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자가 동의해 성관계를 가졌더라도 성인의 거짓말에 넘어가 성관계를 결심한 것이라면 해당 성인을 ‘위계에 의한 간음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대법관 민유숙)는 27일 위계 등 간음 혐의로 기소된 ㄱ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
30대 중반 남성인 ㄱ씨는 자신을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이라고 속이고 휴대전화 채팅앱으로 알게 된 14살 미성년자에게 “날 스토킹하는 여성을 떼어내려면 내 선배와 성관계를 해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ㄱ씨는 얼마 뒤 ‘선배’로 가장해 피해자를 만나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 사건의 쟁점은 ㄱ씨가 미성년자인 피해자에게 “스토킹한 여성을 떼어내려면 선배와 성관계를 해야 한다”고 거짓말한 행위가 ‘위계’에 해당하는지였다. 1·2심 모두 ㄱ씨의 행위가 위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피해자가 사건 당시 ㄱ씨를 ‘ㄱ씨의 선배’로 속아 만났긴 했으나 ‘선배’와 성관계하기로 합의했고, ㄱ씨도 성관계 자체와 관련해선 피해자를 기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계에 의한 간음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하급심 판단이었다. 대법원은 그동안 판례에서, 산부인과 의사가 치료를 이유로 만난 환자를 간음하는 경우처럼 ‘간음행위 자체’에 한해 위계에 의한 간음죄를 인정해왔다.
하지만 이날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아동·청소년이 외관상 자신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따라 성관계를 했어도 타인의 기만이나 왜곡된 신뢰관계에 의한 것이라면 온전히 자기결정권을 행사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대법원은 “위계적 언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계 간음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인과관계를 판명할 때는 위계적 언동 중 피해자가 성행위를 결심한 동기가 포함돼 있어 자발적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가 없었다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나이, 성장환경 등에 따라 차이가 있어 위계에 해당하는지는 피해자의 입장과 관점이 고려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대법원은 “피해자는 ㄱ씨에게 속아 성관계를 했다”며 위계에 의한 간음죄를 인정했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착각 또는 오인한 상황은 성관계하게 된 결정적 원인”이라며 “미성년자의 자기결정권에 따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ㄱ씨가 간음을 목적으로 피해자에게 착각이나 오인을 일으키고 그런 심적 상태를 이용해 간음행위를 한 것으로 위계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