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성 로안(가명·40살)은 베트남에서 맛집으로 알려졌던 식당을 운영했지만, 인생의 굴곡을 피하지 못한 탓에 한국에 와서 3년째 일하고 있다. 가족이 그리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면 눈을 감고 요리를 한다. 어둠을 스치는 냄새와 맛과 만족스러운 웃음과 가족들의 얼굴을 놓치지 않으려 로안은 시공간을 넘고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으며 요리한다.
가족과 한 세트처럼 ‘야까이’ 생각나
가만히 누워서 안 오는 잠을 청하자니 빠떼 익는 냄새가 코를 스쳐갔어요. 이 밤중에 누가 빠떼를 만들까, 눈을 감고 기다렸지만 그 냄새는 다시 오지 않았어요. 그렇지, 여기 한국에서 누가 빠떼를 만들 리 없지, 분명 내 마음속에서 번져 나온 냄새였을 거예요. 우리 딸들이 좋아해서 나는 반미빠떼를 자주 만들었어요. 반미빠떼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음식이에요. 베트남이 전에 오래도록 프랑스 식민지였다는 것을 잘 아실 테지요. 그때 바게트와 빠떼가 베트남에 넘어왔대요. 바게트가 베트남식으로 바뀌면서 반미가 되었고, 빠떼는 프랑스어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어요.
베트남 땅은 아래위로 길어서 북쪽과 남쪽 문화가 상당히 달라요. 나는 북쪽 하노이 사람이니 북쪽 문화를 중심으로 이야기할게요. 남쪽에서는 반미가 바게트 자체 혹은 바게트에 고기나 채소를 끼워 만든 샌드위치 둘 다를 의미하는데, 북쪽에서는 그냥 빵을 의미해요. 나는 빵집에서 갓 구운 반미를 사오고, 빠떼는 직접 만들었어요. 프랑스가 원조 나라이니 거기 빠떼가 당연히 맛있겠지만, 나는 베트남식으로 베트남 양념을 넣은 빠떼를 ‘엄청’ 맛있게 만들죠.
나는 차근차근 요리를 시작해요. 바지런히 돌아다니며 장을 봐다 주방 가득 재료를 늘어놓아요. 갓 구워 아직 따뜻한 반미, 돼지고기와 돼지간, 돼지껍질을 삶아 얇게 썬 비해오, 양파, 마늘 등등. 우선 돼지간을 우유에 30분간 담갔다 꺼내서 다시 소금물에 잠깐 담가둬요. 잡냄새를 없애고 풍미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죠. 위 재료에 반미의 부드러운 빵 속을 섞어 믹서로 갈아요. 이때 꼭 넣어야 하는 양념이 ‘응우비흐엉’이죠. 이건 한국에 없는 양념이라 설명이 좀 필요하겠어요. ‘다섯 가지 향신료’라는 뜻인데, 계피, 정향 같은 여러 가지 향신료를 섞은 가루예요. 베트남에서 고기 요리 할 때 주로 쓰는데, 얼마 전 한국 인터넷 판매 사이트에서도 파는 것을 발견했어요. 여기서 베트남 양념을 보니 어찌나 신기하고 반갑던지요.
갈아낸 반죽을 냄비에 담아 차분하게 다독여 중탕으로 3시간 정도 서서히 익히면 구수하고 깊은 냄새가 퍼지죠. 불현듯 내게 찾아왔던 바로 그 냄새 말입니다. 정말 그리운 냄새… 이렇게 만든 빠떼를 찹쌀밥과 함께 먹거나 반미에 끼워 넣어 반미빠떼로 만들어 먹어요. 차게 먹어도 되지만 나는 데워서 따뜻하게 먹는 것을 더 좋아해요. 어른들은 고수, 오이 같은 채소와 고추소스도 함께 넣어 먹는데, 우리 아이들은 매운 것을 못 먹어서 그냥 빠떼만 넣어 줘요.
딸들은 내가 해주는 반미빠떼를 무척 좋아했어요. 엄마 음식이 다 맛있는데 그중에서 반미빠떼가 최고라고 까르륵거리던 딸들. 딸들이 맛있게 먹으면 나는 안 먹어도 배가 불렀어요. 딸들을 두고 베트남을 떠나올 때, 눈에 그렁그렁 매달렸던 눈물이 지금도 기억나요. 우리 딸들은 지금 무엇을 먹으며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마음이 또 저릿저릿합니다. 딸들 생각하면 모두 포기하고 달려가고 싶어요. 하지만 한국에 오느라 들인 돈이 너무 커서 아무리 울렁거리고 아파도 돌아가지 못해요. 멋도 모르고 걸려든 이 그물은, 내가 원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가족들 얼굴이 하나씩 스쳐가고 마치 가족과 한 세트인 것처럼 ‘야까이’가 생각납니다. 야는 가짜, 까이는 개라는 뜻이니까, 야까이는 가짜 개고기란 뜻이죠. 가짜 개고기라니, 무슨 말이람! 하면서 혹시 웃고 있나요? 베트남에서는 개고기를 흔하게 먹어요. 전에는 더 많이 먹었는데, 요즘은 하노이시와 호찌민시 정부에서 개고기 식용 문화 근절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덕분에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정말 다행이죠. 우리 가족은 원체 개를 예뻐해서 개고기 먹는 사람들을 미워했거든요. 개고기가 아무리 흔해도 우리 가족처럼 안 먹는 사람들 또한 상당한지라 오래전부터 개고기 대신 돼지고기를 사용해서 비슷한 음식을 만들게 되었다고 해요. 한국 음식에도 그런 것이 있다고 들었어요. 개장국에 개고기 대신 소고기를 넣어 육개장, 닭고기를 넣어 닭개장이 되었다고 하던데, 맞나요? 역시 어느 나라나 비슷한 일이 벌어지나 봐요.
