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강요된 ‘성적 수치심’
성폭력 판단 때 핵심 감정, 수치심
분노·공포·무기력·모욕감·경악 등
광범위한 실제 피해감정 소외시켜
“수치심 아니라 성적 불쾌감입니다”
전문가 “수치심은 정조 개념에 뿌리
자기결정권 담긴 용어로 대체해야”
독일 법 ‘성적 수치심’ ‘음란’ 대신
‘불쾌감 유발’ ‘성적 남용’ 바뀌어
강요된 ‘성적 수치심’
성폭력 판단 때 핵심 감정, 수치심
분노·공포·무기력·모욕감·경악 등
광범위한 실제 피해감정 소외시켜
“수치심 아니라 성적 불쾌감입니다”
전문가 “수치심은 정조 개념에 뿌리
자기결정권 담긴 용어로 대체해야”
독일 법 ‘성적 수치심’ ‘음란’ 대신
‘불쾌감 유발’ ‘성적 남용’ 바뀌어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작가 leebido@hanmail.net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에서 열린 엔(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 시위. 이번 시위를 벌인 ‘N번방 성 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eNd)은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 제대로 된 수사와 판결을 요구했으며, 성범죄자에게 관대한 처벌을 내리는 사법부를 비판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천명의 피해자, 천개 이상의 피해감정 이렇게 통쾌한 반문은 오랜만이다. “길 가다가 퍽치기당하면 수치스러워요? 열받고 어이없잖아요. 안 부끄럽잖아요. 그런데 성폭력당하면 왜 부끄러워야 해요?”(혜림·40대 초반·티소믈리에) 성폭력을 보는 차별적 시선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똑같이” 화가 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도난, 강도, 사기 등 다른 피해를 본 (일부) 사람도 일종의 수치심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것을 보도나 판결문에 적시하지 않는 것처럼, 성폭력을 다룰 때도 (감정을 담은 말인 수치심이 아닌) 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안평·20대·에디터) “타인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댄 것. 성을 매개로 한 ‘폭력’ 자체에 초점이 없고 ‘성’에 초점이 있으니까 성폭력에만 수치심을 들먹이는 거 아닐까요? 그러니 성적 수치심이라고 말하면 안 돼요. 성적 불쾌감이죠. 이 말부터 바뀌어야 해요. 피해자가 뭘 부끄러워해야 하나요?”(혜림) “리얼(정말) 성적 수치심이란 말은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강요하려는 어감이라, 불쾌감이 나아요. 다른 범죄 피해도 마찬가지로 불쾌한 경험이잖아요.”(무지·27·공무원시험 준비) “성적 수치심, 이 표현 매우 이상해요. 누가 무엇에 대해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는 의미인가요? 가해자들에게 네가 한 짓을, 네 입에서 나온 말을 똑똑히 보라고 엄히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사법기관과 언론이 사용하는 성적 수치심은 그 말을 오히려 피해자에게 하고 있어요. ‘네가 당한 짓을 똑똑히 봐라, 세상에, 어쩌고 다녔길래 그런 짓을 겪은 거야. 수치스러운 줄 알아야지’라고요. 저는 피해자일 때 수치스럽지 않았어요. ‘성적 빡치심’을 느꼈어요.”(신예희·45·작가) • 분노(憤怒/忿怒) 「명사」 분개하여 몹시 성을 냄. 또는 그렇게 내는 성. 여성·아동 대상 폭력 사건을 주로 수사해온 박하연 서울 은평경찰서 경위도 피해감정을 구성하는 가장 큰 감정으로 ‘분노’를 꼽았다. “가장 먼저,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은 ‘화가 난다’예요. 수치심은 죄책감과 맞물린 감정이죠. 그건 가해자가 느껴야 할 감정이잖아요.” 강력계 형사로 여성과 아동의 분노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박 경위는 “피해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강요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드문 경찰이다. 법정에서 성적 수치심이 ‘돌부리’가 된 사건이 있었다. 이 경험은 박 경위를 크게 바꿔놨다. 15년여 전, 그는 가해자 4명에게서 성추행을 당한 10대 피해아동을 만났다. 그는 아이에게 수치심을 묻고 또 물었다. “수치심을 느꼈나요? 느꼈지요?” 범인들을 반드시 잡아 처벌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시티브이도 목격자도 없었다. 증거라고는 피해아동의 진술뿐이었다. 