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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호스피스 대모, 70대 퀴어…나, 스스로 정하고 책임지는 인간

등록 2021-02-06 11:27수정 2021-02-08 18:12

[토요판] 인터뷰
자서전 펴낸 김인선씨

파견간호사로 독일 이주 반백년
“호스피스 대모” “70대 퀴어”
그를 다루는 기사들 진폭도 커
한국의 차별 보며 기여할 일 생각

‘내가 정하고 책임지는 인간’으로
후회 없이 살며 사랑하며 공부하며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할 권리
책 쓰면서 과거 의미 알게 돼”
김인선씨는 “어디서 태어나 왔든, 누굴 사랑하든, 돈이 있든 없든, 인간은 그 자체만으로 존엄성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사진 칼로, 나무연필 제공
김인선씨는 “어디서 태어나 왔든, 누굴 사랑하든, 돈이 있든 없든, 인간은 그 자체만으로 존엄성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사진 칼로, 나무연필 제공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 학교를 나와 한국의 인터넷신문사에서 한국어 기사를 쓰는 일을 했던 나는, 2016년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와 6년째 외국인으로 살고 있다. 아시아 최대 규모 대도시에서 하루에도 ‘카카오톡’으로 한국에 있는 조카 사진을 몇장씩 전송받는 내가 과거의 유학생 수필가나 유럽 어느 시골의 이주자와 같은 고립감을 말한다면 억지일 것이다.

워낙 가까운 곳이기도 해서 처음엔 훌쩍 떠나 왔다. 하지만 적응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타향살이라는 말이 와닿는다. 이곳에서의 적응은 졸업 후에도 이곳에 남는 게 더 현실적인 전망이 되어 가는 과정이었고 그렇게 편도 행로의 일정을 무기한으로 비워 놓게 되니 선명해지는 건 내가 앞으로도 외국인일 거라는 사실이었다.

일본 법무성이 교부하는 서류나 여전히 겪는 언어의 장벽, 일상 속 문화 차이보다 강렬하게 이 리얼리티를 지탱하는 건, 과도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죽음이나 병이다.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점에서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잠재되어 있는 일이다. 만일 내일 죽는다면 아직 내가 쓰지 않은 논문에서만 쓸모 있는 이 책들을 적당한 곳에 양도해 줄 사람이 있을까. 혹은 언젠가 삶을 정리할 때가 온다면 누가 내 옆에서 지독한 쓸쓸함을 덜게 해 줄까. 지난 1년간 코로나 사태로 인한 한일 왕복의 조건의 변화, 그리고 이 때문에 지난 7월 소중한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경험은 이 현실 감각을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얼마 전 나는 신오쿠보의 곱창 집에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건강 검진에서 약간 신경 쓰이는 결과를 받아들고 난 뒤 여기에서 살아갈 이유로 가족을 만드는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019년 말, 건강 문제로 10년 가까운 일본 생활을 정리했던 또 다른 친구 생각이 났다. 친구는 또 코로나 유행 이후 같은 사무실 동료들 몇이 한국에 돌아갔다고 말했는데, 확실히 내 주변에도 귀국했거나 귀국을 고려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그 구체적 이유는 제각각이겠지만, 나를 포함한 또래 여자 친구들의 외국 생활을 그림으로 나타낸다면 한쪽에는 ‘여기에서 뼈를 묻어도 되는가’란 질문을, 다른 한쪽에는 이리저리 조합한 명분을 다는 천칭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박정희 시대 간호사 파견 제도로 독일로 이주해 거기에서 50년째 살고 있는 김인선씨(71)의 인생 이야기를 접했을 때, 우리의 ‘이주’ 사이에 있는 커다란 맥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그린 궤적들, 그가 독일과 한국으로 향할 때의 얼굴들이 궁금해졌다. 올해 초 출간된 그의 자서전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나무연필)를 전자책으로 선물받은 그날 밤, 잠들기 전 침대에서 단숨에 읽어 내렸다. 친구를 만난 다음 날 저녁, 나는 베를린에서 같은 날 아침을 맞은 김인선 씨와 줌을 통해 만났다. 곡절 많은 인생을 담담하게 적은 책에서와 달리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쾌활했다.

