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백기완 선생의 영결식이 열린 19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묘지에서 유가독들과 시민 노동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하관식 및 평토제를 하고 있다. 남양주/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19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상여꾼들이 천천히 ‘민중의 벗’이었던 백기완 선생(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의 관을 전태일 열사 묘소 왼편 장지에 내려놓았다. 백 선생의 딸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 등 유족들은 “아빠”를 부르며 하염없이 통곡했다. 백 선생의 하관식에 참석한 200여명의 시민들이 북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백 선생의 머리맡에는 ‘한반도기’와 함께 영정사진과 위패가 놓였다. 영정사진 속의 백 선생은 여전히 백발을 휘날리며 환히 웃고 있었다.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았던 백 선생의 위패에는 ‘현고학생부군신위’가 적혔다.
백 선생의 큰아들 백일씨가 “아버지 흙 들어가오. 안녕히 가세요”라고 외친 뒤 삽으로 흙을 떠 흩뿌렸다. 관을 흙으로 덮는 허토가 진행되는 동안 풍물패의 연주가 이어졌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활동가의 자녀들이 선생에게 쓴 편지도 관 위에 놓여 함께 묻혔다. 선생이 50년 전 노동해방을 외치며 먼저 떠난 전태일 열사와 나란히 누워 영면에 드는 순간이었다.
19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영결식이 열리면서 참가자들이 무대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늘 노동자와 민중의 편에 섰던 백 선생은 마지막 길에도 그들과 함께였다. 백 선생과 함께 통일과 민주화를 외쳤던 동지들, 백 선생이 손잡고 격려해준 수많은 노동자와 ‘백기완 정신’을 기억하려는 시민들이 백 선생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백 선생의 노제와 영결식, 하관식이 예정된 이날 오전 8시께부터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엔 100명이 넘는 조문객이 몰렸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장례위원회’(장례위)는 발인이 끝난 뒤 오전 8시 반께 백 선생이 생전에 몸담았던 종로구 통일문제연구소 앞과 대학로 소나무길에서 노제를 열었다. 상임장례위원장을 맡은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는 노제에서 “선생님은 평생을 이 땅의 노동자, 민중의 일원으로 살았고 백발이 노인이 된 뒤에도 그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지로 살았다”며 “선생님은 투쟁의 최전선에서 한 걸음의 진전을 위한 싸움에도 자신의 목숨을 건 투사였다”고 회고했다.
노제가 끝난 뒤 운구행렬에는 백 선생을 형상화한 대형 한지 인형과 꽃상여가 백 선생의 영정을 뒤따랐다. 운구행렬에 동참한 시민 300여명은 왼쪽 가슴에 ‘남김없이’라고 쓰인 하얀 리본을 달았고, ‘노나메기 세상’(너도 나도 일하고 올바르게 잘 사는 세상)이 적힌 하얀 마스크를 썼다. 노동자들은 백 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귀 ‘노동해방’이 적힌 검은 머리띠를 둘렀다. 곳곳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며 울먹이는 시민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노동자와 시민들은 ‘딱 한 발 떼기에 목숨을 걸어라’ 등 생전 고인의 글귀를 적은 손팻말을 든 채 마지막 행진을 했다. 행렬에 참여한 이미연(51)씨는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백 선생님은 옳은 말을 삶으로 온전히 실천하는 분이었다”며 “많은 이들이 선생님의 뜻을 이어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전 11시 반부터 서울시청 광장에서 진행된 영결식에선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선생을 떠올리며 조사를 했다. “백 선생님이 걸음걸이도 힘든 상태에서 양쪽 부축을 받으며 겨우 (용균이) 빈소에 와 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원통함과 북받치는 설움을 느꼈습니다. 저세상의 용균이를 만나면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꼭 한번만 안아주세요.” 백 선생의 오랜 동지인 문정현 신부도 조사를 낭독하는 내내 울먹이면서 “용산참사, 세월호 등 이 시대의 노동자와 농민, 빈민의 편에 서서 선생님이 보여준 노나메기 세상에 대한 말씀 길이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재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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