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범죄수사규칙은 고소인이 미성년자인 경우 부모 등에게 통지한다고 정하고 있다. 이때문에 성범죄 고소를 주저하거나 단념하는 미성년자 피해자들이 있다.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 “신고 접수되면 부모님에게 사건 관련해 통지가 갑니다.” 지난해 강간 가해자를 고소하려 경찰서를 찾은 17살 여성 ㄱ씨는 이 말을 듣고 신고를 포기했다. 가해자를 처벌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아는 건 원치 않았다. 대신 ㄴ상담소에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다. 상담원은 ㄱ씨와 경찰서에 동행해 “일단 증거채취가 시급하니 신고를 접수하되, 보호자 고지는 최대한 미뤄달라”고 요청했다. 겨우 방문한 해바라기센터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센터에서는 증거채취를 하려면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상담원이 법정 보호자란에 대신 서명했다. 이후 진술을 위해 찾은 경찰서에서 ㄱ씨는 또다시 ‘보호자에게 통지한다’는 말을 들었고, 결국 아예 신고를 포기해 버렸다.
권현정 탁틴내일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 실제 사건을 각색한 내용이다. 성범죄를 당했으나 부모가 아는 것이 두려워 신고를 포기하는 아동·청소년 피해자가 적지 않다. 혼이 나거나 없던 일이 될까 가장 가까운 부모에게도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한 이들에게 “부모에게 통지된다”는 경찰의 안내는 신고를 단념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22일 제16회 ‘아동 성폭력 추방의 날’을 맞아 ‘피해신고 시 법정대리인 통지 및 증거채취 과정에서의 법정대리인 동의 문제’를 주제로 토론회가 열린 까닭이다. 이날 강선우·임호선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탁틴내일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피해자 지원단체와 변호사, 경찰청·여성가족부 실무자 등이 모여 미성년 피해자의 신고를 좌절시키는 ‘부모 통지’ 규칙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경찰이 미성년 피해자에게 “부모님에게 통지 간다”고 안내하는 배경에는 경찰 범죄수사규칙 제13조가 있다. 해당 조항은 ‘경찰은 고소인이 미성년자인 경우 법정대리인·직계친족 등 가족에게 통지해야 한다.(1항) 다만 가해자(피의자)가 법정대리인 등인 경우에는 통지하지 않는다(2항)’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수사규칙이 상위법인 헌법, 형사소송법,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 처벌법)의 취지를 거스른다는 지적이 있다. 이날 발제를 맡은 조윤희(법률사무소 이채) 변호사는 “미성년 피해자의 보호자에게 피해 사실을 알려야 할 필요성이 원칙적으로 부정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전제하면서도 “미성년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피해 사실을 법적 대리인에게 즉각적으로 고지하는 경우 이는 헌법상 자기결정권, 형사소송법상 고소권 등의 침해를 야기할 우려가 있다”고 했다. 조 변호사는 부모가 자녀 의사를 반영하지 않고 가해자와 한 합의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은 판례(서울고등법원 선고 2011노491) 등을 소개하며 법은 미성년자의 고소권, 합의 능력 등을 인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수사기관은 수사 등의 절차에서 피해자의 인격이나, 명예, 사적인 비밀이 침해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성폭력처벌법)는 규정을 들어, 해당 규칙은 피해자 보호에도 역행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조 변호사는 피해자가 13살 미만인 경우 법정대리인에게 피해 사실을 통지하되, 13살 이상 19살 미만인 경우 당사자의 동의를 받아 통지하는 방법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의사결정 능력이 제한적인 13살 미만은 기존대로 하되, 13살 이상은 해당 규칙을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선미화 경찰청 성범죄수사과 계장도 비슷한 대안을 제시했다. 선 계장은 “친권 남용이 예상되는 등 수사기관의 통지가 미성년 피해자의 복리에 부적합하다고 볼 사정이 있으면 생략토록 하는 등 폭넓은 예외를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고 했다.
이와 유사한 문제는 해바라기센터에서도 반복된다. 강간 피해를 입은 피해자는 72시간 내에 해바라기센터에서 응급키트로 증거채취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이 ‘채취’를 의료행위로 보아 센터에서도 ‘부모 동의’를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실제 탁틴내일이 전국 39개 해바라기센터에 직접 문의했더니 ‘보호자 동의가 있어야만 증거채취를 진행한다’고 안내하는 곳이 24곳에 달했다. 권 소장은 “의료법에도 응급상황에서는 보호자 동의 없이 의료행위가 가능하다는 조항이 있다. 성폭력 피해자 증거채취도 시급하게 이뤄져야 하는 의료행위로 간주해 법정 대리인 동의 없이도 가능하도록 하는 조항을 추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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