‘독일 호스피스 대모’에서 ‘70대 퀴어’까지

김인선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듯하다면 그 예상이 맞다. <한겨레>에도 지금까지 그의 인터뷰가 여러 차례 실렸다. 그 첫 번째인 2010년의 기사는 “독일서 동아시아인 위한 호스피스 단체 ‘동행’(현재 이름은 ‘동반자-이종문화 간의 호스피스’) 이끄는” “이주 간호사 1세대”라고 그를 소개한다. 2005년 설립해, 머나먼 타국 땅에서 죽음을 맞아야 하는 많은 이주민들의 임종을 돕는 이 단체 활동으로 그는 독일과 한국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많은 매체와 출판사가 그의 활동에 주목했고, 이에 2011년 동행의 활동을 다룬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 책 표지에는 “KBS 아침마당에 출연하여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린 독일 호스피스 대모 김인선 대표가 전하는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적혀 있는데, 내가 줌 화면 너머로 본 사람을 떠올려 보면 이 문구는 뭔가 과하고, 동시에 뭔가 부족하다. 그것은 아마 이 활동만큼이나 중요한 그의 또 다른 삶의 이력이 알려지기 전에 작성된 문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동행’ 대표로 소개된 2014, 2015년 기사를 지나 2018년을 기점으로, 똑같은 김인선을 다루는 기사들이 무지갯빛으로 변한다. 그해 5월, 인천에서 열린 디아스포라 영화제의 강연을 통해 그는 여성 파트너와 함께 사는 레즈비언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에서 한 커밍아웃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20주년을 맞은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초대되어, 한국 사회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시니어 성소수자로서 젊은 성소수자들과 만나고 다양한 삶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스크랩한 기사의 사진을 넘기며 훨씬 더 풍부해져가는 그의 얼굴을 본다. 어떤 장면에선 한없이 자유로워보이고, 어떤 장면에선 앞으로 자신의 사회적 쓰임을 각오한 자의 비장함도 느껴진다. “(성소수자들이) 차별을 받고 상처받고 하는 걸 보면서… 이제 한국 가면 내가 해야 될 일들이 좀 있겠구나 이 생각을 했죠.” 2019년 봄의 이전까지와는 ‘테마’가 바뀐 귀국 경험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팬데믹 여파로 2020년에는 불가능했지만, 앞으로도 한국의 젊은 퀴어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많이 갖는 것이 그의 희망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김인선, 나무연필 제공
어린 시절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김인선, 나무연필 제공

독일에 산 지 50년. “이제는 생각이나 정서, 정체성이 독일 사람에 가깝다”는 그의 독일행은 1972년 9월, 스물두살 때의 일이다. 1950년 1월2일 경남 마산 출생인 그는 자신이 “반겨줄 이 없는 이 세상에” “어쩔 수 없이 태어”났다고 말한다. 배움과 출세에 대한 야망이 넘치던 스무살 ‘신여성’이 난봉꾼인 기혼자를 잘못 만나 ‘생겨버린’ 게 그였다. 이 여성은 아이가 세살 되던 해 그를 자기 어머니와 동생에게 맡긴 채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그리고 6년 뒤 돌아와 신문 기자와 통역사로 활약했지만 자식은 낳은 적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학대에 가까운 무책임과 무관심 속에 어린 김인선은 이곳저곳을 전전한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해주는 외할머니와 살게 된 것도 잠시, 그가 열여섯살 때 외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어머니는 유엔 직원인 독일인 남성과 결혼해 한국을 등진다. 막내 이모네서 고등학교를 다니지만 그 가족도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어릴 때 엄마라 불렀던 둘째 이모네도 미국에 간 이후였고, 외삼촌은 일본에서 계속 살았으니 한국에 의지할 데라곤 전무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 하던 그에게 세계를 떠돌던 어머니의 편지가 도착한다. ‘계부가 너를 간호 학생으로 독일에 초청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한국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부푼 마음으로 1972년 9월 독일행 비행기에 오른다. 그러나 타국 생활은 녹록지 않았고 정체성의 혼란과 우울을 겪는다. 견디다 못 해 돌아가려던 그에게 처음부터 그를 아낌없이 배려했던 병원 수녀님이 제안을 했다. 짐을 놓고 가면 어떻겠느냐고. 그렇게 3년6개월 만에 밟은 한국 땅, 몰락한 아버지 가족을 도울 요량으로 다방에서 일하다 불현듯 이번 책의 제목과 같은 사실을 깨닫는다. 무엇보다 소중한 건 자신이며, 자신을 위해 살자고. 그렇게 6개월 만에 다시 독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생각했다.

