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넬 차크마 나니(49·남)는 차크마족으로 방글라데시 정부의 박해를 피해 한국에 와서 살고 있다. 재한줌머인연대(Jumma People’s Network Korea)를 공들여 꾸리고 있으며, 김포시외국인주민센터의 상담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나니’라는 한국 이름을 지었습니다. 주민등록증을 보면서도 내 이름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창성창본’을 해야 한다고 해서 본관을 김포로 하는 이씨 성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본관이라는 말과 의미는 개명 과정에서 처음 알게 됐는데, 성씨가 시작된 지역 이름을 기록하고 그것을 자손에게 계속 물려준다니 참 놀라운 일입니다. 나는 차크마(실제 발음은 ‘짜끄마’에 가깝습니다)족으로 방글라데시 남부 치타공의 고산지대 랑가마티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차크마족은 마르마족, 턴천가족, 트리푸라족 등 11개 소수민족과 함께 줌머족으로 묶입니다. 줌머는 화전민이라는 뜻입니다.
근대 역사는 우리 줌머에게 유난히 모질고 혹독합니다. 치타공 높은 산에서 조용히 농사지으며 대대손손 살아온 우리를 뒤흔들고 뿌리까지 뽑아버리려 듭니다. 고향은 인도가 영국 식민지배를 받을 때 인도 땅이었고, 인도·파키스탄이 영국에서 독립할 때 파키스탄에 속했다가, 후에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면서 지금은 방글라데시 영토에 속해 있습니다. 어느 국가에 속했느냐와 무관하게 우리는 끊임없이 생명·정치·경제·문화적인 탄압을 받아왔습니다. 지금도 방글라데시는 자치권을 요구하는 줌머에게 군대를 보내고 벵골족(방글라데시의 주류 민족)을 집단 이주시켜 우리가 일군 삶의 터전을 갈취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는 이 끔찍한 폭력과 학살을 ‘인종청소’ ‘민족말살행위’라고 부릅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고향을 떠나 대한민국 김포에 살게 되었습니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우리 존재를 완전히 지우고 싶어 했습니다. 방글라데시가 독립 국가를 세우던 시기 초대 수상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자치권을 요구하는 우리에게 ‘민족 정체성을 포기하고 벵골인이 되라’ 했습니다. 우리는 거부했고 그 대가로 지금까지 응징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벵골족 중에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벵골족 되면 진급하는 거잖아. 큰 민족에 속하면 좋지 뭘 그래!’ 기가 막힙니다.
방글라데시를 떠나온 지금도 벵골족과의 관계는 계속 이어집니다. 나는 김포이주민센터에서 상담팀장으로 일합니다. 이주민이 노동과 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때 통역하고 지원하는 일입니다. 나는 방글라데시 사람을 지원할 때도 최대한 잘해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들도 여기서는 소수자이니까요. 민족 탄압의 무게는 엄청나지만 그 책임을 개인에게 물을 수는 없습니다.
흥미로운 일도 많습니다. 센터에 처음 온 어떤 벵골족은 외모가 한국 사람 비슷한 나를 보고, 한국인이 벵골어를 어찌 그리 잘하느냐고 칭찬합니다. 그러다 내가 차크마인 것을 알고 나서는 벵골어를 제대로 못 할 거라 무시합니다. 나는 이런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 그 배경을 떠올립니다. 벵골족의 민족적 자존심은 대단히 높습니다. 어휘가 풍부하고 문학적 성취가 높은 벵골어에 대한 자긍심도 하늘을 찌릅니다. 동파키스탄 시절 벵골어 사용을 금지하고 우르두어를 강요했던 서파키스탄에 맞서 투쟁해 승리한 역사도 있고, 벵골어로 시를 쓴 벵골족 타고르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니까요. 그 자긍심이 한편으로는 차크마의 벵골어를 못 믿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는 통역사이자 상담사로서 나와 그 사람 사이를 가로막은 울타리를 넘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진보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나는 얼마나 진보적인가, 나는 민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을 만큼 진보적인가.
