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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어느 나라 출신이든 우린 같은 ‘사람’인데요

등록 2021-01-02 17:31수정 2021-01-02 17:33

[토요판] 이란주의 할 말 많은 눈동자
⑬ 청년 다니엘

파키스탄인 아빠 한국인 엄마
아기 땐 파키스탄에서 자랐죠
엄마는 집을 나가 오지 않았고
걱정 많은 아빠 출장길에 동행

늦게 간 고등학교서 공부 몰두
군대 가니 내 체취 불편해해
편견과 콤플렉스 극복해왔지만
‘다문화’ 시선은 이해 어려워

다니엘(23)은 1년8개월간 육군 복무를 마치고 지난여름 전역한 청년이다. 한국인 어머니와 파키스탄 출신 귀화 한국인 아버지를 두었으며, 유아 시절을 파키스탄에서 보내는 등 남다른 성장 과정을 거쳤다.

방심하면 어김없이 터지는 폭탄

군에서 전역하고 사회에 나와 보니 온 세상이 다 빛나 보였어요. 그 해방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의지 만렙 상태로 백 군데쯤 이력서를 넣었어요. 그중 열 회사에서 면접을 봤고, 한 회사에서는 신입사원 교육까지 받았어요. 그 회사는 아주 특이한 회사였어요. 부동산 회사에서 전표 정리 직원을 뽑는다고 해서 서류를 넣었는데, 면접을 통과한 후에 부동산 투자에 대한 교육을 며칠 받았어요. 3일째 되는 날 회사로 갔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티엠(텔레마케팅) 업무를 하고 있더군요. 아무에게나 전화를 걸어 좋은 땅 있으니 투자하라고 권하는, 생소하고 믿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뜨악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팀장이 우리를 지하주차장으로 데려갔어요. 즐비하게 서 있는 외제차. 이런 차 몰고 싶지 않냐, 너희도 2년이면 나처럼 팀장 자리에 올라올 수 있다, 사탕발림이 끊임없이 이어졌어요. 사실 잠깐 혹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아닌 거예요. 그렇게 쉬운 거라면 줄줄이 앉아서 티엠 업무를 하던 그 많은 사람들은 뭐란 말인가요. 사기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다음날 출근을 안 했어요. 그 뒤로 더 열심히 구직 활동을 해서 얼마 전 사무용 복합기를 다루는 회사에 취직해서 다니고 있어요. 아주 작고 따뜻해서 가족 같은 느낌이 드는 회사죠.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아기 때 파키스탄에 보내져 할머니와 고모 손에서 자랐어요. 부모님이 나를 키우며 일하기 버거워서 보냈던 것 같아요. 우르두어를 조잘조잘하다가 다섯살에 돌아와 한국어를 새로 익히며 학교에 다녔어요. 초등학생 시절은 말 그대로 폭탄을 안고 산 시기였어요. 내 사춘기가 격했나 싶겠지만 폭탄은 내가 아니라 부모님이었어요. 부모님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두 분은 자주 싸웠어요. 그냥 말다툼이 아니라 크게 소리 지르고 뭔가 깨지고 부서지는 싸움. 아침부터 낮까지 조용해서, 오늘은 안 터지나 봐, 잠깐 방심하면 밤에는 어김없이 터지는 폭탄. 나는 어쩔 줄 몰랐어요. 불안한 마음으로 잠들었다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에 깨어나, 나는 꼼짝도 못 하고 속으로만 망설였어요. 내가 깨었다는 것을 알려야 할까, 그냥 자는 척 가만있어야 할까. 망설임이 길어지면서 나도 그 상황에 익숙해졌어요. 저러고 살 바에야 따로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만약 헤어지게 되면 나는 누구랑 살아야 할까. 나는 혼자 묻고 답했어요. 처음에는 엄마랑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불쌍해 보이고 아빠에 대한 반감이 커지던 중이었으니까요. 어느 날 진짜로 엄마가 나에게 물었어요. 누구랑 살래? 그 뒤로 자주 반복되는 질문. 내 대답은 계속 ‘엄마’였는데 중학생이 되면서 ‘아빠’로 바뀌었어요. 한국에 가족이 없는 아빠를 두고 나까지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대답 후 엄마가 집을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불끈 후회가 올라와요. 그때 내가 말렸더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지도 몰라, 가슴 아픈 후회, 막연하고 늦은 후회. 한동안 아빠랑 둘이 살다가 새엄마를 맞았어요.

잊어버린 우르두어는 찾았지만

집에서뿐만 아니라 학교생활도 곤혹스러웠어요. 쉬는 시간마다 담배 피우러 내려가는 친구들, 틈만 나면 싸워대는 애들 때문에 매일 싸움 말리는 게 일이었어요. 우리는 한데 묶여 ‘꼴통 학교’였고 다 ‘꼴통들’이었어요. 그때는 그것이 모든 중학교의 일반적인 모습인 줄 알았어요. 고등학교는 이보다 더 심각하겠지, 각오해야겠군.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특성화고등학교 입학을 기다리던 12월, 나는 아빠의 긴 출장길에 억지로 끌려갔어요.