“한국에서 살 수 있을까 고민해봤지만, 도저히 살 수 없겠더라고요. 한국은 혈연도 없는, 공부도 하다 만 여자가 혼자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독일에 가서 충실하게 살아보자 결정한 거죠. 절박했고, 저한테는 유일한 기회였어요. 태어나지 않았어도 좋았을 환경에서 태어났기에, 독일에 올 때까지만 해도 스스로의 정체성이나 존재감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었어요. 그냥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었죠.”

독일 신학대학에서 공부할 때 목사복을 입은 모습. 김인선, 나무연필 제공
독일 신학대학에서 공부할 때 목사복을 입은 모습. 김인선, 나무연필 제공

내가 정하고 내가 책임지는 인간

한국을 떠나 다시 독일에 와서 새롭게 또 다른 고독이 시작되었지만 자신을 맞아준 병원 수녀님들 덕에 종교와 더욱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그는 말했다. “수녀님들이 제게 하나님과 하나님 믿는 사람들에 대해 무척 좋은 인식을 갖게 했어요.”

돌아온 뒤 1979년에 간호 학교를 졸업, 간호사로 일하기 시작했고, 서른네살이던 1984년에는 결혼을 했다. 상대는 그가 뒤스부르크로 거처를 옮긴 뒤 한인 교회에서 소개로 만난, 독일 시민권을 가진 한국 남자였다. 공부 열망이 컸던 그에게 결혼과 독일 국적 취득은 신학 공부를 하기에 도움이 되는 환경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1985년 디아코니세(전문적인 기독교 여성 봉사자) 교육과 안수부터 시작해 서른일곱 늦깎이 야간 고등학교 학생이 되어, 보훔 대학을 거쳐 2003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기까지, 신학 공부는 그에게 단순한 전공 이상의 의미였다. 독일의 사상과 정서를 깊게 알게 되었고, 독일 사회에 자리를 잡아 갔으며, 무엇보다 하나의 인간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게 했다.

“독일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의 인간으로서,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나한테 있다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책임도 내가 져야 하고요. 그리고 그것이 누구라 해도 개인으로서 그 권리와 책임을 인정받고, 동등하게 존엄하며, 서로 다 눈높이가 같다는 게 독일의 인권에 대한 생각이에요.”

이런 생각을 익히며 그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오롯이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길을 결정하게 했다. 디아코니세 교육을 받기 시작했던 무렵 만나 사랑에 빠진 운명적인 상대, 이수현씨와 살아가기 위해 이혼을 결정한다. 스스로 여자를 사랑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고, 이혼 과정은 외롭고 지난했다. 한인 커뮤니티 사람들이 “밤낮으로 전화를 해서 충고와 욕설을 번갈아가며 해댔다.” 비난에 힘들었던 그는 신학 공부를 접으려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들은 신학부의 은사가 그에게 “당신 스스로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당신을 받아들이겠어요?”라며 그를 설득했다.

화상 인터뷰를 하면서 디아코니세의 상징인 메달을 보여주는 김인선씨. 오른쪽이 안은별 인터뷰어. 안은별 제공
화상 인터뷰를 하면서 디아코니세의 상징인 메달을 보여주는 김인선씨. 오른쪽이 안은별 인터뷰어. 안은별 제공

“여기 계신 한국분들 윤리관으로 볼 때는, 제가 이혼하고 여자랑 산다니까 난리가 나는 거죠. 하하하. 욕 많이 먹었죠. 그렇지만 문제가 될 게 뭐 있어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건데. 마음이 떠난 관계를 끊지 못하고 매여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딱하죠. 뭐가 됐든 간에,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 봐야 후회가 없지 않겠어요?”

