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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아동 성폭력피해자, 가해자 앞에 세워두고 추궁하라는 법인가

등록 2021-12-24 15:59수정 2021-12-24 22:09

24일 여성단체들 헌재 반박 기자회견
“미성년 피해자, 피고 쪽 폭력적 반대신문에 무방비 노출될 것”
‘피해진술영상’ 증거 불인정에 “사회적 합의 역행”
“제시한 대안도 아동의 법정 2차 피해 못 막아”
24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정문 앞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여성의전화·탁틴내일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등 17개 여성단체 소속 활동가들이 모여 전날 나온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규탄하고 있다.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24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정문 앞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여성의전화·탁틴내일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등 17개 여성단체 소속 활동가들이 모여 전날 나온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규탄하고 있다.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성탄 전날인 24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정문 앞. 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여성의전화·탁틴내일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등 17개 여성단체 소속 활동가 10여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전날인 23일 나온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헌재는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의 영상녹화진술을 증거로 인정하는 현행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성폭력 처벌법) 제30조 6항이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 수사·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 노출되는 일을 막기 위해 진술을 녹화하고, 이를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하는 일이 성폭력 처벌법에 따라 허용돼 왔다. 그러나 이번 위헌 결정으로 앞으로는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도 직접 법정에 나가 피해 진술을 하고 피고 쪽 반대신문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날 기자회견에 나선 단체들은 이번 결정이 그동안의 사회적 합의를 역행한 퇴행적 판단이라고 꼬집었다. 이들 단체는 기자회견문을 통해 “그동안 반성폭력 운동을 통해 피고인 방어권 보장뿐 아니라 피해자 보호 및 권리 보장도 중요한 인권이자 국가의 역할임을 강조해온 시대적 변화를 역행했다”며 “이제 미성년 피해자들은 성폭력 사건과 무관한 과거 이력에 대한 질문, 피해에 대한 의심,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피고인 측의 반대신문에 고스란히 노출될 상황에 처하게 됐다”고 강하게 성토했다.

헌재가 다수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제시한 주요 근거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반박했다. 앞서 헌재는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이 배제된 미성년 피해자의 영상녹화진술을 증거로 인정하면 ①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위협할 수 있고 ②피고인 반대신문권을 존중하면서도 미성년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조화적인 대안이 존재”한다고 판단한 바 있다.

이들 단체는 “성폭력 사건에서의 실체적 진실은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한다고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수사·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가 우려돼 신고를 하지 않거나, 재판 과정에서 트라우마를 복기하느라 소진돼 고소를 지속하지 못하는 상황이 충분히 빚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 회견에서 발언자로 나선 정희진 탁틴내일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팀장은 “가해자 변호사는 피고인의 무죄를 입증하거나 형량을 줄이기 위해 사건과 무관한 아동·청소년의 품행 문제를 부각시킨다. 이는 성인(피해자)들도 견디기 쉽지 않은 일”이라며 “이번 헌재 결정대로라면, 이제 아동도 가해자 측 변호사의 이런 반대신문을 받게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떤 양육자(보호자)가 아동이 이런 것들을 감내한다는 것을 알면서 선뜻 신고를 할 수 있을지 답답할 따름”이라고 했다.

헌재가 제시한 “조화적인 대안”도 피해자를 보호하기에 한계가 명확하다고 지적했다. 헌재는 △증거보전 절차 △비디오 중계 장치를 통한 신문 등을 이 대안으로 내세웠다. 이에 대해 신수경 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는 “진술을 재판정에서 실시하여 증거능력을 인정하겠다는 증거보전제도의 경우, 피고인의 반대신문이 여전히 가능하기에 2차 피해 방지에는 전혀 역할을 하지 못한다. 또 현재 화상을 통한 증인신문 역시 실무적 구현이 되어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신 변호사는 이어 “헌재가 제시한 조화로운 방안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과연 헌재는 현재의 아동 성폭력 수사·재판 실무에 대한 이해가 있는지, 2차 피해가 아동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고민은 했는지 감히 묻고 싶다”고 했다.

신 변호사는 또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결의’를 인용해 헌재 결정의 부당함을 성토했다. ‘범죄 피해아동 및 목격아동이 관련된 사건에 있어서의 사법 지침’은 “법 체계 및 피고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과 양립될 수 있다면, 아동 피해자와 증인이 가해자(로 주장된 자)의 반대신문을 받지 않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필요에 따라, 아동 피해자와 증인은 법정에서 가해자의 시야를 벗어나서 진술하고, 가해자와 분리된 대기실 및 비공개 인터뷰 공간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동을 상대로 한 반대신문을 가급적 금할 것을 권장하는 지침이다. 영미권에서는 강간피해자 보호법률(rape shield law)을 통해 성범죄 재판에서 피고인 측이 피해자의 행실(sexual history) 등을 거론하며 공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외국처럼 피해자에 대한 인신공격성, 모독성 질문을 어떻게 막을지에 대한 현실적인 고려 없이 피고인의 반대신문권만을 중요하다고 본 이번 결정은 사실상 법정에서 발생하는 2차 피해를 방치하겠다는 의미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박고은 최윤아 기자 eu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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