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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알맹이 이상의 껍데기, 현실을 뛰어넘은 ‘피식대학’ 세계관

등록 2021-05-30 09:02수정 2021-05-30 11:20

[토요판] 밀레니얼 읽기
(11) 피식대학 열풍

요즘 제일 핫한 ‘개그 맛집’
‘피식대학’ 유튜브 채널에 빠져
긴 호흡보다 그때그때 조금씩
파편적으로 소비해도 문제없어
한사랑산악회 회원들. 유튜브 피식대학 화면 갈무리
한사랑산악회 회원들. 유튜브 피식대학 화면 갈무리

‘요즘 제일 인기 있는 거’라며 지인이 유튜브 영상 링크 하나를 보내줬을 때까지는 몰랐다. 이름부터 김빠지는 ‘피식대학 유니버스’에 내가 매료되어버릴 줄은. 처음 ‘한사랑산악회’ 영상을 봤을 땐 웬 아저씨들이 나오는 유튜브인가 했다. 주먹을 꽉 말아쥔 채 “열정, 열정, 열정!”을 힘주어 외치는 이들의 겉모습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찐’이다. 딱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50~60대 중년 아저씨들이었다.

<피식대학> 유튜브 채널에서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개그 코너들이 풀가동 중이다. 중년 등산 모임이 콘셉트인 ‘한사랑산악회’, 여자들이 질색팔색할 남자들과 비대면으로 만나는 콘셉트의 ‘비(B)대면데이트’ 등이 오늘도 유튜브 시청자들을 쉴 새 없이 웃기고 있다. 이용주, 정재형, 김민수 세 개그맨이 모여 시작한 피식대학의 전체 구독자 수는 이미 120만명을 넘어섰다. 유튜브 영상 회당 조회수 400만회를 넘긴 영상도 여러 개다. 샌드박스 코미디채널로, <피식대학>과 한핏줄인 <빵송국>이 낳은 월드클래스 아이돌 ‘매드몬스터’는 최근 팬클럽 ‘포켓몬스터’까지 출범시키며 인기몰이 중이다. 최근엔 샤이니 태민, 데이브레이크 이원석 같은 연예인들까지 출연할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

현실 그 이상의 현실을 보여주마

‘한사랑산악회’는 이름 그대로 산악회에 소속된 중년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사실감 넘치게 풀어나가면서 ‘아재들의 세계관’을 맛보여준다. 등장인물도 소름 끼치게 그럴듯하다. 해병대를 나와서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고, 언제나 긍정적인 마인드를 중요시하는 김영남 회장의 선글라스는 등산하는 중년 남자의 진짜 아이웨어 트렌드를 반영한다. ‘B대면데이트’도 사실감으로 따지자면 둘째가라면 서럽다. 카페 사장, 중고차 딜러, 다단계 직원 등으로 구성된 다섯 남자들과 비대면 소개팅을 한다는 콘셉트부터가 기기묘묘한데, 이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사실감은 불편하면서도 재미있다. 로봇공학 등 기술의 발전으로 가짜가 정말 진짜처럼 다가올 때 느끼는 불편함을 가리키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불쾌한 골짜기)를 느끼게 할 정도다. 여자들이 학을 뗄 정도로 전형적이면서도,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남자들을 연기하는데, 묘한 중독성이 있다. 가장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캐릭터인 유학파 카페 사장 최준은 일찌감치 느끼한 연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준며들다’(최준에게 스며들다)라는 유행어를 낳았다.

‘매드몬스터’는 현실의 아이돌보다 더 아이돌 같은 2인조 남성 그룹이다. 현실 아이돌 스타들의 미묘한 개성을 포착해 기가 막히게 따라 하는 게 이들의 강점이다. 댄스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신발 밑창이 타는 바람에 이름을 ‘탄’으로 지었다든지, 함께 활동하는 멤버 ‘제이호’는 외국 유학을 오래 해서 영어 발음이 말투에 배어 있다든지 하는 식이다. ‘05학번이즈백’은 2000년대에 시간이 멈춰 있는 것처럼 당시 유행과 패션을 보여주는 콘텐츠라서 유튜브를 ‘유시시’(UCC)라고 일컫는 등 최근에 사라진 용어들을 써서 지금 보면 낙후되고 우스꽝스럽다. 이렇게 뚜렷하고 디테일한 설정은 자신만의 세계관을 단단하게 만든다.

“세계관이 조금씩 연결돼서 재밌는 것 같아. 산악회 누구 아들이 05학번 누구라서 다른 코너에 나온다든가, 그런 게 디테일하게 돼 있으니깐 시트콤처럼 즐길 수 있는 것 같아. 세계관이 뭔가 사실적이면서도 너무 웃기니까 밈으로 만들 구석도 많고.”(한준, 30살)

