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30일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제철(당시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13년8개월 만에 대법원 승소 판결이 난 뒤 기자회견을 하던 모습. 유일한 생존 원고 이춘식 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근혜 정부 시절 재판개입을 통한 ‘사법농단’으로 피해를 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이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하고 나섰다.
27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씨와 고 김규수씨 배우자는 대한민국을 상대로 “각각 1억100원을 배상해달라”며 박근혜 정부 시기 재판 거래 불법행위에 대한 국가배상을 청구하는 소장을 서울중앙지법에 제출했다. 두 사람은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한명당 1억원을 지급하라”는 확정판결을 받은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의 원고이기도 하다.
소송을 대리한 임재성 변호사는 “당시 재판 거래 혐의는 현재 기소돼 재판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뿐만 아니라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정무수석, 외교부장·차관, 김앤장법률사무소 변호사들 다수의 조직적 공모와 실행으로 이뤄진 불법행위”라며 “이 가운데 재판 거래 혐의로 기소된 사람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차장 등 소수에 불과해, 재판 거래 불법 행위자들 각각을 피고로 삼기보단 재판과정에서 이들의 불법행위를 포괄적으로 입증하는 것에 주력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맨 왼쪽)가 일제 강제동원 문제해결을 위한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앞서 이씨 등은 2005년 2월 일제 강제동원 피해를 호소하며 일본 전범기업인 일본제철(당시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낸 바 있다. 이에 대법원은 2012년 5월 이씨 등의 청구권을 인정하는 취지로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서울고법도 2013년 7월 대법원 판결 취지에 따라 “한명당 1억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선고했다. 그러나 파기환송심 판결에 불복한 일본 전범 기업이 재상고했고, 2013년 8월 대법원에 접수된 재상고 사건의 선고는 계속 미뤄졌다. 이씨 등과 지원 단체는 진정서를 내고 기자회견을 열어 조속한 판결을 거듭 촉구했지만 대법원은 묵묵부답이었다. 정권이 바뀐 뒤인 2018년 7월 검찰은 사법농단 사건을 수사하면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유에스비(USB)에 저장된 문건들을 압수수색했고, 이 과정에서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박병대 법원행정처장 등과 청와대·외교부 고위 공직자들, 김앤장법률사무소 변호사들이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 재판을 지연시키거나 재판 결과를 조정하는 데 공모했다는 혐의가 드러났다. 하지만 그해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최종 선고를 했을 때는 이미 원고 4명 가운데 3명이 숨을 거둔 뒤였다.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 결과를 보면, 2013년 2월 박근혜 정부 출범 뒤 외교부가 임종헌 전 차장 등을 통해 ‘판결이 조기 선고되지 않도록 해주고, 정부의 의견 개진 기회를 제공해주며, 외교적 차원의 의미와 파장 등을 감안해 전원합의체 회부를 통해 보다 신중히 판단해달라’는 정부의 요청을 거듭 전달했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이 의도적으로 심리 불속행 기간을 넘긴 것으로 검찰은 판단했다. 또한 재판에 외교부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국가기관 등 참고인 의견서 제출 제도’를 도입할 때까지 재판연구관 검토 보고 등의 절차를 진행하지 않게 했다는 게 검찰의 기소 내용이다. 법원행정처의 최대 역점 사업인 상고법원 도입 등에 청와대와 정부의 협조를 얻기 위해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 재판 등에 정부 요청 사항을 적극 반영했다고 본 것이다.
이씨 등은 이런 내용 등을 근거로 헌법이 보장하는 공정하고 신속하게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주장했다. 임 변호사는 “재판거래는 독립과 공정이라는 사법부의 가치가 모두 허물어졌던 반헌법적 사건이었는데도 소수 판사에 대한 기소만 이루어졌을 뿐 사건에 대한 온전한 진실규명도 피해자들에 대한 권리회복 절차도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다”며 “이번 소송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회복과 역사정의의 실현, 그리고 사법개혁과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소중한 디딤돌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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