열심히 배워가며 ‘분야까이’ 식당을 냈어요
우리 어머니는 돼지 앞다리가 살이 많아서 좋다고 항상 앞다리로 야까이를 만들었어요. 앞다리를 통째로 사다 털을 깔끔하게 제거하고 물로 씻어요. 그것을 포일에 싸서 불 위에 잘 돌려가며 굽지요. 노릇노릇해지면 굵은소금으로 쓱쓱 문질러 물로 씻어내요. 그다음은 좀 힘이 필요해요. 그것을 커다란 도마에 올려놓고 도끼처럼 큰 칼로 텅! 텅! 내리쳐서 적당한 크기로 잘라야 하거든요. 뼈까지 잘라지도록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내리쳐야 해요. 이건 좀 한국에서는 무리지요? 아파트나 빌라 같은 데서 그랬다가는 아래층에서 집 무너진다고 쫓아올지도 모르니까요. 한국에 처음 와서 부엌도 없는 집을 얻어 들어갔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참으로 어이없게도 어머니가 커다란 도마 위에 돼지족을 올려놓고 힘껏 칼을 내리치던 모습이에요. 여기서 야까이는 못 해 먹겠구나! 느닷없고 공연한 상실감이 훅 밀려들었어요.
이제 다 잘랐으니 양념을 해야겠어요. 고기를 새우젓, 양강근, 생강황, 레몬그라스, 미니양파같이 향이 강한 재료와 섞어 재어요. 양강근은 생강처럼 향이 진한 뿌리인데 한국에서는 보기 힘들더라고요. 미니양파는 일반 양파보다 작고 단단해요. 샬롯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역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물어요. 재료 중에 특히 중요한 게 있어요. 바로 ‘먜’예요. 먜는 흰 쌀밥에 먜 종균을 넣어 삭힌 것인데 쓴맛이 나고 술 같아서 많이 먹으면 취할 수 있어요. 베트남에서는 먜를 ‘키운다’고 해요. 한국에서 우유로 유산균 만드는 것을 보고 먜를 키우던 것이 생각났어요. 먜를 아무나 잘 키우는 것은 아니에요. 자칫 잘못하면 곰팡이가 피어 먜가 다 죽어버리거나 맛없는 먜가 되거든요. 우리 어머니 먜는 동네에서 유명해서 이웃 아줌마들이 자주 얻으러 오곤 했어요. 요즘은 세상이 달라져서 가게에서 상품으로 팔기도 하더군요. 새우젓 이야기도 빼먹지 말아야 해요. 한국 새우젓은 볼그스름 예쁘지요? 하지만 그런 새우젓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우리 새우젓은 오래오래 삭혀서 색이 검고 냄새도 엄청나죠. 거의 삭힌 홍어급이죠. 야까이는 먜와 새우젓의 질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재료에 간이 잘 배었을 테니 냄비를 불에 올려서 한소끔 끓여요. 바그르르 끓어오르면 재료가 잠길 만큼 물을 붓고 약한 불로 국물이 자작해질 때까지 졸여야 해요. 음식을 낼 때 붉은 고추를 송송 썰어 올리면 색이 예쁘고 더 먹음직해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고기를 베트남 향채소와 함께 입에 넣으면, 그 맛과 향에 아, 눈이 저절로 감깁니다!