소수민족이기에 겪어야 하는 아픔을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었으니, 아이들 세대는 더 힘겨울 것입니다. 우리 뿌리가 있는 랑가마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오래도록 지켜온 모든 문화가 지금은 주류를 따라가고 있어요. 일상 언어도 거의 절반은 벵골어가 잠식한 상태지요. 우리말과 문화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변화를 막기에는 부족합니다. 우리 줌머족, 특히 차크마족은 민족주의가 상당히 강한 편입니다. 나는 우리가 오랫동안 받아온 차별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끼리 결혼하기를 원합니다. 만약 줌머 여성이 벵골족과 결혼하는 일이 생기면 그 여성은 줌머족 안에서 죽은 사람 취급을 당합니다. 현대 사회에 맞지 않는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그것이 탄압에서 비롯된 일이니 나름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그토록 날 세워 경계하는데도 줌머 문화는 벵골 문화에 휩쓸려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아이들을 휘감을 소용돌이는 더욱 거셀 것입니다.
참담한 경험을 안고 온 우리를 한국은 안전하게 보호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살해나 폭력에 대한 두려움 없이 평온하게 하루하루를 이어갑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나와 한 친구가 26년 전 한국에 와서 김포와 인연을 맺고 이후 난민으로 받아들여진 뒤, 우리에게 의지해 많은 줌머인이 이곳으로 찾아왔습니다. 가족을 이루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지금은 150여명이 커뮤니티를 이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 돕고 의지합니다. 누군가 새로 들어오면 누워 쉴 자리를 챙기고, 먹고살 궁리를 같이 합니다. 가족과 고향을 같이 그리워하고, 고향에서 탄압 소식이 들려오면 줌머인의 이름을 걸고 같이 싸웁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기억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 자유롭고 평안한 나라에서도 우리는 정체성을 스스로 드러내거나 온전히 지키기 쉽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가 아직 다양성을 존중할 만큼 여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차이를 드러내고 우리 것을 지키려 하면 할수록 주류 사회는 우리를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 두려워하고 공격할 테니까요. 내가 보아온 26년간 한국은 참 많이 변했지만, 앞으로 숙제도 많아 보입니다. 외국인이 한국에 들어온 초기, 외국인들 대다수는 공장 기숙사에 살며 반말과 하대와 열악한 노동환경을 견뎌야 했습니다. 고립되다시피 했으니 한국인들과 접하거나 갈등을 빚을 기회도 거의 없었지요. 후에 결혼이주민이 대거 들어오면서 ‘교류나 소통’이 필요하다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는 공장을 떠나 센터에서 각종 ‘문제’를 상담하며 ‘한국인’과 이주민 사이를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센터에서 일하는 이주민 직원들은 한국인의 민낯을 자주 만납니다. 우선 전화 통화부터 난관입니다. 한국어를 아무리 잘해도 이주민의 발음과 억양이 한국인 같을 수는 없지요. 이를 눈치챈 상대방이 말합니다. 한국 사람 바꾸라고! 얼굴을 마주하면 갑질이 더 진화합니다. 한국 사람 없어? 당신이 책임자야? 외국인이 상담 이런 거 해도 되나? 문제의 본질보다 우리가 이주민이라는 것에 더 주목합니다.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야? 이건 정말 난감한 질문입니다. 이미 나를 한국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공격하는 것인데 ‘한국 사람이요’ 할 수도 없고, 더 무시당할 게 뻔한데 ‘방글라데시 사람이요’ 할 수도 없습니다. 방글라데시 출신인데 지금은 귀화해서 한국인입니다, 대답할 의무도 없는 질문에 나는 성의를 담아 대답합니다. 그 사람과 관련된 문제를 계속 진행해야 하니까 관계를 포기할 수 없거든요. 그러나 되돌아오는 반응은 여지없습니다. 귀화? 당신은 한국 사람 아니야, 내가 오리지널 한국 사람이야. 국적 취득해봤자 한국 사람 되는 거 아니잖아. 이게 시에서 만든 센터라고? 우리 세금 써서 운영하는 센터에서 왜 외국인 편을 들지? 시장한테 전화해서 당신 잘라 버리라고 해야겠구먼!
