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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n번방 범죄를 ‘고3 스트레스’ 고려 감형?…문제적 젠더폭력 판결들

등록 2021-12-31 04:59수정 2021-12-31 13:27

‘성인지 감수성 논란’ 판결 5건…피해자지원단체들과 함께 선정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에 ‘모자이크 처리’ 들어 무죄 판결도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가해자가) 고3 수험생이라”

“성착취물에 얼굴이 나오지 않아서”

“친딸 성폭행한 아버지가 4억원을 지급하는 등 진지하게 노력해서…”

올해에도 사법부는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지는 판결을 내놓아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 헌법재판소가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이유로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의 영상녹화진술 증거 인정을 무력화하는가 하면, 엔(N)번방 사건 등 디지털 성범죄 사건 판결에서는 ‘나이가 어려서’, ‘성착취물에 피해자의 얼굴을 가려서’ 등의 사유로 감형하거나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한겨레> 젠더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십대여성인권센터,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공폐단단’ 소속 활동가 단단(활동명)과 함께 올해 나온 젠더폭력 판결 가운데 잊지 말아야 할 분노의 판결 다섯 가지를 꼽았다.

헌재,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 영상녹화진술 위헌

헌법재판소는 이달 23일 현행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성폭력 처벌법) 제30조 6항 일부를 위헌이라 결정했다. 그동안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 수사·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 노출되는 일을 막기 위해 진술을 녹화하고, 이를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하는 일이 허용돼 왔다. 헌재는 이 조항이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한다며 위헌이라고 봤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이 결정을 ‘2021년 분노의 판결’로 꼽았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피고인 이익 우선’이라는 형사소송법 원칙만 되뇐 결정”이라며 “그동안 일궈온 피해자 보호 및 피해자 권리보장장치를 무너뜨리고, 시계를 20년 전으로 되돌렸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이번 위헌 결정이 앞으로 젠더폭력 수사·재판 전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고통을 안겨줄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우려했다. 그는 “이제는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도 직접 법정에 나가 피해 진술을 해야만 (피고인의) 처벌 가능성이 확보된다. 과거에 이미 유죄 판결을 받았던 성폭력 가해자들도 영상녹화진술의 증거 능력을 문제 삼으며 재심 신청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고 했다. ‘문제적 판결’의 여파는 내년에 한층 더 거세게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56년 만의 미투’ 성폭력 정당방위 인정 위한 재심청구 기각 결정

“사법부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뒤바뀐 제 사건을 이제라도 바로잡을 수 있도록 재심을 허가해주세요.”

지난달 25일 대법원 앞에서 1인시위에 나선 ‘56년 만의 미투’ 당사자인 최말자(75)씨의 외침이다. 최씨는 1964년 5월 자신을 성폭행하려는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저항하다 이듬해 중상해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56년 만인 지난해 5월 그는 자신의 행동이 정당방위였음을 주장하며 사법부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부산지방법원, 부산고등법원은 올해 2월, 9월 연이어 기각 결정을 내렸다.

한국여성의전화는 부산지방·고등법원이 연달아 내린 기각 결정을 ‘2021년 분노의 판결’로 꼽았다. 한국여성의전화 김다슬 정책팀장은 “재판부는 본 사건이 당시 시대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판결이었다는 취지로 재심청구를 기각했다. 그러면서도 판결문 말미에 ‘청구인의 용기와 외침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고 했다. 김 팀장은 “‘판결은 바꿀 수 없지만 용기는 높이 산다’는 재판부의 메시지는 법원의 역할과 책무를 망각한 언사”라면서 “이제라도 사법부는 56년 전 잘못을 바로잡아, 피해자가 본사건의 정당방위 여부를 공정하게 조사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최씨는 현재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앞두고 있다.

엔번방 영상 공유했는데 “고3 수험생일 때 저지른 일”이라며 감형

올해는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등 엔번방 사건 주범들에게 중형이 선고된 해이기도 하다. 이들의 범행은 성착취물을 관전하고 구매하려는 다수의 수요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범죄였다. ‘주범’이 아닌 이들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죗값을 물어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성착취물을 공유한 피고인이 “고3 수험생”이라는 이유로 집행유예가 선고되기도 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는 이 판결을 ‘2021 분노의 판결’로 꼽았다.

