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시절 긴급조치 피해자인 고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이 인정됐다. 긴급조치는 ‘국가 통치행위’여서 수사·재판 과정에서 불법행위가 입증되지 않는 한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양승태 대법원’ 판례를 뒤집는 다수의 하급심 판결 중 하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41부(재판장 정도영)는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불법구금됐던 고 김 전 관장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1억4천여만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고 14일 밝혔다. 1975년 이화여대 미술대학 전임강사로 일하던 김 전 관장은 대학 후배였던 김지하씨의 양심선언문을 소지·배포(긴급조치 9호 위반)하고, 같은 해 반정부 학생시위 주도자였던 당시 서울대생 장만철(영화감독 장선우)씨 등을 자신의 집에 숨겨준 혐의(범인은닉)로 불법체포됐다. 김 전 관장은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고 풀려났으나 항소심에서 선고유예로 감형됐다. 문재인 정부 출범 뒤인 2017년 10월 과거사 정리 작업의 일환으로 검찰이 긴급조치 피해 사건의 재심을 직권으로 청구했고 김 전 관장은 2018년 11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김 전 관장 사망 뒤 유족들은 2019년 6월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에 재판부는 긴급조치는 총체적 불법행위라며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유신헌법에 기초하더라도 명백히 위헌적인 내용의 긴급조치 발령과 그에 따른 후속조치라는 일련의 공무집행 범위는 법질서 전체의 관점에서 위법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긴급조치의 선포와 그에 따른 수사, 재판, 형 집행 등 일련의 국가작용에서 불법성의 핵심은 긴급조치 자체에 있다”며 피해자들에게 수사기관의 가혹행위 등을 따로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이어 수사과정에서 이뤄진 김 전 원장에 대한 가혹 행위 등 위법행위와 유죄 판결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해 국가배상책임을 거듭 인정했다. ‘긴급조치 자체가 위헌·위법’이라며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사건이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된 상황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하급심 판결이 계속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을 대리한 이정일 변호사는 “지난 7월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한 항소심 첫 판결도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대법원에서 항소심 판단을 인정할지 기로에 선 상황에서 이를 따르는 하급심 판결이 이어지고 있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단이 더욱 주목된다”고 강조했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