한사랑산악회, 05학번이즈백, B대면데이트, 매드몬스터는 서로 연결된다. 각 코너 속의 주인공들은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 같은 연기를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코너의 캐릭터와 혈연, 지연 등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설정까지 갖추고 있다. 인기의 비결이다. ‘한사랑산악회’ 김영남 회장은 사실 ‘05학번이즈백’ 김민수의 아빠이며, ‘B대면데이트’ 임플란티드키드의 삼촌이다. 이런 설정은 세계관 전체를 치밀하게 직조하고, 숨은 연결고리를 찾는 재미를 선사한다. 마치 마블 영화를 볼 때처럼 쫀득쫀득하게 콘텐츠를 소비하는 게 가능해지는 것이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이 안 되는 순간이 재미있어. 얼마 전에는 신문에서 한사랑산악회 인터뷰한 걸 봤는데, 그 기사 밑에 달린 댓글이 너무 웃긴 거야. 진짜 아저씨들이 쓴 건지, 아저씨들을 따라 하는 젊은 애들이 쓴 건지 구분이 안 돼서. 이렇게 세계관이 막 섞이고 흔들리는 게 재미있어서 피식대학에 더 끌리는 거 같아.”(이소연, 26살)

피식대학 콘텐츠에 달리는 댓글은 영상의 재미를 완성한다. “최준 좋아하지 마” “최준 좋아하지 말라고” “그런 적 없다고(욕설)” 등 ‘주접 댓글’의 향연이다. 재벌 3세 소개팅남 이호창을 두고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의 조인성을 어설프게 닮았다고 해서 “조인성의 발톱을 먹고 사람이 된 쥐 아니냐” “발리에서 온 쥐”라고 댓글이 달리기도 한다. 말 그대로 피식대학 세계관 속에 너도나도 스며들어 놀게 되는 것인데, 재미있는 댓글이야말로 이들의 세계관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매드몬스터, 산악회를 다 따로 좋아한다기보다는 그 전체 이어지는 흐름이 너무 좋아. 세계관에서 할 수 있는 걸 진짜로 퀄리티 높게 재현해버리니까 그게 웃겨. 진짜 엠넷 같은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거나, 퀄리티 좋은 뮤직비디오를 찍어서 공개한다거나, 댄스 연습 동영상 올리는 거같이. 진짜 할 법한 것들을 보여주니까.”(최창근, 30살)

‘준며들다’의 주인공, 최준(왼쪽)과 임플란티드키드(오른쪽). 유튜브 피식대학 화면 갈무리
‘준며들다’의 주인공, 최준(왼쪽)과 임플란티드키드(오른쪽). 유튜브 피식대학 화면 갈무리

‘뒷광고’보다 ‘앞광고’가 낫다
유일무이보다 익숙한 것에 끌려
어차피 하늘 아래 새로운 거 있나
기대 없음의 세계관은 재치라도 있지

지루한 세상 버틸 ‘껍데기여 오라’

싱크로율 높은 세계관에서 나오는 그들의 서사는 드라마나 영화, 시트콤 등이 주던 즐거움을 대신한다. 확고한 캐릭터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다 보니 유튜브를 중심으로 하지만, 지상파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출연해 세계관을 이어나가기도 한다. 드라마처럼 전체를 몰아보기 할 필요도 없고, 파편적으로 소비해도 문제가 없다. 긴 호흡으로 집중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조금씩 콘텐츠를 소비하는 요즘 세대의 콘텐츠 소비 패턴에도 딱 맞는다.

이들의 탄탄한 세계관은 ‘앞광고’와도 기가 막히게 연결된다. 지난 27일에는 ‘B대면데이트’의 등장인물 중 한명인 ‘김갑생할머니김’의 이호창 본부장이 외교부와 함께 진행한 유료 광고가 공개되기도 했다. 제목은 ‘김갑생할머니김 2021 이에스지(ESG) 경영 발표(전세계 195개국 송출)’. 이호창 본부장은 피식대학 세계관을 바탕으로 회사가 어떻게 이에스지(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해나갈 것인지를 발표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에스지 경영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외교부와 함께 진행한 김갑생할머니김 광고 영상에는 외교부의 센스를 칭찬하는 댓글이 와르르 달렸다. 자본주의적 문화에 워낙 익숙하고 공정성을 중요시하는 우리 또래 세대는 어설픈 ‘뒷광고’보다 적나라한 ‘앞광고’에 열광한다. 프랜차이즈 기업을 상대로 가격을 협상하는 웹예능 <네고왕> 같은 프로그램이 대놓고 유행할 수 있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다.

어떨 때 사람들은 나만 아는 것, 유일무이한 것보다는 익숙한 것에 더 끌리기도 한다. 한번 지나간 유행에 다시 끌리는 ‘레트로 유행’만 봐도 그렇다. 어차피 이 땅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는 ‘기대 없음’ 때문이기도 하다. 피식대학 세계관의 유행엔 ‘원본’에 집착하기보다는, 원본을 비틀면서 즐기고 밈을 만들어 퍼뜨리며 재미를 느끼는 데 익숙한 세대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껍데기는 가라!’ 같은 구호는 더 이상 우리 세대에 맞지 않다. 오히려 ‘껍데기여 오라’에 가까울 것이다. 껍데기든, 껍데기가 아니든 상관없으니, 이 지루한 세상을 버텨낼 재미만 있어다오. 그것이 어쩌면 우리의 ‘시대정신’일 것이다.

천다민 뉴닉 에디터

▶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사람들을 밀레니얼 세대라고 한다. 정보기술(IT)에 능하고 개성이 강하며 부당한 일에 적극 목소리를 내고 앞날에 대한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갖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 ‘나 때는 말이야’라고 툭하면 가르치려는 ‘라테 세대’는 모르는 밀레니얼 세대의 문화를 소개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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