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카’를 ‘불법촬영’이라 부른다. ‘음란물’을 ‘성착취물’이라 한다. <한겨레>가 2019년 11월 텔레그램에서 이뤄진 디지털 성착취 실태를 전한 뒤 목격한 변화들이다. 시민의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부터 관련 정책 수립과 법의 제·개정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폭도 넓었다. 하지만 성범죄의 실질적 감소와 피해 회복이라는 그림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신고·수사·재판 그리고 피해자 지원 등에 이르기까지 해결되지 않은 과제들이 적잖은 탓이다. 그 단계별 어떤 피해자의 고통도 소소할 수 없다. 하지만 관심은 천차만별이다. 덜 주목받았던 피해의 틈을 세세히, 계속해서 조명하려는 까닭이다.
“학교 다닐 때 배웠던 해바라기센터와는 너무 달랐어요.”
10대 여성 ㄱ씨는 지난 15일 밤 늦게 서울의 한 해바라기센터(센터)를 찾았다. 성폭행 사건 발생 직후 였다. 경찰과 동행한 ㄱ씨가 센터 야간 당직자에게 처음 들은 말은 ‘전화 안 하고 오셨네요? 그러면 안 되는데….’였다고 했다. 해바라기센터는 방문 전 예약이 필수가 아니다. 당직자는 ㄱ씨의 체온을 두 차례 측정했다. 37.4도, 37.5도가 나왔다. 한시라도 빨리 증거채취를 해야한다는 조급함에 ㄱ씨는 한번만 더 체온을 재달라고 울며 애원했다. 그러나 센터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ㄱ씨는 결국 자비로 병원에서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사후 피임약을 처방 받아 집으로 왔다. 영수증에는 46만원이 찍혀 있었다. ㄱ씨는 “빨리 증거채취를 하지 않으면 범행 흔적이 사라질까봐 공황상태였고, 자해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며 “중이염을 앓아 귀에 열감이 있을 수 있어 딱 한 차례만 더 측정해달라고 사정했으나 끝내 거부됐고, 이튿날 오전 코로나19 검사결과가 음성으로 나온 이후에야 해바라기센터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방역 지침 준수는 해바라기센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ㄱ씨도 안다. 다만 참담했던 건, 이 모든 과정에서 누구에게도 ‘괜찮냐’는 위로의 말 한 마디를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ㄱ씨는 “학교 성교육 시간마다 성폭력을 당하면 바로 해바라기센터로 가라고 들었다. 그러나 직접 가본 해바라기센터는 오히려 내게 상처를 줬다. 범행이 있은 지 4시간밖에 안 된 저의 마음을 걱정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가 원칙만을 내세웠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해당 해바라기센터는 “37.5도가 한번이라도 나오면 입장 불가가 원칙이어서 추가 체온측정을 하지 않았다. 피해자분께 충분한 위로를 드리지 못한 점은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다.
해바라기센터는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유일한 기댈 곳이다. 365일, 24시간 상담 인력·경찰·의료진이 상주하면서 성폭력·가정폭력·성매매·아동학대 피해자에게 수사·의료·상담·법률 지원을 한다. 2003년 한 초등학생이 길가던 50대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20시간 동안 경찰·병원·상담소를 오가며 반복해 피해를 진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원스톱 피해자 지원기관’ 필요성이 나왔고, 이듬해인 2004년 처음 생겼다. 17년 동안 전국 39개소로 늘었고, 인지도도 높아졌다.
그러나 최근 일부 해바라기센터의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에 빈틈이 생기고 있다는 지적이 피해자와 지원 활동가는 물론 센터 종사자 사이에서도 나오고 있다. 지원을 받기 위해 ‘대기’해야 하는 경우가 이전보다 더 자주 발생하고, 현장에서 체감하는 이용 문턱도 높아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피해자가 긴급하게 요청하는 다양한 지원을 발빠르게 제공하는 것이 해바라기센터의 존재 이유이자 역할인데, 긴급성·접근성 면에서 균열이 포착되고 있는 것이다.
