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온·오프 혼합 방식의 신년 기자회견을 열고 정국 이슈 및 올해 국정운영 방향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18일 진행된 문재인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엔 수어통역사가 배치되지 않았다. 청와대 관계자는 수어통역을 배치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저희가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송사와 같이 협의를 해 가면서 준비를 해왔다. 각 방송마다 수어 통역이 나갔다”고 밝혔다. 실제로 대통령 기자회견을 중계한 방송사들은 수어통역을 제공했다.
그러나 대통령 연설이나 기자회견에서 수어통역사 배치를 꾸준히 요구해온 장애인 단체들은 아쉬움을 표현한다. 법으로 수어를 국어와 동등한 언어로 규정한 만큼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게 ‘대통령 옆에 선 수화통역사’라는 게 이들의 의견이다.
2016년 제정된 한국수화언어법은 수어를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고유한 언어(제1조)”라고 정의한다. 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공공행사, 사법·행정 등의 절차, 공공시설 이용, 공영방송, 그 밖에 공익상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 수어통역을 지원해야 한다(제16조 제2항)”고 규정하고 있다. 농인(청각장애인)에게 음성 언어는 외국어나 마찬가지다. 농인들의 경우 문자 언어를 온전히 이해하는데도 어려움을 느낀다. 법으로 수어에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부여한 것은 일상생활에서 차별을 겪는 농인들의 정보접근권을 보장해 우리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끌어안으려는 정신이 담겨있다.
그러나 법으로 보장한 위상과 달리 이날 123분간 진행된 신년 기자회견에는 수어통역사가 배치되지 않았다. 앞서 지난 11일 대통령 신년사와 지난해 5월 취임 3주년 특별연설도 마찬가지였다. 장애인 인권단체들은 수년간 대통령 연설과 기자회견 등에 수어통역사를 배치해달라고 요구해왔다.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장애벽허물기)’은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 연설이나 기자회견을 할 때 옆에 수어통역사를 배치해달라”는 요청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 장애벽허물기는 “취임 3주년 특별연설 당시 농인들은 수어통역을 제공하는 방송사의 방송만 볼 수 있었다”며 “방송사마다 배치된 통역사가 다르다 보니 수어 표현이 달라 연설 내용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낳을 우려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 단체는 앞서 지난해 5월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대통령 비서실장을 상대로 같은 내용의 차별 진정을 내기도 했다.
시민들이 11일 오전 서울 중구 봉래동 서울역 대합실에서 문재인 대통령 신년사를 보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인권위는 연설을 동시 중계한 방송사 12곳 가운데 5곳이 수어통역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지난달 해당 진정을 기각했지만, 주요 방송국이 수어통역을 중계했더라도 공공행사를 개최한 청와대에 수어통역을 지원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청와대 주요 연설을 중계하거나 연설 영상을 누리집에 게시할 때 수어통역을 제공하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청와대의 수어통역은 다른 정부 부처에 견줘 뒤처진다. 2019년 12월2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정부 부처 가운데 처음으로 브리핑에 수어통역을 도입했고, 이후 보건복지부·행정안전부·교육부·국무조정실 등도 수어통역사를 배치했다. 지난해 2월부터 중앙방역대책본부와 중앙사고수습본부의 코로나19 브리핑에도 수어통역사가 배치돼 실시간으로 수어통역을 제공하고 있다. 국립국어원 자료를 보면, 지난해 공공부문에서 수어통역이 제공된 사례는 모두 777건으로 이 가운데 640건이 코로나19 관련 발표다. 국회도 지난해 8월부터 기자회견장 수어통역을 도입했다. 비용 등 현실적 어려움을 들어 수어통역을 제공하지 않던 우리 사회에 뒤늦게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지난해 9월10일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장에서 관계자들이 수어 통역사를 위한 비말차단칸막이를 설치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외국에서도 국가 지도자 공식 행사에 수어통역사를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2019년 3월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테러를 규탄하고 총기규제 법안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에 수어통역사를 대동해 눈길을 끌었다.
김철환 장애벽허물기 활동가는 이날 신년 기자회견에 대해 “공공부문에서 가장 모범을 보여야 하는 청와대가 농인들의 계속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아 안타깝다”며 “청와대가 수어통역사를 배치해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보여주고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에 기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공공수어 통역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김형배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 특수언어진흥과 학예연구관은 “지난해 말 청와대 행정관과 수어통역 제공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이번 기자회견에 수어통역사 배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의외”라며 “정부는 주요 정책 발표 시 농인의 알 권리 보장을 위해 수어통역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30일 장애벽허물기 기자회견에서 “수어가 대한민국의 언어라는 것을 대통령이 먼저 보여주어야 한다. 기자회견장에 대통령 옆에 수어통역사가 서 있는 것이 새해 소망”이라고 밝힌 농인 노만호(59)씨는 “올해도 새해 소망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김윤주 기자
ky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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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당시 노만호씨가 발표한 새해 소망 전문.
농인인 제 언어는 수어입니다.
지난 5월 문재인 대통령 취임 3주년 연설방송을 보다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뉴스 전문채널을 통해 방송을 보고 있었는데 수어통역이 없었습니다. 국민을 상대로 한 대통령의 연설에 수어통역이 없는 것에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으로서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중계방송을 했던 방송사 가운데 일부만 수어통역을 했다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한국수어법에는 수어가 국어와 동등하다고 명시되었는데, 대통령이 왜 법률을 지키지 않는지 말입니다.
저는 자라면서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수어를 사용한다고 놀림을 받기 일쑤였습니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수어로 많은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은행이나 병원에 혼자 가지 못했습니다. 가도 대화가 안 되니 동생이나 부모님과 같이 갔습니다. 동생이나 부모님은 제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제 문제를 처리해 주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나이 중년을 지나며 수어통역센터가 만들어졌습니다. 부족하지만 통역사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수어통역이 부족해 어려움이 있습니다. 수어에 대한 자긍심도 가지기 어렵습니다.
제 소원은 자라면서 받았던 차별을 농인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농인으로서 수어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싶습니다. 후배 농인들에게 그러한 자부심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와대부터 한국수어법을 지켜야 합니다. 수어가 소외계층을 지원하는 언어로 그치지 말고 대한민국의 언어라는 것을 대통령이 먼저 보여주어야 합니다. 기자회견을 할 때, 대국민 연설을 할 때 수어통역사를 옆에 세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대통령이 연설하는 옆에 수어통역사를 배치한다면 수어에 대한 인식도 더 높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수어에 대한 위상이 올라가고 저 같은 농인들의 자부심도 높아질 것입니다.
그것이 새해를 맞으며 제가 바라는 소망입니다. 신축년 연두 기자회견장에 문재인 대통령 옆에 수어통역사가 서 있는 것 말입니다. 새해에는 작은 소망이 꼭 이루어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