아빠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는 했어요. 아빠가 말레이시아로 출장 가 있던 중2 때 어느 날, 나는 새엄마에게 억울한 꾸중을 듣고 집을 나갔어요. 너무 화나고 집에 있기 싫었어요. 하루를 밖에서 버티고 다음날 집에 들어갔는데, 내 가출 소식을 들은 아빠가 그 하루 만에 득달같이 날아와 있었어요. 꺼뒀던 내 전화기에는 아빠 번호가 수십번 찍혀 있었고요. 그 뒤로 내가 삐뚤어질까 봐 노심초사한 아빠는 출장길에 나를 자주 데리고 다녔어요. 나는 그게 끔찍이 싫었고요. 학교도 못 가고 내 생활이 다 깨지고 낯선 곳에서 아빠만 기다려야 하는 답답한 시간이 아주 죽을 맛이었거든요. 그 12월엔 파키스탄으로 끌려갔어요. 다섯살 이후로 처음 만난 고모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어요. 다니엘이 왜 내 말을 못 알아듣지? 다 까먹어서 그렇지, 아빠 대답. 첫 언어였던 우르두어를 다 잊었던 나는 대가족의 애정 어린 참견과 뒷담화 문화 속에 단어를 하나씩 기억해냈어요. 신기했어요. 무언가 말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그 의미가 짐작되는 거예요. 우르두어를 되살리는 재미가 있기는 했지만,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몸살을 했어요.

파키스탄 가족들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한국보다 여기가 낫지, 한국에 뭐 하러 가? 옆집 일본에서 살다 온 사람도 일본보다 여기가 낫다고 하던데, 도대체 너는 왜 그래? 여기서 자랐으면 안 그랬을 텐데, 쟤 엄마가 데려가는 바람에 저렇게 된 거지. 엄마를 닮아서 한국 타령 하는 거야, 다 쟤 엄마 때문이야. 지금 돌아보면 별것도 아닌 그런 말들이 그때는 왜 그렇게 싫었을까요. 특히 엄마 얘기! 이죽거리는 사촌과 맞붙어 드잡이까지 한 적도 있어요. 나는 가족들 사이에 온전히 끼지 못했어요.

아빠를 졸라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입학 시기를 왕창 놓친 나는 그다음 해에야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늦은 만큼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걱정은 한층 깊어졌어요. 중학교 때보다 분명 더 거칠어졌을 애들을 또 어떻게 견디나, 내 나이가 한살 많다는 것을 들키면 그게 또 콤플렉스가 되어 내 자존심을 갉아먹겠지, 뭐라도 보험을 들어놔야 하지 않을까, 성적이 좋으면 지내기 나을지도 몰라, 그래 성적을 올리자. 그런 이유로 중학교 때는 손놓고 있던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어요. 마음을 꽁꽁 닫아걸고 애들하고 눈도 잘 안 마주쳤어요. 그런데 참 이상했어요. 이 학교 애들은 싸우지도 않고, 완전히 말도 안 되는 드립(말장난)을 쳐도 서로 잘 받아주는 거예요. 중학교에서라면 어림없을 일이죠. 이상한 일은 계속 이어졌어요. 내 중간고사 성적이 좋으니까 애들이 어려운 문제를 나한테 물어보기 시작했어요. 스르륵 다가와 웃는 얼굴로, 이거 어떻게 풀어? 사람이 아무리 마음을 닫아둬도 자꾸 와서 말을 거니까 틈이 생기는 거예요. 그게 어느 순간 확 터지면서 친구가 한두명씩 늘어났어요. 그러다 여자친구까지 생기면서 얼어 있던 내 마음이 녹았나 봐요. 내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2학년 때 알았어요. 독후감 숙제를 하다가 전에 썼던 것에서 참고할 게 있을까 싶어 예전 독후감을 펴봤어요. 거기서 다시 만난 1년 전의 내 마음은 고독하고 어두운 철학자였어요. 내가 정녕 이랬더란 말이야? 2학년 돼서 쓴 글에서는 그런 느낌이 덜하고 밝고 희망적인 마음이 읽혔어요. 여자친구도 나에게 좋은 영향을 많이 줬어요. 밝은 친구거든요. 고1 때부터 지금까지 7년째 만나고 있는데, 군대 있을 때 매주 면회 오더니 그걸 내세워 요즘 큰소리를 땅땅 치고 있어요.

‘다문화’를 왜 부정적으로 보죠?