해바라기센터 종사자 ㄴ씨는 수사지원을 받기위해 대기하는 피해자가 최근 부쩍 늘었다고 했다. 성폭력·가정폭력·성매매 뿐 아니라 일반 아동학대 피해자까지 지원하게 되면서 방문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ㄴ씨는 “대략 세어보니 성폭력 피해자가 당일 진술녹화 등 수사지원을 받는 경우는 열건 중 한 건도 채 안 된다”며 “아동학대 피해자의 경우도 3일 이내 조사 받으면 이례적으로 빠른 편이고, 길게는 한 달까지 걸리기도 한다”고 했다. 신진희 성범죄 피해자 전담 국선 변호사도 “아동학대 피해자가 예년보다 폭증하면 대기 시간이 길어진 건 사실”이라고 했다. 실제로 경찰이 발표한 ‘2020년 경찰 통계연보’를 보면, 아동학대 피해로 센터를 방문한 인원은 2018년 1953명에서 2020년 2651명으로 35.7% 증가했다.
수사지원이 늦어지면 피해자에게도 불리하다. 전직 해바라기센터 종사자 ㄷ씨는 “트라우마성 경험을 한 분들은 늦어도 5일 이내에 진술 조사를 받는 것이 좋다”고 했다. 특히 아동이나 지적 장애인에게 ‘신속성’은 더 중요하다. 가정에서 아동학대가 발생하면 피해 아동은 부모와 분리되어 보호시설로 가게 된다. 대기가 길어지면 보호시설 생활에 어려움을 겪은 피해 아동이 집에 가고 싶어 진술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지적 장애인 피해자는 상담가나 의료진으로부터 들었던 어휘를 진술 과정에서 사용해 진술 신뢰도를 의심받는 일도 발생한다. 신 변호사는 “수년 전 발생한 사건 등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진술 조사나 녹화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했다.
해바라기센터는 성폭력·가정폭력·성매매 피해자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사건화’여부는 이용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112신고하거나, 형사 고소하지 않더라도 증거채취와 수사지원이 가능하다”고 재차 확인했다.
그러나 일부 현장에서는 다른 원칙이 적용되고 있었다. 한 성폭력 피해자 지원 활동가는 “청소년들은 보호자에게 (피해사실이) 알려질까 신고를 주저하기도 하는데, 일부 센터가 ‘먼저 경찰에 사건을 신고하고 와야 증거채취를 해줄 수 있다’는 방침을 내세웠던 사례도 있었다”며 “신고를 망설이는 상태에서 ‘신고부터 하고 와야 지원한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절차의 복잡성에 주눅이 들어 신고 의사가 외려 꺾일까 우려된다”고 했다.
해바라기센터 운영의 원칙이라고 볼 수 있는 피해자 중심주의에 균열이 생기는 건 필요한 지원은 많아지는데, 적절한 자원이 제때 공급되지 않아서다. 요구되는 역할은 늘어나는데 그만큼 물적·인적 자원이 뒷받침 되지 못하고 있다. 해바라기센터는 성폭력을 포함해 아동학대 피해자와 스토킹 범죄 피해자까지 지원하는 등 지원 영역은 점차 넓어지고 있다. 그러나 올해 2월 서울북부해바라기센터가 문을 닫았고 서울중부해바라기센터는 이달 운영종료를 앞두고 있다. 서울 내에서도 청소년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은 노원구·도봉구·강북구·성북구에 아동학대 피해 지원 공백이 발생하는 만큼 다른 센터의 업무 부담 가중은 필연적이다. 서울시 청소년인구 통계를 보면, 노원구·도봉구·강북구·성북구 청소년 인구(0~18살)는 21만6952명으로 중구·종로구·금천구·용산구 청소년 인구 8만2075명보다 2.6배가량 많다. 여가부 관계자는 “‘대기’ 문제는 일부 해바라기센터에서 발생하는 문제이고, 올 하반기 신고여부와 관계없이 증거채취 가능하다는 점을 센터에 안내했다”며 “현장 의견을 수렴해 지원이 개선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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