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향한다.
“점심 뭐 먹어. 어디야?” 당연히 집이겠거니 하고 던진 문자였다. 하지만 집에 있겠거니 했던 친구는 영 생뚱맞은 응답을 보내왔다. “아, 나 지금 산이야.” “무슨 소리야. 회사 그만뒀니?”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나에게 그는 산 정상의 멋진 풍경이 담긴 파노라마 사진을 보내왔다. 엇, 진짜잖아? 집에 있으려니 너무 답답하고 힘들어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뒷산으로 산책을 다녀왔단다. 재택근무의 답답함에 진저리치다 했던 선택이었는데, 산의 재미에 푹 빠지게 됐단 말도 덧붙였다.
공감한다. 재택근무는 지겹다. 물론 돈을 버는 모든 일은 어느 정도의 지겨움과 싸우는 걸 기본값으로 가지고 있다지만, 홀로 방 안에 꼼짝없이 앉아 8시간 근무를 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동료의 숨소리, 서류철 넘기는 소리, 커피를 가지러 가는 동료의 발소리,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적절하게 배경에 깔려 있던 사무실에서는 노력하지 않아도 서로의 무드와 업무 진행 상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각자의 공간에 고립되어 있는 요사이엔 그런 ‘느낌’의 포착이 어렵다. 점심시간 역시 영 만족스럽지 않긴 마찬가지다. 매일 내 손으로 식사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한다니! 이건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를 찍으면서 직장생활을 병행하는 격이 아닌가. 게다가 매일 숙명적으로 ‘혼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엄청난 외향인간인 나의 천성에 극도로 어긋나는 일이다. 산에는 이 지겨움과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는 너른 공간이 있다. 약간 위험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을 멀찍이 구경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면서 적절한 신체활동을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간은 사실 집 아니면 산밖에 없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산에 왜 가느냐고. 답은 크게 세가지로 갈렸다. 우선, 순전히 운동 목적으로 산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상당했다. 운동을 원래 즐겨 하던 이들은 모든 체육시설이 문을 닫은 지금의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하고 있었다. 몸 움직이는 게 습관이 되어 있던 이들에겐 ‘홈트’(홈트레이닝)조차도 충분치 않다고 했다. 유산소와 무산소가 적절히 섞인 등산이 최선의 답이라는 것이다. 두번째 그룹은 앞서 말했던 재택근무 하다 우연히 산의 재미에 빠진 이들이었다. 재택을 하다 보니 밖에 절대로 나가지 않게 되고, 운동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다 보니 근처 산을 오르게 됐다는 것이다. 산책을 하러 나갈 만한 공원이 근처에 없거나, 있더라도 너무 사람이 많아 사람이 별로 없는 낮 시간을 이용해 등산을 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고통으로 고통을 잊는 거죠. 그리고 가보니까 생각보다 풍경이 너무 멋져서 중독되는 면이 있더라고요.” 세번째 그룹은, 인스타그램의 재미에 푹 빠진 이들이었다. “솔직히 각 잡고 등산 갈 때랑, 가볍게 갈 때랑 착장부터 달라요. 인스타그램에 사진 올리려고 갈 땐, 레깅스에 니삭스까지 멋지게 갖추고 올라가죠.” 한때 등산은 온전히 중년들의 사랑을 받는 운동이었고, 최근에는 힙스터 밀레니얼들의 취미가 됐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등산은 소수 ‘힙스터’들만의 것은 아니게 됐다. 재택근무에 지친 청년들, 운동하고 싶지만 적절한 공간을 찾지 못한 이들, 답답함에 지친 외향인들 모두 이젠 산으로 향한다.
산은 공짜다. 그 어느 때보다 ‘공간’이 값비싸진 시대에 흔치 않은 자원이다. 인간이 점유할 수 있는 공간 그 자체의 값도 비싸지만, 이제는 어떤 공간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면서 공간의 절대적인 가치 역시 높아졌다. 우리는 모두 각자에게 할애된 공간에서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됐다. 누군가는 부모와 함께 사는 42평 아파트에서 ‘홈트’를 하고, 다른 누군가는 좌로 한번 우로 한번 구를 수도 없는 자취 원룸의 자투리 바닥에서 앉았다 일어서기를 여러번 반복하는 것 외엔 큰 선택지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산에 간다’는 건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말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일부에게는 신체 건강뿐 아니라 정신 건강과 딱 맞붙어 있는 명제다. 산은 열려 있는 몇 안 되는 너른 공간이다. 공공체육시설도, 일반체육시설도 문을 닫은 상황에서 산으로 향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진 까닭이다.