누구나 보편적으로 동등하게 존중 받는 독일의 인간관에 대해 말하면서 그가 내게 보여준 것은 디아코니세들이 목에 거는 십자가였다. 이전에 디아코니세들은 유니폼을 갖춰 입고 엄격한 공동체 생활을 하는 독신 여성 집단이었지만, 개혁이 이루어진 이후 이 메달만 착용하면 되었다. 물 표면에 돌을 던졌을 때 잔잔한 파문이 이는 모습을 나타낸 듯한 그 펜던트는 내가 알던 십자가의 틀을 깨는 디자인이었다.

이 모양은 스스로의 변화를 통해 사람들과 사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켜온 그의 인생 그 자체와 닮았다. 그가 공부를 하며 뜻을 품게 된 것은 독일로 이주해온 여성들과 독일에서 태어난 한인 2세를 돕는 일이었다. 1960~70년대, 광부와 간호사로 온 한인끼리 가정을 이룬 경우가 많았고, 각자 한국에서 가져와 ‘업데이트’가 멈춘 가부장적인 성역할 규범이 더 강해져 갈등부터 폭력까지 문제를 겪는 일이 많았다. 특히 1세들과 독일에서 태어난 2세들의 문화적 반목이 심했다. 가장 친밀한 영역에서 부딪히는 이문화 문제를 보다 보니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의 이주민들, 유학생들의 삶도 보이기 시작했다. 두 개의 독일을 가르던 벽이 무너졌을 때의 혼란과 동독 간호사들이 보였던 경계심도 시야에 들어왔고, 왕복조차 어려운 분단된 고국의 미래까지 생각하게 됐다.

2001년부터 시작된 호스피스 활동을 통해 자신도 마찬가지 운명인 ‘이방인으로 죽는 일’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 고민 끝에 노후 자금과 보험금을 헐어 설립한 ‘동행’ 활동으로 한국에도 다소 네트워크가 생겼고 방문할 일도 늘었다. 이주자들을 더 잘 상담하기 위해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 왔는지, 또 한국은 어떻게 변해 가고 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으니 관심을 갖고 봤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를 환영하지 않았던 곳,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엔 그야말로 아무도 없었던, 그래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각오로 등졌던 고국과의 관계는 오랜 공부를 거쳐 이렇게 재정립되었다.

김인선이라는 신체와 그 경험을 매개로, 글로벌한 이주의 시대, 많은 이방인들을 안은 독일과 한국이 마주본다. 그러나 아직 한국은 성소수자들에 대한 인식은 물론이고 이주자들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인권을 돌보는 데 있어서도 갈 길이 멀다. 지난 세밑, 캄보디아에서 온 여성 노동자 속헹씨가 비닐하우스에서 너무도 차가운 죽음을 맞았다. 참담한 표정으로 김인선씨는 말을 이어갔다.

“어디서 태어나 왔든, 누굴 사랑하든, 돈이 있든 없든, 인간은 그 자체만으로 존엄성을 누릴 권리가 있어요. 그런 면에 있어서 한국이 너무 안타깝고, 제가 할 일도 있다고 느껴요.”

2019년 6월1일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한 김인선씨. &lt;한겨레&gt; 자료사진
2019년 6월1일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한 김인선씨. <한겨레> 자료사진

자기 일생을 쓰기, 사회를 쓰기

같은 여자로서 시대를 잘못 타고 난 건 딱하지만 그렇다고 무책임함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던 어머니의 인생부터, 여성이 배제되어 온 성서 해석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던 석사논문, 그리고 한국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끔씩 이수현 씨가 화면 속에 등장해 셋이서 깔깔 웃는 순간도 많았다. 그의 어머니가 생전에 ‘나도 20년만 젊었으면 여자랑 살아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는데, 이 커플을 보고 있으니 과연 공감이 가는 얘기다.

이번 책은 항암 치료 중에 썼다. 그의 인생에 두 번째로 닥친 암이었다. 그런 이유도 있어 10년 전의 첫 책보다 더 진솔하게 쓴 것 같다고 말한다. 짧은 분량에 압축적인 인생사이지만, 나는 이 책이 거기 담긴 내용만이 아니라 그 ‘일대기를 쓴다’라는 행위로서 김인선의 중요한 퍼포먼스 작품이라고 본다. 본문 중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독일의 호스피스 교육 가운데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원봉사자들이 자신의 일대기를 정리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었다. 각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에 대한 입장과 관점을 정리해본 사람만이 죽음을 앞둔 이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교육이었다.’

