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부사관 이아무개 중사가 안치된 성남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영안실에 티셔츠와 과자 등이 놓여 있다. 김윤주 기자
흰색 티셔츠, 반려묘 사진, 과자….
선임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여성 부사관 이아무개 중사의 영정 사진 앞에 주인 없는 물건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유족들이 고인을 떠올리며 놓아둔 물건들이다. 흰색 티셔츠는 이 중사의 남편이 이 중사와 신혼 생활을 하며 함께 입으려고 사둔 ‘커플 티셔츠’를 영정사진 옆에 놓아둔 것이라고 한다. 이 중사는 지난달 22일 숨진 채 발견되기 전날 혼인신고를 했다. 고인의 가족이 기르는 흰색 고양이 두 마리의 사진과 고인이 평소 좋아하던 과자 등도 놓여 있었고, 과자에는 ‘○○아 사랑해. 맛있게 먹어’라는 글귀가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있기도 했다.
이 중사가 세상을 떠난지 열흘이 훌쩍 넘었지만, 이 중사의 주검은 경기도 성남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영안실에 안치된 상태다. 유족들은 11일째 장례도 미룬 채 이 중사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유족과 변호인들은 공군 제20전투비행단 소속이던 이 중사가 지난 3월 선임인 장아무개 중사에게 “야간 근무를 바꿔서라도 회식에 참석하라”는 강요를 받고 회식에 참석한 뒤 장 중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당시 부대에는 코로나19로 음주와 회식 금지령이 내려져 있었고, 회식은 업무와 관계없는 상사 지인의 개업 축하자리였다. 이 중사는 회식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던 중 차량 뒷자리에서 장 중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앞 자리에서는 후임 부사관이 운전을 하던 중이었다.
이 중사는 피해 사실을 상관에게 신고했지만, 상관은 상부에 보고하는 대신 따로 불러 “없던 일로 해주면 안 되겠냐”며 합의를 종용했다고 한다. 장 중사 역시 자해 협박을 일삼았고, 그의 가족들도 “명예로운 전역을 하게 해달라”며 피해자를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 쪽은 피해자 보호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즉각적인 가해·피해자 분리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건을 덮으려는 부대 상관들의 조직적 회유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 중사는 두달여 간 청원 휴가를 낸 뒤 지난달 18일 공군 제15특수임무비행단으로 근무지를 옮겼고, 나흘만인 같은달 22일 오전 부대 관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유족을 대리하는 김정환 변호사는 “이 중사 어머니의 몸 상태가 입원을 고려할 정도로 좋지 않다”며 “저와 면담을 할 때도 몸을 심하게 떨고, 소리를 지르고 환영을 보시는 등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하고 계시다”라고 유족의 상황을 전했다. 김 변호사는 “군인 등 강제추행 치상죄는 형량이 징역 7년 이상으로 가해자가 실형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고, 이 사건의 주요 목격자와 참고인이 사건을 은폐하거나 무마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불구속 수사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며 “가해자를 구속해 수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민단체 군인권센터도 이날 “피해자가 사망하고 여론이 들끓는 상황에서 가해자가 구속조차 되지 않을 경우 증거인멸 등의 우려가 매우 크다”며 가해자 구속과 2차 가해자 및 지휘관의 엄중 처벌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국방부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군인권센터는 성명을 내어 “3개월 가까운 시간이 지나도록 군은 무엇을 한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며 “상급자는 지휘관에게 보고도 하지 않았고, 피해자 가족의 항의가 있기 전까지 수사가 시작되지 않았다. 가해자는 자해 협박을 일삼고 가해자 가족들도 피해자를 압박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군 수사기관은 가해자가 부대에 버젓이 활보하게 뒀고, 회식을 함께 한 상급자는 가해자 탄원서도 제출했다”며 “부대 분위기가 가해자를 중심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지적했다. 군인권센터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낯선 부대로 쫓겨가듯 떠난 것은 소속부대의 총체적 피해자 보호 실패”라며 “살 수 있는 사람을 죽게 만든 건 군”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이 중사 유족이 올린 “사랑하는 제 딸 공군 중사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주세요”라는 청와대 청원은 1일 오후 5시 기준 동의가 21만명을 넘었다. 유족은 청원에서 “군대 내 성폭력 문제가 끊이지 않은 채 발생되고 있고 제대로 조사되지 않고 피해자가 더 힘들고 괴로워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도 처참하고 참담하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더 이상은 저희 가족과,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되지 않도록 국민 여러분의 관심이 절실히 필요하다. 저희 딸의 억울함을 풀고 장례를 치러 편히 안식할 수 있게 간곡히 호소하니 도와달라”고 밝혔다.
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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