나는 딸 다섯 중에 셋째예요. 아버지는 전쟁(베트남전쟁, 1975년 종전)이 끝나던 즈음에 숯 장사를 시작했다고 해요. 숯으로 유명한 ‘왕닝’이라는 지역에서 숯을 대량으로 떼어다 하노이에서 도소매로 파는 일이었죠. 지금이야 어지간한 집에서는 다들 가스레인지를 쓰지만 나 어릴 때만 해도 나무를 때서 밥을 지었어요. 가난한 집 솥단지는 장작불 그을음에 궁둥이가 새까매지는데, 잘사는 집 솥단지는 숯 덕분에 밑바닥이 아주 말짱했어요. 숯이 흔했던 우리 집도 솥단지가 깨끗해서 동네 친구들이 부러워했지 뭐예요. 주말이면 시집간 다섯 딸이 집으로 모이곤 했어요. 딸들의 유쾌한 수다를 들으며 아버지가 조용히 미소 짓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버지가 야까이를 무척 좋아하셔서 주말마다 우리 집 단골 메뉴였어요. 항상 어머니가 요리했는데, 늙으신 뒤에는 요리 솜씨를 물려받은 내가 주로 했어요. 아버지는 어머니가 만든 야까이를 최고로 쳤지만 내 것도 맛있다고 하셨어요. 아버지 칭찬에도, 나는 어머니 발뒤꿈치도 못 따라간다는 것을 잘 알아요. 그래도 나는 열심히 배워가며 ‘분야까이’ 식당을 냈어요. 뿐은 밀국수를 뜻하니까, 분야까이는 야까이와 밀국수를 같이 먹는 거예요. 베트남 사람들이 아침식사나 저녁 술안주로 좋아하는 음식이죠. 어머니는 내가 음식점을 낸다고 했을 때 걱정이 크셨던가 봐요. 처음엔 자주 가게에 와서 이것저것 살펴주시더니 곧 안심하시는 듯했어요. ‘우리 딸, 이 정도면 됐다, 그만 하산하거라.’ 자글자글 주름 잡힌 어머니 눈이 내게 그렇게 말했어요. 평생 음식 장사를 해온 어머니가 인정해준 거니까 믿으셔도 됩니다.
나는 새벽 3시에 식당으로 나가 음식 준비를 했어요. 이른 손님은 5시면 벌써 식사하러 오거든요. 베트남은 더운 나라라 해가 덜 뜨거운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야 해요. 아이들 학교도 겨울철 빼고는 7시에 시작합니다. 다들 바쁜 시간이니 각 가정에서 아침을 준비하기 힘드니까, 온 가족이 외출 준비를 마치고 식당에 나와 밥을 먹고 각자 학교와 일터로 가죠. 우리 가게가 있던 거리는 한집 건너 하나씩 식당이었어요. 아침식사 손님 맞으려고 새벽부터 모든 가게가 불을 밝히고 음식 준비에 들어갑니다. 제일 부지런한 내가 돼지족을 숯불에 구우면 연기가 올라 거리를 채우며 골목의 하루가 시작되지요. 곧 식당마다 맛있는 냄새가 퍼져 나오고 손님들이 찾아와요. 장사하느라 정신없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고 우리 딸들이 시누이 손을 잡고 와요. 나를 대신해서 시누이가 아이들을 깨우고 챙겨 데리고 나온 거예요. 우리 딸들은 야까이를 별로 안 좋아해서 나는 미리 만들어 놨던 반미빠떼나 옆 가게에서 사온 퍼보(쇠고기쌀국수)를 먹이죠. 그리고 아이들을 오토바이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 줍니다. 아무리 바빠도 학교 마칠 시간이면 또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태워 왔어요. 내 허리를 꼭 안고 재잘거리던 딸들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해요.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그때는 정신없이 사느라 그 평범한 일상이 귀한 줄 몰랐어요. 정성 들여 음식 만들고 아이들 키우던 그런 일상, 지금 되돌아보니 그 시간이 사무치게 그리워요. 땀 흘려 모은 돈을 한순간 판단 잘못으로 사기당해 다 날리고 가게 문도 닫아야 했어요. 설상가상, 그 일로 속을 끓이다 보니 병까지 생겨 주저앉고 말았지요. 순식간에 하늘이 무너지고 온 인생이 뒤틀려 버렸습니다. 아이들 데리고 어떻게 사나 막막한 나날을 보내다, 나는 한국에 오기로 결심했어요. 빈털터리인 주제에 여기저기서 돈을 얻어 비용을 마련해서 수속을 밟았어요. 한국에서 지난 3년, 이를 악물고 지냈어요. 죽도록 일하고, 병이 깊어지면 쉬기를 반복하면서요. 지금은 힘든 일을 못해서, 좀 수월한 바느질일을 하고 있어요. 고급 옷을 손바느질로 마무리하는 일인데, 내 바느질 솜씨가 꽤 쓸 만하다고들 합니다.
나중에 또 맛있게 먹어줄 거지?
오늘도 꿈속에서 딸들에게 물었어요. 내 딸들, ‘엄마표 반미빠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니? 나중에 또 맛있게 먹어줄 거지?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으니 내 질문만 떠돌다 맥없이 사그라집니다. 이번 여름은 비가 참 많이 오네요. 비 때문인지 시린 눈물 때문인지 세상이 다 젖어 있는 새벽입니다.
▶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일꾼. 국경을 넘어와 새 삶을 꾸리고 있는 이주민들은 저마다 깊은 사연이 있다. 떠나온 사회와 살아내야 할 사회에 하고픈 말이 많지만 그 말은 발화되지 못한 채 눈동자에 잠기곤 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내 당사자 시점으로 전한다. 4주에 한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