줌으로 모인다.
“그땐 그랬지, 참 좋았지.” 추억하는 말은 잔뜩이지만 기억할 거리는 부족했던 송년회는 옛말이다. “그땐 이랬지. 참 좋았네.” 추억의 자료를 직접 꺼내놓고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것이 요즘의 랜선 송년회의 특성이다. 현장 녹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4시간이든 5시간이든, 녹화 버튼 하나만 누르면 누가 무슨 얘기를 했고 뭘 먹으면서 놀았는지 죄다 기록이 가능해졌다. 다름 아닌 ‘줌년회’ 얘기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한창인데다 5인 이상 모임이 금지된 요즘, ‘줌년회’(Zoom+송년회: 회상회의 플랫폼 ‘줌’으로 하는 송년회)가 아니면 사람 얼굴 구경하기도 힘든 시대가 됐다. 다들 줌에 푹 빠졌다. 오프라인으로 만나기는 어렵지만, 함께하고 싶은 마음, 함께 술잔 맞부딪치는 척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니까. 하지만 밀레니얼의 줌년회는 좀 특별하다. 식순을 세세하게 짜서 진행하는 건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게임이 빠지지 않는다.
요즘 가장 유행하는 ‘줌년회’의 하이라이트 놀이는 다름 아닌 ‘라이어 게임’이다. 트위터로 송년회 식순 프레젠테이션을 자랑하며 아르티(RT)를 탄 모임 ‘성사정친’(성격은 사뭇 다르지만 정이 많은 친구들)은 이름만 들으면 4학년 5반이나 5학년 2반으로 자신을 지칭하는 중년 모임 같은 느낌도 나지만, 실은 20대 친구들의 모임이다. 피피티(PPT) 자료까지 만들며 열성적으로 송년회를 진행했던 이들의 식순에도 라이어 게임이 빠지지 않았다. 어쩌다 이 게임을 선정하게 됐냐는 질문에 “요즘 유행이 아니냐.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 <신서유기>를 보고 알게 됐는데, 무엇보다 줌으로 하기 가장 편한 게임이라 선택하게 됐다”고 답했다. 라이어 게임은 숨어 있는 한명의 라이어를 골라내는 게 목표인 게임이다. ‘직업’과 같은 큰 카테고리를 구성원 모두에게 알려주고 한명의 라이어를 뺀 모두에게 ‘해녀’ 같은 상세 제시어를 알려준다. 돌아가면서 해당 제시어에 대한 특징을 설명해야 하는데, 라이어는 주변 눈치를 보며 제시어를 적절하게 설명하게 된다. “내가 한때 꿈꿨던 직업이야” “물을 가까이하는 직업이야” 하는 식으로 설명하다 보면 누가 가장 어색한 설명을 하고 있는지 맞힐 수 있다. 직접 얼굴 맞대고 하는 것 못지않게 재미와 웃음이 터진다.
색다른 배경화면으로 재미를 더할 수 있단 점도 줌 송년회의 특징이다. 배경화면은 현실을 감춰주기도 한다. 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꾀죄죄한 벽지나 좁은 방의 누추함도 배경으로는 쉽게 가릴 수 있다. 함께 모여 하하호호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땐 몰랐던 부분들이, 언택트 시대엔 꽤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다. 모여 있어서 뭉뚱그려지던 부분들이 각자의 집에선 좀 더 생생해진다. 점유하고 있는 개인 공간의 크기, 질, 안락함 같은 것들이 아름다운 줌 화면으로 아슬아슬하게 가려진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도 줌으로 만난다. 특별한 기술들, 그리고 연결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줌년회 하는 날이면, 친구는 마치 곁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술잔을 얼른 채우라”며 나를 닦달한다. 만나서 네다섯시간을 쉬지 않고 떠들듯이, 랜선 송년회도 밤을 새우며 계속된다. 12월31일에도, 1월1일에도, 어쩌면 2021년의 남은 계절들에도 우리는 줌으로 만나게 될 것 같다.
천다민 뉴닉 에디터
▶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들은 정보기술(IT)에 능하고 개성이 강한 특징이 있다고 분석된다. 부당한 일에 적극 목소리를 내면서 앞날에 대한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이들이기도 하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툭하면 가르치려는 ‘라떼 세대’는 모르는 밀레니얼 세대의 문화를 소개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