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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나밖에 없는 줄 알았어요”…벽장 열고 세상에 나온 농인 성소수자들

등록 2020-09-21 10:30수정 2020-09-21 10:34

우지양씨 30년 숨어 살다시피
같은 처지 만나본 적 없었는데
퀴어축제 부스 준비하며 연대
“2023년 세계농아인대회 준비”
‘한국농인엘지비티 설립준비위원회’ 활동가 지양(왼쪽)과 보석이 지난 1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서울인권영화제 사무실에서 세계 공용 수어로 `사랑해'를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성소수자 관련 한국수어 개발 등 농인 성소수자의 인권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한국농인엘지비티 설립준비위원회’ 활동가 지양(왼쪽)과 보석이 지난 1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서울인권영화제 사무실에서 세계 공용 수어로 `사랑해'를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성소수자 관련 한국수어 개발 등 농인 성소수자의 인권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세상에 나밖에 없는 줄 알았어요.”

우지양씨는 농인이다. 그리고 동성애자다. 그는 30년을 살아오는 동안 내내 “숨어서 지냈다”고 했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를 한번도 만나본 적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모르는 사이 잠시 스쳤거나 혹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농인 성소수자’라고 밝히는 이는 없었다. 이후 청인인 김보석씨를 만나게 됐을 때 보석씨는 지양씨가 동성애자라는 걸 한눈에 알아본 반면 지양씨는 그러지 못했던 것도 “워낙 축적된 데이터가 없어서”였다.

그러던 중 지난해 일본 퀴어문화축제에서 지양씨는 자신의 세계가 한순간 넓어지는 경험을 했다. 현지 농인 성소수자 단체가 부스를 열어 청인 방문객들에게 ‘게이’, ‘레즈비언’을 뜻하는 수어를 가르쳐주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난해 가을 그는 지역 퀴어문화축제를 찾아가 농인 성소수자를 위한 부스를 열었다. 수어 통역을 요구했지만 주최 쪽은 “지방엔 수어통역사가 없어서 어렵다”는 말을 반복했고, 결국 그는 혼자서 통역 인력까지 구하며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한국의 농인 성소수자에게도 동지가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농인 성소수자 인권단체인 ‘한국농인엘지비티(LGBT)’의 활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농인인 지양씨에 이어 코다(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 자녀)인 보석씨 등 “농인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장벽 없이 살아갈 수 있길” 꿈꾸는 활동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한국농인엘지비티 설립준비위원회’ 활동가 지양(오른쪽부터)과 `보석이 지난 1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서울인권영화제 사무실에서 수어통역사들과 함께 인터뷰하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한국농인엘지비티 설립준비위원회’ 활동가 지양(오른쪽부터)과 `보석이 지난 1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서울인권영화제 사무실에서 수어통역사들과 함께 인터뷰하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보석씨와 지양씨는 “농인 사회는 청인 사회보다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더 부족한 편”이라고 털어놓았다. 성소수자의 존재가 아직 수면 위로 많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더러, 한국 수어엔 남성 동성애자를 ‘항문성교 하는 사람’으로, 여성 동성애자를 ‘신체를 비비는 사람’으로 표현하는 등 차별적인 시각이 녹아 있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농인 단체에서 강연이 갑자기 취소된 적도 있다. 수어통역사가 이들의 말을 전달하는 대신 “왜 남자를 좋아하느냐”고 묻거나 아예 통역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보석씨는 특히 “농인 성소수자도 안전하게 교류할 수 있는 곳이 생겼으면 좋겠다. 한국농인엘지비티가 그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농인엘지비티는 지난해부터 농인 성소수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19 확산세가 커지며 성소수자 혐오가 불거졌을 땐 농인 성소수자를 위한 비상연락망을 구축했고, 농·청인 성소수자가 함께 모이는 오픈스터디를 열어 혐오와 차별의 경험을 나누기도 했다. “수어는 옆에서 얘기해도 눈으로 보이거든요. 여기저기서 ‘다른 친구들도 데려와야겠다’는 말이 보일 때마다 뿌듯했어요.”(보석) “청인 사회에 자리잡은 성소수자 인권 의식을 농인 사회에도 공유하고 서로 연대하기 위해선 ‘농인 인권운동엔 농인만이 참여할 수 있다’는 농인 사회의 뿌리깊은 편견을 버려야 해요.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결국 무엇을 위해 우리가 함께 모였는지가 더 중요하니까요.”(지양)

한국농인엘지비티는 아직 ‘설립준비위원회’ 단계다. 단순히 농인 성소수자 당사자의 권리 신장을 위한 ‘협회’로 머무르기보다는, 농인과 청인, 성소수자와 비성소수자 모두 평등하게 존중받을 수 있도록 연대하는 ‘인권단체’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다. 우선 서울인권영화제 주최 쪽과 함께 인권을 공부하며 혐오 없는 한국수어 표현을 개발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 지난달에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1인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오는 2023년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농아인연맹 총회에서는 자긍심 넘치는, 우아하고 어엿한 인권단체로 우리를 소개하고 싶어요. 그때까지는 지치지 않을 겁니다.” 지양씨가 손짓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전했다.

박윤경 기자 yg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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