수치심을 느꼈다는 아이의 한마디가 꼭 필요했다. 조사를 받던 아이가 대답했다. “네, 수치스러웠어요.” 수개월 수사 끝에 가해자들을 붙잡았다. 재판이 열렸다. 법정에 서게 된 피해아동에게 판사가 다시 물었다. “성적 수치심을 느끼셨습니까?” “……” “수치심을 느꼈나요?” “글쎄요… 그게….” 아이는 판사 앞에서 수치심을 느꼈다고 끝내 말하지 않았다. 판사는 수사 내용과 피해아동의 증언이 엇갈린다며 신빙성을 문제 삼았다. 그사이에 아이는 성장해서 자기 생각을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시점이라는 논리였다. 결국 가해자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박 경위는 애가 타서 아이에게 물었다. 법정에서 도대체 왜 그랬는지. ‘성장한’ 아이가 말했다. “수치심은 부끄럽다는 뜻, 맞죠? 몇달 동안 생각해보니까요, 저 그때 안 부끄러웠어요. 무서웠어요.” • 공포(恐怖) 「명사」 두렵고 무서움. 40대 혜림씨 역시 분노와 함께 공포의 기억을 떠올렸다. “제게 성폭력을 저지른 범인은 바로 검거되지 않았는데요, 신고하고 4년 뒤에 잡혔어요. 재범 저지르다가요. 그때는 흉기를 들고 있었대요. 4년 반 징역 살았는데, 피해 당시 제 머리카락이 길었거든요. 그놈 출소하고 제 머리부터 쇼트커트로 잘랐어요. 저를 알아볼까 봐 무서워서.” 성폭력은 성‘폭력’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폭력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혜림씨는 ‘성적 공포감’이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성적 불쾌감이라고 하면, 피해가 심각하지 않은 듯한 ‘가벼운’ 뉘앙스라고 얘기하는 분도 있어요. 성적 불쾌감은 사회적 합의를 얻기 어려운 표현 같다고요. 그에 비해서 성적 공포감은 피해를 입증하기에 성적 불쾌감보다 유리하게 여겨진다는 거죠.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왜 여자는 불쾌해하면 안 되죠? 여자가 꼭 무서워해야 돼요?” 성적 수치심이란 표현이 피해자에게 ‘없는 수치심’도 억지로 요구하듯이, 성적 공포감이란 표현 역시 피해자를 ‘두려움에 질린 약한 존재’로 상정함으로써 감정적으로 억압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 무기력감(無氣力感) 「명사」 어떠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기운과 힘이 없는 기분이나 느낌. 하리씨는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미투’를 한 경험이 있다. 용기를 행동으로 옮겼던 그는 가장 복잡한 마음이 얼비치는, 가장 의외의 대답을 했다. “성적 불쾌감, 빡치심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끝낼 수 없는 문제 같아요. 제가 느낀 감정은 분노, 공포, 어이없음, 더러움, 앞날에 대한 걱정 등 너무 다양해요. 설명하기 어렵네요. 저는 수치심도 느끼긴 했어요. 실제로 부끄러웠어요. 사람마다 피해감정이 다른 거죠. 그 복잡한 감정을 수치심이란 말로 간단히 대표할 수 없다는 거예요.” 정연한 톤으로 말을 이어가던 그는 목소리로 짓는 문장 끝에 “무기력”이란 단어를 놓았다.
<수치심의 여성적 얼굴>(The Female Face of Shame, 2013) 책 표지. 국내 출간 예정.
디지털 성범죄가 불러낸 성적 수치심 성적 수치심은 더 이상 낯선 말이 아니다. 심지어 관용적 표현으로 굳어진 측면도 있다. “20대인 제 경우엔, 성적 수치심이란 말은 익숙하지만 실제 일상에선 제 입으로 말해본 적도, 귀로 직접 들은 적도 없어요. 언론 보도나 판결문에서만 보는 말이에요. 굉장히 ‘공적인 표현’ 아닌가 싶은데요.”(호) “30대 후반인 저는 성적 수치심이란 말에 어느 정도 무뎠죠. 성폭력 기사 보면 제목에 ‘어련히 저 단어 나오겠구나’ 싶고. 10년, 20년 전엔 여자들도 성희롱 겪으면 성적 수치심이라고 스스로 말했던 것 같아요. 다른 단어가 없으니까요. 다른 말을 모르니까.”(아쿠아) 그런데 일상에서 널리 쓰이는 성적 수치심이란 표현이 쏟아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뉴스 빅데이터 서비스 ‘빅카인즈’ 분석 결과, 전국 신문·방송사 54곳 보도 가운데 성적 수치심이 언급된 기사는 1990년 9건, 2000년 162건에 불과하다가 2010년대 들어 폭발적으로 늘어나 2015년 2641건을 기록한다. 올해는 8월9일 기준 534건이다. 이렇게 성적 수치심이란 용어가 판결문과 기사문을 타고 일상으로 스며든 건 2000년대 들어 정책 차원에서 성폭력이 주요하게 논의되고, 2000년대 중반 이후 법·제도적으로 피해자 보호를 중심으로 하는 정책이 확대된 영향으로 풀이된다. 흥미로운 점은, 성적 수치심이란 표현이 포함된 기사 수와 불법촬영 발생 건수 추이가 거의 비슷하다는 대목이다. 성적 수치심이란 표현이 언론에 집중적으로 등장한 2015년은 불법촬영 건수가 최대를 기록한 해이기도 하다.