사실은 입대할 때도 두려운 마음이 컸어요. 영화에 나오는 군대 부조리도 그렇고, ‘다문화’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안 좋은 것도 걱정이었어요. ‘다문화’ 관련된 뉴스를 유심히 보곤 했는데, 기사마다 잔뜩 달린 이상한 댓글을 많이 봤어요. 댓글에 댓글로 줄줄 이어지는 비하와 욕설과 사실 날조가 아주 충격적이었거든요. 그런 편견이 이어져 군대에서도 나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겪게 될까 봐 마음이 조였어요. 나를 잘 숨겨야겠다, 외모는 별로 티가 안 나니까 내가 말만 조심하면 될 거야. 그런데 웬걸요, 훈련소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아 갔더니 중대장이 신병 상담하면서, 다니엘 너 다문화가정이던데 힘든 일 없니, 하고 묻는 거예요. 헉, 이미 다 알고 있네! 다행히 윗사람들만 알고 동기나 선배들은 모르고 있어서 안심했어요. 그런데 또 이름이 문제였어요. 이름이 왜 그래? 기독교야? 천주교야? 자꾸 묻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털어놨어요. 파키스탄에 계신 할머니가 지어주신 거야. 할머니가 파키스탄에? 다들 놀랐죠. 나중에 일을 겪고 보니 얼렁뚱땅 털어놓기를 잘했다 싶어요. 우리 동기 중에 나이가 많고 친구들이 잘 따르는 형이 있었어요. 여름이 가까워지던 어느 날, 그 형이 나를 부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어요. 너한테 체취가 있는데 알고 있냐고. 친구들이 너를 싫어하는 게 아니고 냄새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니까 얘기 꺼내보라고 부탁하더라고, 이런 말 미안하다고. 형이 나를 감싸주는 느낌도 같이 왔어요. 하지만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나한테서 냄새가? 그런 말 처음 들었는데! 형이 알려준 땀냄새제거제를 써 봤는데 그래도 냄새가 난대요. 난감했어요. 이것저것 여러 방법을 다 섞어 봤어요. 샤워하자마자 땀냄새제거제 사용하고, 입을 옷에는 미리 섬유유연제 잔뜩 뿌려놓고, 빨래할 때도 섬유유연제를 듬뿍 사용했어요. 이제 꽃향기가 나네, 하며 친구들이 좋아했어요. 처음에는 되게 상처받고 화도 났는데 차분히 생각해보니 친구들이 고마웠어요. 친구들에게는 그 방법밖에 없었겠구나, 그게 최선이었던 거야. 만약 내 아버지가 외국인이라는 점을 미리 말하지 않았더라면, 체취 이야기를 나에게 어떻게 전했을까요, 모르긴 해도 아마 더 상처 되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군대에서 배운 게 많아요. 특히 사람 관계요. 처음에는 불편하거나 부조리 같은 것을 겪으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마음의 편지’에 썼어요. 작은 일도 거기에 쓰면 저절로 커진다는 것을 처음엔 몰랐거든요. 몇번 일이 꼬였어요. 그다음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과자 한 봉지 들고 당사자를 찾아갔어요. ‘마음의 편지’보다 과자 앞에서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것이 확실히 더 좋았어요. 그렇게 깨지고 경험하며 하나씩 배우고 있어요. 내 콤플렉스와 약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고 있어요. 막상 드러내놓고 보면 약점도 아닌데 나 혼자만 숨기고 싶었던 게 많았어요. 그걸 펼쳐놓으면 마음이 편해지는데 말입니다. 아빠가 파키스탄 사람인 것도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것도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성장시키는 동력이었어요. 어릴 적에는 힘겨웠지만 그 과정을 거치며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니까요.

그런데 지금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어요. 내 아버지 나라이자 내 나라이기도 한 파키스탄에 대해서, 또 ‘다문화’에 대해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싫어하는 걸까요? 그런 미움은 정말 의미 없는 것 아닌가요? 싫어한다고 어디로 사라질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그런 것을 보면 ‘부먹’, ‘찍먹’ 논쟁이 떠올라요. 세상에는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 먹는 사람도 있고 찍어 먹는 사람도 있잖아요. 너는 왜 나처럼 안 먹느냐고 비난해봤자 소용없죠. 서로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니까요. 다문화든 아니든, 어느 나라 출신이든, 외모가 어떻든 나와 다르다고 해서 미워하고 싸워야 할 이유가 대체 뭐가 있어요. 우린 다 똑같이 ‘사람’인데요.

▶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일꾼. 국경을 넘어와 새 삶을 꾸리고 있는 이주민들은 저마다 깊은 사연이 있다. 떠나온 사회와 살아내야 할 사회에 하고픈 말이 많지만 그 말은 발화되지 못한 채 눈동자에 잠기곤 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내 당사자 시점으로 전한다. 4주에 한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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