아이들이 가정과 학교를 벗어나 사회에 나섰을 때 이런 혐오 앞에 서게 될 것을 생각하면 앞이 깜깜합니다. 현실이 이런데 우리가 뿌리를 기억하며 존엄성을 유지할 방법은 대체 무엇입니까. 우리가 뿌리를 고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굳이 개명한 것도 아이들 때문입니다. 이름을 버리라 강요받은 것은 아니지만, 차별을 피하기 위해 한국 이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사실 이 문제는 우리 커뮤니티에서 아주 중요하고 예민한 문제입니다. 어려서부터 민족운동을 해온 내가 귀화하고 이름까지 바꿨으니, 커뮤니티 멤버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나이 들고 한국 체류기간이 긴 사람들보다 젊고 한국 생활이 비교적 짧은 사람들이 더 크게 우려하고 걱정합니다. 젊은 후배들이 단호하게 말합니다. ‘귀화는 어쩔 수 없지만 이름까지 바꾸는 것은 반대예요.’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나도 그랬으니까요. 후배들은 이제 막 한국에 왔거나, 국적 취득한 지 얼마 안 됐거나, 결혼하고 아이 낳은 지 오래지 않아 아직 구체적인 고민을 해본 적이 없으니 원칙을 주장하기 더 쉬운 입장입니다.
하지만 막상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청소년기를 맞게 되면 고민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우리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기 어려운 여러 사회·문화적인 압박이 있는데, 아이가 크면서 그 압박 수위도 쑥 올라갑니다. 아이들이 앞으로 한국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한국 사람’처럼 생각하고 ‘한국 사람’으로 사는 것이 좋겠지요. 사실 무엇이 더 좋을지 생각하고 선택할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한국 문화와 한국적 가치관 속에 툭 던져졌으니 아이들은 이미 마음으로부터 한국인입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우리는 줌머인이야, 우리는 달라, 우리 것을 지켜야 해 하고 강조한다면, 아이들은 더 멀어져 갈 것입니다. 그동안 애써 거부해온 동화주의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 상황이 참 아프고 힘듭니다.
누군가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도 존재 자체를 무시당하면서 살아온 우리인데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이만큼 안전하고 자유롭게 사는 게 어디야! 그 말에 울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나는 후배들에게 고통스럽게 당부합니다. 우리 세대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하되, 아이들에게는 ‘민족’을 너무 강요하지 말자고 말입니다. 센터에서 한국어를 모르는 젊은 고려인들을 만납니다. 이렇게 큰 한민족도 따로 떨어져 산 100년 남짓 사이에 말을 잊었다는데, 우리 같은 소수민족은 20~30년도 안 걸려 말을 잃게 될 것입니다. 알면서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 같은 소수자는 당사자의 노력만으로는 자신을 지킬 수 없습니다. 사회가 더 넉넉해지고 다양성을 품는 힘이 커져야만 비로소 우리도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며 주류 사회와 대등한 관계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합니다. 치타공 랑가마티에 뿌리를 둔 차크마족이자 한국인 김포 이씨인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열심히 살다 보면 나이 들 것이고 국민연금 받으며 노후를 살게 되겠지만 그게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내 노력에 따라 아이들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면 고민은 더 깊어집니다. 치타공 랑가마티를 떠난 것도, 귀화를 선택한 것도, 후배들의 반대에도 굳이 한국 이름으로 개명한 것도, 한국인이고자 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존중하는 것도 그런 고민 속에 내린 결정입니다. 이런 결정이 후회되지 않도록 나는 노력을 다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들어올 이주민들이 걱정 없이 자기 본질을 드러내면서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먼저 온 선배 입장에서 할 노력, 한국이 이주민을 받아들이는 데 부담을 덜 느끼도록 이주민 입장에서 할 일, 차이를 존중하며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할 노력 말입니다.
▶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일꾼. 국경을 넘어와 새 삶을 꾸리고 있는 이주민들은 저마다 깊은 사연이 있다. 떠나온 사회와 살아내야 할 사회에 하고픈 말이 많지만 그 말은 발화되지 못한 채 눈동자에 잠기곤 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내 당사자 시점으로 전한다. 4주에 한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