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짙은 그림자가 걷히지 않은 채 새해를 맞는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과 인식과 삶과 관계를 모두 바꿨다. 그동안 인류가 구축해온 유·무형의 자산과 가치와 체계와 질서를 코로나19는 하루아침에 허물어뜨렸다.
코로나19가 사라지더라도, 세상은 코로나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코로나19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2021년 초두, <한겨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코로나19 이후의 전망을 담은 석학과 전문가들의 특별기고 ‘2021, 11개의 질문’을 마련했다.
지난달 미국의 여러 정부 기관과 글로벌 기업들이 사이버 공격을 당했다. 러시아 해커 집단의 소행으로 추정될 뿐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일 코로나만큼 치명적인 컴퓨터 바이러스가 출현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공공기관과 은행을 마비시키고 스마트폰조차 먹통으로 만들어버리는 악성 코드가 창궐한다면? 정부가 온라인을 셧다운하면서 혼란이 극심해지고, 엄청난 경제적 손실이 발생할 것이다. 인터넷이 깔려 있는 세상에 팬데믹이 온 것, 월드와이드웹이 아직 건실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대면이 막힐 때 많은 부분을 비대면으로 보완할 수 있으니 말이다.
비대면의 역사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사람들이 직접 만나지 않고서 뭔가를 주고받는 것으로 말한다면, 아득한 옛날 누군가가 제3자를 통해 물건을 전달하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또는 적어도 문자가 사용되면서부터 확실하게 비대면 회로가 열렸다고 할 수 있다.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소통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15세기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비대면 소통은 급속하게 늘어났고, 19세기에 접어들어 전신과 전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비약적으로 팽창했다. 그에 이어 20세기에 등장한 라디오와 텔레비전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터넷이 비대면 공간의 빅뱅을 일으켰다.
이처럼 비대면의 영역은 코로나19 이전부터 꾸준하게 팽창하고 있었다. 팬데믹은 그 흐름을 가속화하고 전면화하면서 일상의 문법을 바꾸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인간관계다. 엄격한 방역 조치 때문에 동창 모임이나 친목회, 회식 자리, 경조사 왕래, 종교 집회 등이 대폭 줄어들면서 인맥의 다이어트가 이뤄지는 듯하다. 그야말로 ‘사회적’ 거리두기의 기술이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것이다. 거리두기는 가족들 사이에서도 미덕이 될 때가 많다. 잠시 멈춤으로 집 안에서 하루 종일 부대끼는 이들은 그것을 실감한다.
대면의 축소와 비대면의 확장 속에서 사회적 네트워크는 꾸준하게 변용되어갈 가능성이 높다. 의무감으로 참여하는 모임이나 관성적으로 맺어온 친분이 줄어드는 반면, 각자 자유롭게 관계를 빚어가는 과정에서 의외의 알음알이들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런 흐름과 맞물려 (‘끈끈한 연대’가 아닌) ‘느슨한 연대’가 키워드로 떠오른다. 거기에 결부되는 개념으로 ‘낯선 사람 효과’가 있는데, 잘 모르는 타인이 오히려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업을 시작하거나 직장을 바꾸려고 할 때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서 조언을 얻는 편이 성공 확률이 높다고 한다. 친숙한 사람들끼리는 경험과 정보와 관점이 비슷해서 놓치기 쉬운 맹점들을 낯선 사람들이 짚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신이나 소속 집단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하다. 선행과 호의도 생면부지의 관계에서 베풀어질 때 한결 뭉클하지 않은가.
