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차 ‘기러기 아빠’ 주영씨는 언젠가부터 눈을 감으면 유학 간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이 들면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입면 환각’은 간절한 그리움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다. 게티이미지뱅크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 의하면 한국의 1인 가구 비율은 2019년 현재 30.2%로 615만가구에 이릅니다. 3가구 중 한가구는 1인 가구일 정도로 혼자 사는 형태가 흔해지고 있으며 매년 그 수는 증가하고 있습니다. 비혼과 이혼, 고령화의 영향이 큰 것이지요. 성별로 보면, 남성 1인 가구 가운데 40~50대의 비중이 36.4%나 됩니다. 그중엔 기혼이면서도 1인 가구인 ‘기러기 아빠’들도 있습니다. 50대 남성인 주영씨도 아이 둘과 아내를 미국으로 보내고 혼자 생활하는 6년차 기러기 아빠입니다.
회사선 구조조정, 가족은 귀국 꺼려
전화조차 뜸해지며 술·불면 늘어
병원서 우울증 치료와 상담 병행
주영씨는 아들과 딸을 모두 중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아들이 중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였고 성적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습니다. 주영씨 생각에는 우리나라 교육에 심각한 문제가 있고 넓은 세상에서 경험을 해보는 것이 아이들의 미래에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딸도 마침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어 그 기회에 자녀 둘을 함께 미국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낯선 곳으로 떠나기 싫다고 했지만 결국 주영씨의 강한 주장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만 가서 현지 홈스테이를 이용해 학교를 다니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혼자 다니기에는 학교 통학도 어려웠고 현지 음식에 적응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결국 얼마 뒤 아내도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할 수 없이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주영씨는 혼자 한국에 남아 매달 두 아이의 유학 비용을 부치게 되었습니다.
주영씨는 그간 대기업에 다니며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지만 자녀들이 유학 간 이후에는 학비를 부치며 최소한의 생활비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아이들과 아내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주영씨에게는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아내는 학비를 보태려고 마트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고 아이들이 잘 적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이들은 미국 대학에 합격했고 주영씨는 아이들의 대학 입학식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문제는 주영씨가 다니던 회사가 갑자기 어려워져 구조조정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주영씨는 결국 퇴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퇴직금을 받기는 했지만 매달 부쳐야 하는 유학 비용이 부담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한국에 돌아와서 함께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두 아이들은 한국에 귀국해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자신의 삶이 아버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에 대해 화를 냈습니다. 아내도 이제야 좀 미국 생활에 적응이 되었다면서 한국으로 귀국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고민 끝에 차라리 자신이 미국으로 건너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언어도 음식도 맞지 않는 곳에서 산다는 것이 용기가 나지 않았고 부모님을 한국에 두고 떠난다는 것도 부담이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꼭 하던 연락이 점점 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궁금해서 가족들에게 연락을 해도 받지 않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주영씨는 허탈감과 배신감에 술을 자주 마시게 되었고 자기 전에도 혼자 술을 마시고 취해 잠드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집 밖에도 거의 나가지 않고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주영씨는 지금까지 일을 열심히 하는 삶에만 익숙했습니다. 일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외국에서 살고 있는 그들이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가족들에게 부친 돈이 얼마인데 자신을 나 몰라라 하는 가족들이 밉게만 느껴졌습니다.
주영씨는 잠을 자다가도 부인과 아이들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깨는 일이 자주 생겼습니다. 잠에서 깨 거실에 나가 보면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룻밤에도 네댓차례는 자다가 깨는 일이 반복되었고 화장실도 자주 들락날락거렸습니다. 의욕도 점점 떨어지면서 끼니도 거르게 되고 3개월 만에 체중이 6㎏가량이나 빠졌습니다. 주영씨는 체중이 급격하게 너무 빠져서 큰 병에 걸린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어 건강검진을 받았으나 건강에 특별한 이상은 없었습니다. 자신의 건강에 대해 상의하려고 아내에게 연락을 해도 ‘나도 걱정된다’는 답만 할 뿐 자꾸 그런 사소한 일로 연락하지 말라는 듯해 눈치가 보였습니다. 주영씨는 온 가족이 같이 행복하게 지냈던 시절이 생각나 눈물이 났습니다.
