
윤 당선자의 진일보된 공약에 다만 전문가들은 실현 가능성을 우려한다. 내부 인사 자료 공개를 꺼리는 기업들을 어떻게 돌파할지에 대한 최소한의 방안조차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 현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는 채용 성차별 문제 해결을 위해 공공기관의 지원자·면접자·합격자 성비 ‘공개’를 추진하려 했지만, 기업 반발로 ‘기록’에 그쳤던 선례가 있다. 당시 일자리위원회 위원이었던 임윤옥 한국여성노동자회 자문위원은 “공공기관도 반발하는데, 민간기업을 참여시키려면 (자발성이 아닌) 좀 더 구체적 실행 방안이 필히 제시되어야 한다”며 “오히려 기업이 채용 과정에서 성차별을 행해도 500만원 이하 벌금에 불과한 남녀고용평등법을 개정하고,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는 게 실효성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윤아
ah@hani.co.kr 박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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