서울서부지법 형사항소1-3부는 지난 2월18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아무개(20)씨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이씨는 2019년 12월 텔레그램에 엔번방 자료공유방을 만들어 10여개의 아동·청소년 성착취물과 링크를 공유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부는 “이씨가 범행 당시 고3 수험생이었고 대학 진학을 위해 노력하다가 수시 전형에 실패하자 불안감과 중압감으로 범행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에 한해 피고인에게 건전한 사회 일원으로 성장할 기회를 주는 것이 타당하다”며 감형 사유를 밝혔다. 앞서 1심에서는 실형이 선고됐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김여진 피해지원국장은 “이 판결은 재판부가 피고인의 나이, 환경, 범행동기, 사회적 유대관계 등 다양한 사유를 들어 피고인의 입장에 이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김 국장은 “수험생의 스트레스가 성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사유로 인정됐는데, 재판부는 과연 성범죄를 막으려는 의지가 있는 건지 의문이다. 이렇게 가해자의 서사가 감형 요소로 인정받으면 피해자가 설 자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범행과 관련 없는 요소가 재판에서 고려되지 않도록 양형 기준안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친딸 성폭행한 아버지가 4억원 지급했다고 3년 감형

“피고인이 피해자 측에 4억원을 추가로 지급하는 등 진지한 노력을 한 점을 고려했다.”

지난 9월30일 서울고법 형사10부는 초등학생 친딸을 3년간 상습 성폭행한 혐의(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로 재판에 넘겨진 40대 남성 ㄱ씨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징역 13년을 선고했던 1심보다 3년 형량을 낮춰준 것이다. 피해자와 피해자 어머니가 엄한 처벌을 요구했으나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4억원을 지급하는 등 피해 회복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 점을 들어 감형했다.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공폐단단’ 소속 활동가 단단(활동명)은 이 판결을 ‘2021 분노의 판결’로 꼽았다. 그는 “그동안 이뤄진 친족성폭력 판결 대다수가 문제적이고, 이 가운데 하나를 고른다는 것이 피해자의 고통을 존중하지 못하는 행위로 느껴진다”고 전제하면서도 해당 판결은 ‘가족’에 대한 재판부의 편향된 시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친족성폭력은 돈과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가장 평등하지 못한 관계인 가족 안에서 발생하는 범죄”라며 “돈과 권력을 독점한 가장이 이를 자신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음에도 재판부가 이를 인정한 건 친족성폭력에 대한 ‘몰이해’로밖에 설명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친족성폭력 피해자는 가해자와 싸우기 전에 먼저 재판부의 ‘편견’과 싸워야 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판결”이라고 덧붙였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수십 개 만들었는데…얼굴 가린 건 ‘무죄’?

십대여성인권센터는 트위터에서 ‘노예 놀이’ ‘조교 놀이’라며 아동·청소년에게 접근해 성착취물 제작을 유인·강요해 동영상 60개를 제작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ㄱ씨에 대한 항소심 판결을 분노의 판결로 꼽았다.

서울고등법원 11-3형사부는 지난 10월22일 피고인이 제작·전시·소지한 60개의 동영상 가운데 4개만 아동·청소년 성착취물로 인정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앞서 1심에선 60개 모두 아동·청소년 성착취물로 인정해 징역 8년이 선고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4개를 제외한 나머지 동영상은 뒷모습만 나오거나 (모자이크 처리 등으로) 얼굴이 나오지 않아 등장인물의 외모와 신체 발육 상태를 가늠하기 곤란하다”는 등의 이유로 54개의 성착취물 제작은 무죄로 봤다.

십대여성인권센터 조진경 대표는 “이 판결은 앞으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제작하는 가해자가 얼굴만 가리고, 뒷모습 위주로 촬영하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을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박고은 최윤아 기자 eu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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