주영씨는 급격한 체중 감소로 동네 의원을 찾았다가 담당 선생님에게 아무래도 우울증이 온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인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소개받았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은 뒤 주영씨는 우울증으로도 체중이 3개월에 5~10㎏ 정도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울감, 무기력감, 식욕저하 등으로 식사를 자주 걸러왔고, 불안감·초조함으로 몸의 긴장이 증가해 체중이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체중 감소는 지방이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근육의 손실이 주로 되는 것이어서 주영씨는 복부비만이 오히려 더 심해졌습니다.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배는 불룩 나와서 거울에서 본 자신의 모습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주영씨는 잠에 들기 직전이나 깰 때 아내나 아이들의 목소리가 자주 들려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소리가 들리면 ‘환청’으로 생각해서 걱정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환청은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데도 어떤 소리나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현상입니다. 낮에 깨어 있는 상태에서 환청이 자주 들린다면 꼭 정확한 진단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영씨에게 나타난 증상은 ‘입면 환각’으로, 환청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는 잠에 들자마자 꿈을 꾸는 수면으로 진행되어 생기는 증상으로 평소에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아내의 목소리가 간절히 듣고 싶은 마음에 생기는 증상이었습니다. 또한 비뇨의학과 진료를 받은 뒤 밤에 잠을 잘 못 자고 화장실을 자주 들락날락했던 게 전립선 비대증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영씨에게는 밤에 자주 깨는 것 또한 다시 우울증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코로나19로 오랜만에 온 가족 모여
아이들은 억지로 유학 보낸 섭섭함
계산원 일 하며 암수술한 부인도 눈물
자녀의 ‘분리-개별화’ 받아들이고
함께 식사하며 얘기 나누는 일 중요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자녀들은 부모와 떨어져서 독립해서 살아가는 라이프스타일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이들이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해서, 한국인의 문화와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이들이 미국에서 대학에 입학한 것도 부모를 위한 것이었다기보다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분리-개별화’ 하는 것이 정상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분리-개별화’란 자녀가 부모와의 공생관계를 벗어나 독립적인 개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가 부모와 독립된 상태에서도 안정감을 느끼는 것을 ‘대상 항상성’이라고 합니다. 이 ‘대상 항상성’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녀는 ‘분리 불안’이 심해져 부모와 잠시라도 떨어져 있지 않으려고 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부모의 보호와 관리가 필요한 의존적인 성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더욱 힘든 문제가 생깁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하게 잘 자란 것입니다.
아내와는 오랜 기간 만나지 못하면서 결국 서로 마음이 멀어졌습니다.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본 지도 오래되었고, 아내는 남편 없이 두 자녀와 함께하는 생활이 익숙해져버렸습니다. 사소하고 단순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가족이 모여서 함께 저녁을 먹고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시간은 중요합니다. ‘식구’라는 말 또한 함께 식사를 하는 사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때 이야기를 나누면 더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더 친숙하게 들리고 상대의 생각과 태도를 여유있게 이해하게 됩니다. 수년간 식사를 하고 함께 이야기하면 가족이 아닌 사람도 가족처럼 친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가족과도 식사를 함께하지 않고 자주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남처럼 될 수 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입니다. 주영씨는 우울증 치료를 받고 나서 의욕도 생기고 다시 잠도 푹 잘 수 있었고 이전보다 밝아졌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담당 선생님과 의논해보았습니다. 코로나19 이후 미국에서는 코로나 확산세가 무척 심각해졌고, 아내와 아이들이 머무르는 지역도 점점 위험해져 주영씨는 가족들에게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권유했습니다. 때마침 미국에 유학 온 다른 학생들도 귀국을 하는 상황이었고, 가족들도 주영씨의 의견에 동의해 주영씨 가족은 6년 만에 한국에서 온 가족이 모일 수 있었습니다.
주영씨는 아이들이 어릴 적 함께 강원도에 캠핑을 갔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아이들도 미국에서 캠핑을 자주 다녔다는 사실을 미리 파악해 온 가족이 함께 캠핑 갈 준비를 하고 장비도 구입했습니다. 주영씨 가족은 캠핑장에서 함께 고기를 구워 먹으며 밤이 늦도록 그동안 서로 지내왔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자신들을 억지로 미국에 유학을 보냈을 때 섭섭했던 마음, 학교에서 당했던 어려운 일들을 이야기하며 울컥하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며 아이들을 돌보느라 어렵게 살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영씨는 6년의 기러기 생활 동안 이런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건강한지 정도만 일방적으로 확인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밤마다 아내와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결국 자신이 가족 간의 마음의 대화를 간절하게 원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부터 주영씨는 잠들거나 깰 때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고 가족이 함께 밥을 먹으며 서로의 마음을 진솔하게 나누는 대화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번 대화를 계기로 아내가 미국에서 자궁암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병원비를 신경쓰지 않게 하려고 주영씨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내는 한국에서 함께 살면서 건강도 관리하기로 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면서 미국에서 자기가 할 일은 모두 마무리했으니 한국에서 사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마음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미국에 다시 돌아가서 학업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코로나19로 한국에 1년 더 있기로 했습니다. 한국에서 함께 가족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이들과도 점차 마음을 터놓게 되고 가까워졌습니다. 가족이 모여서 함께 마음을 나누는 것이 인생의 행복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시 두 아이들이 미국에 가더라도 온 가족의 마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의 지은이 전홍진 성균관의대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예민한 사람과 둔감한 사람에 관해 설명합니다. 매우 예민하다는 것은 ‘외부 자극의 미묘한 차이를 인식하고 자극적인 환경에 쉽게 압도당하는 민감한 신경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례는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으며, 모두 가명을 썼습니다. 자세한 것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이 글로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