성적 수치심 아니고 성적 불쾌감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성폭력처벌법상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죄’(제14조)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죄’(제13조)에 성적 수치심이란 용어가 들어가다 보니 상황이 악화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장 연구위원은 “우선, 수치심은 ‘음란’에서 유래된 개념으로 성적 자기결정권이 아니라 과거 전통적인 정조 관념에 뿌리를 둔다. 신체적 침해에서 나아가 신체 이미지, 비신체적으로도 가해지는 새로운 유형의 성폭력이 빠르게 증가하는 오늘날, 굳이 음란 개념을 가져와서 쓰는 건 문제”라고 설명했다. 성적 수치심은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매우 모호한 감정이기도 하다. 장 연구위원은 “음란함은 사회가 공유한 성도덕적 가치에 따라 달라지는 만큼 그 기준이 주관적이다. 거기서 나온 성적 수치심이란 피해자가 느껴야 하는 감정인지 사회가 공유해야 하는 감정인지 불분명해 애초부터 제거됐어야 하는 표현이다. 법적으로 판사들이 적용할 때도 범위가 들쭉날쭉하다”며 “다른 표현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적 수치심을 삭제한 독일의 경우를 참고할 수 있다. 1969년 형법 대개정이 이루어지면서 현재 독일 판례는 ‘음란’과 ‘성적 수치심’이라는 개념을 더 이상 적용하지 않는다. 대신 ‘불쾌감 유발’ ‘성적 남용’ 같은 표현으로 대체됐다. 가해자의 행위를 되도록 객관적 언어로 담으려 한 것이다. 전문가들도 성적 수치심을 다른 용어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경찰, 교수, 검사, 판사, 변호사, 비정부기구(NGO) 등 47명을 대상으로 ‘처벌법상 사회적 법익 관련 용어 변경의 필요성’(2018)을 조사한 결과, 과반수의 전문가가 ‘성적 수치심→성적 불쾌감’(65.2%) ‘성적 수치심→성적 모욕감’(63%)으로 변경에 동의했다.
수치심의 여성적 얼굴 법은 왜 성폭력 여부를 판단할 때 수치심을 핵심적인 감정으로 여기는 걸까. 피해자가 특정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에 가해자를 처벌하는 경우는 모욕죄의 모욕감, 즉 ‘경멸적 감정 표현의 반응’을 제외하면 성범죄가 유일하다. 이토록 특수한 성적 수치심의 ‘주체’ 대부분은 젠더 권력에서 약자인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성폭력처벌법의 모태인 형법 제297조에서 강간죄의 객체는 원래 ‘부녀’였다. 그러다가 2012년에야 ‘부녀’가 ‘사람’으로 바뀌면서 남성도 강간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 여자의 얼굴을 한 성적 수치심은 어떻게 그 모든 성적 피해감정들의 이름이 되었을까. <수치심의 여성적 얼굴>(The Female Face of Shame, 국내 출간 예정)을 번역하고 있는 손희정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강요된 수치심이란 강간사회를 지탱하고 강화하는 통치술”이라고 풀이했다. 손 교수는 “강간으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사회가 강간사회인데, 피해자 여성에게 수치심을 강요한다는 건 결국 (남부끄러우니) 조용히 숨어 살라는 뜻이다. 그런 식으로 남성이 여성을 옭아매 운신의 폭을 줄이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사악한 감정으로서의 성적 수치심”도 지적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갖춰야 할 필수적인 감정임에도, 강요된 성적 수치심은 수치심을 성찰이 아니라 모멸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이다. “‘땅으로 꺼져버리고 싶다’는 표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모멸로서 느끼는 수치심은 약자를 완전히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공간이 됩니다.”(손희정) “권력을 가진 남성 가부장적 사고에서 비롯된 언어가 성적 수치심이라고 봅니다. 여성에게 ‘너도 원인 제공을 하지 않았어? 그럼 너도 수치심을 느껴야지’ 하며 탓하려고 그 말을 만든 것 아닐까요.”(박하연) _____________
피해 회복에도 걸림돌 ‘피해자=부끄러운 존재’라는 낡은 등식은 피해 회복에 심각한 방해가 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다. 첫째, 내재된 수치심이 피해자에게 자기혐오로 번질 가능성이다. 홍상희 박사는 “수치심이라는 고정관념을 피해자가 가지고 있을 때, 자신의 심리적 반응에 대해 수용하지 못하고 자신을 비난하여 추가적인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우려했다. 둘째,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2차 가해의 가능성이다. 이소희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가 수치심이나 감정적 동요 없이 ‘평범하게’ 진술하면 의심스럽다는 피드백을 받기도 한다. 이런 경우를 포함해 신상 공개, 피해 촬영물 재유포 등 2차 피해에 대한 걱정이 성적으로 훼손됐다는 감정보다도 훨씬 크다”고 전했다. 홍 박사도 “피해자의 주변인과 사법기관에서 수치심에만 주의를 기울이면, 수치심 이외의 심리적 반응을 보일 경우(실제로 많은 경우) ‘피해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쉽다”고 지적했다. 수치심은 문제의 그 ‘피해자다움’을 구성하는 감정으로 오남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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