“책 쓰면서 내 안에 있는 게 많이 정리가 됐어요. 글을 쓰니까 과거에 있었던 일들의 의미를 알겠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누구한테든지, 한 번씩 자신의 삶에 대해 써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순간순간 있었던 일들을 쓰다 보면 그게 하나의 ‘로망’이 되는 거죠. 그걸 몇 년 뒤 다시 들여다 보면, 다른 감정이 들 거고요.”

쓴다는 일은 단순히 있었던 일을 저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있었던 일을 앞으로 만들어 나갈 일들과의 관련 속에서 의미화함으로써, 시간적 과거를 전망으로 길어 올리는 일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적극적으로 발견하는 일이다. 앞으로도 계속 쓰고 싶다는 그에게 암이 재발할 가능성과 함께 살아간다는 건 큰 문제는 아니다. 그 일이 일어나면 일어나는대로 받아들일 거라고 말한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기보다 지금 당장 그를 가장 설레게 하는 건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다.

“저를 지금 설레게 하는 거요? 똥땡이(파트너 이수현 씨를 부르는 애칭)하고 돼지고기 김치찌개 먹는 거? 하하하하. 우리 집 오고 싶죠? 언제 일 만들어서 오세요.”

김인선씨와 파트너 이수현씨가 나치의 동성애자 탄압을 기리는 비석 앞에 서 있다. 사진 야지마 쓰카사
김인선씨와 파트너 이수현씨가 나치의 동성애자 탄압을 기리는 비석 앞에 서 있다. 사진 야지마 쓰카사

그는 몇 번이나 내게 “일본은 어때요?”라고 물었다. 일방적으로 말을 늘어놓기 보다 대화를 하려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면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는 게 그가 독일서 해 온 일이다.

일본의 외국인에 대한 배제주의는 내가 부동산에서 “집주인이 외국인은 안 된대요”라는 말을 한 집 걸러 한 집 꼴로 듣는 경험을,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하게 된 것과는 또 다른 문제다. 일본은 1980년대 이후의 국제화, 1990년대 이후의 고령화의 진전과 노동력 부족 속에서 적극적으로 외국인에게 문을 열었지만, 이들을 ‘뒷문’이나 ‘옆문’으로 들어오게 해 눈에 띄지 않게 노동만 하고 돌아갈 존재로 두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포섭하는 정책은 방기해왔다. 재일조선인 사회학자 한동현은 이를 ‘위장의 제도화’라고 표현하며, 이러한 헤이세이(1989~2019) 일본의 배제주의를 가장 왜곡된 형태로 보여주는 것이 조선학교를 둘러싼 상황이라 말한다. 조선학교는 2013년 북한에 대한 ‘국민감정’을 이유로 고교 무상화 교육 대상에서 배제된 데 이어, 최근 코로나19 감염 방지 대책 지원 사업과 학생에 대한 긴급 급부금 지원 사업에서도 제외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입장은 재일조선인 학생과 혼혈인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다룬 나이키 광고가 극심한 비난에 시달린 데서 그 단면을 볼 수 있는, ‘일본인은 차별하지 않는다’라고 굳게 믿는 사회적 감수성과 조응한다.

안은별
안은별

이런 곳에서 과연 ‘이방인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외롭지 않게 지원한다’라는, 김인선씨가 써 온 이야기가 쓰일 수 있을까. 어쩐지 지금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는 아직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며, 이제부터의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움직임들에 달려 있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게 된다면 힘을 보태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런 이야기들이다.

안은별 재일 연구자, 전 <프레시안> 기자

▶ 올해 1월1일, 한 여성의 자서전이 나왔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는 한국전쟁이 나던 해 태어나 자라고 22살에 독일로 이주해 70대인 지금까지 살고 있는 김인선씨의 일대기다. ‘호스피스 대모’ ‘70대 퀴어’ ‘독일 이주 여성’으로 진폭이 큰 삶만큼이나 서로 다른 조명을 받아온 그의 이야기를, 일본 도쿄대 대학원에서 ‘이동성’을 연구하고 있는 안은별 전 프레시안 기자가 인터뷰한 뒤 종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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