다른 한편 코로나 국면에서 온라인 공간은 한결 다채로워졌다. 업무, 인터뷰, 간담회, 동호회, 학교 수업, 공개 강연, 심포지엄 등에서 급속하게 사용이 늘어난 화상회의 시스템은 여러 사람이 실시간으로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기에 기존의 에스엔에스(SNS)보다 볼륨이 크다. 지난달 나는 줌으로 열리는 송년 모임에 몇 차례 참여했는데, 누구든 호스트가 될 수 있고 참가자들이 언제 어디에서든 쉽게 접속할 수 있어서 그런지 여느 연말보다 오히려 더 많은 지인들을 면회했다. 그런가 하면 공적인 업무나 회의에서는 화상 프로그램이 소통의 질을 높여주는 측면이 있는데, 격식과 눈치 같은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내용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면 공간의 축소가 긍정적인 효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한국처럼 만남이 중요하고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사회에서 오프라인 모임의 제한이 장기화되면, 고립과 단절로 인한 우울감이 남다르기 마련이다. 특히 홀로 지내는 어르신이나 요양원에서 가족을 오랫동안 면회하지 못하는 경우 더욱 외롭고 답답하다. 발달장애인들이 코로나로 인해 오랫동안 집에만 머물면서 퇴행 증상을 보인다고 하는데, 비장애인도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으면 인간적인 역량이 감퇴하기 마련이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하면서 정신의 발달이 늦어질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디지털 과몰입으로 사회적 지능의 훼손이 우려되었는데, 코로나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른들도 사이버 세계에 탐닉하면 소통과 공감의 촉이 무디어질 수밖에 없다. 온라인에서는 미묘한 감정과 섬세한 문맥을 전달하고 이해하는 데 한계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으로 함께 있으면서 얼굴을 마주할 때 타인의 존엄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다.
비대면 세계와 대면의 세계의 조화는 사회 집단의 차원에서 더욱 절실하다. 몇 해 전 예멘 난민들이 제주도에 들어왔을 때 그들을 잠재적 범죄집단으로 여겨 수용을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었는데, 여론조사를 해보니 젊은이보다 50대 생산·서비스직 종사자들이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해 조사 분석 담당자는 그런 외국인 노동자를 접할 기회가 많아서 선입견이 적은 것으로 해석했다.(<한겨레> 2018년 8월28일 ‘난민에 가장 포용적인 ‘블루칼라·50대·진보성향’’) 사람을 만나지 않고 골방에서 온라인에 몰두할수록 편견이 두터워진다. 로그인과 로그아웃이 유연하게 교차하고, 대면과 비대면은 순환해야 한다. 밀실과 광장을 잇는 통로와 플랫폼이 넓어야 한다. 그런 균형 속에서 인간관계의 리듬이 생겨난다.
인간관계는 행복의 핵심 요소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으로 다져지는가. 얼마나 자주 만나는가 하는 ‘빈도’보다, 얼마나 깊이 소통하는가 하는 ‘밀도’가 더 중요하다.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대화로 맴돌지 않고 인격의 중심으로 오가는 만남 말이다. 핵심은 정성이다. 내 앞에 있는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응시하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무심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어쩌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각자 스마트폰에 신경 쓰느라 서로를 홀대한다. 일의 세계에서도 그렇다. 빡빡한 진료 스케줄에 쫓겨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의사처럼, 효율적인 과업 수행에 치우쳐 대면의 교감을 놓치는 상황이 종종 벌어진다.
비대면은 코로나 때문에 갑자기 열린 것이 아니다. 온라인 공간이 확대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사실상의 비대면이 늘어나고 있었다. 인터넷카페에서 처음 만나 활발하게 대화를 나눠온 청소년들이 캠프에 참석해 둘러앉게 되었는데 말문 열기를 무척 어색해하더라는 이야기를 어느 시민단체 실무자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대면과 비대면의 이분법은 적절하지 않다. 몸으로 함께 있지만 저마다의 개인 미디어에 심취해 있는 것. 몸은 떨어져 있지만 화상 회의실에서 서로의 눈길을 오롯이 응시하며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이 두 상황을 각각 대면과 비대면으로 간단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대면의 반대말은 비대면이 아니라, 외면이다.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 눈에 안 보이면 마음도 멀어진다. 마음이 담긴 눈길로 타인과 연결될 때 삶은 단단해진다. 몸으로 함께 있든 따로 있든, 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말한 ‘그것’이 아닌 ‘너’로 서로를 온전히 맞아들이는 환대의 시공간을 빚어낼 수 있는가. 존재의 마주침이 빚어낼 수도 있는 갈등, 민낯에 드리운 그늘을 직면할 용기가 있는가. 우리는 어떤 생각과 정서를 공유하면서 무슨 경험을 함께 창조하는가. 비대면 시대는 역설적으로 대면의 본질을 되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