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시간의 극장
제9화 무차별 범죄 ‘전혀 다른 살인마의 탄생’
제9화 무차별 범죄 ‘전혀 다른 살인마의 탄생’
무차별 범죄가 태어났다
프로파일링의 역사도 시작했다 30년간 헛발질한 화성사건 수사
고문수사한 경찰과 묵인한 검찰
잘못 판결 내린 판사 모두의 만행 1986년 9월15일 새벽 6시께 경기 수원에서 열무 등을 팔고 딸의 집에서 잠을 잔 뒤 귀가하던 이아무개(여·당시 71살)가 하의가 벗겨진 채 피살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시작으로 1991년 4월3일 화성 동탄면 반송리 야산에서 권아무개(여·당시 69살)씨가 저녁 8시께 집으로 귀가하던 중 강간 피살될 때까지 총 10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나는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기동대에 근무하고 있었고 범죄와의 전쟁 등 현안 치안 문제로 화성사건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세월이 흘러 2000년 2월9일 한국 경찰은 최초로 당시 경장이던 나를 ‘범죄분석요원’이라는 명칭으로 공식 발령함으로써 한국의 프로파일러가 탄생하였는데,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는 상관의 질문에 “가장 먼저 화성사건 유형과 패턴을 분석해서 용의자를 프로파일링 해보겠다”고 했다. _______
프로파일러가 없던 시대 그러나 사건 발생 10여년이 지났고 방대한 수사자료를 분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안타까웠다. 그러던 중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등의 사건에 투입되면서 화성사건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채 나는 2017년 4월30일 경찰에서 퇴직하였다. 2019년 과학수사의 발전으로 결국 실체가 밝혀지면서 그 마음의 짐을 조금은 내려놓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경기경찰청 수사팀과 프로파일러 후배들에게 감사한다. 다시 한번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의 명복을 빌면서 유가족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한 시대를 경찰로 살았던 이유로 늦은 사건 해결에 대한 사죄의 말씀도 아울러 드리고 싶다.
〈한겨레신문〉은 1988년 창간되었다. 1988년 9월10일치 11면 기사다. 한겨레 기사 디비(DB)에 나오는 사실상 첫 화성 살인사건 기사다.
화성 부녀자 연쇄살인사건 관련 용의자로 경찰에 연행된 뒤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김아무개군의 작은어머니 임정래씨가 김군의 등에 남아 있는 상처를 가리키고 있다. 이종찬 기자가 1990년 12월 촬영했다.
고문의 흔적 지나친 욕심은 늘 화를 부른다는 말이 있다. 범인을 검거하겠다는 수사관의 의지는 이해하지만 결국 그 명분 때문에 억울한 사람이 생긴다면, 그 명분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99명의 범인을 놓쳐도 단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 1990년 화성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경찰에 연행된 김아무개(당시 18살)군의 작은어머니가 김군의 등에 남아 있는 고문 흔적을 가리키며 인터뷰를 했다. 경찰의 이런 수사는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당시 언론과 국민들의 질책, 상부로부터의 압박 등으로 수사를 진행하는 요원들은 그야말로 속이 다 타서 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비인권적 수사 행태를 합리화할 수 있겠는가. 묵인하고 지휘한 검사 모두가 공범인 범죄 행위일 뿐이다.
1990년 11월27일. 내무위원회의 경기도청 감사에서 야당 의원들의 화성 연쇄살인사건 등에 대한 추궁에 관계 공무원들이 답변을 준비하는 모습. 진천규 기자 촬영.
경기도 화성 연쇄살인사건 가운데 두건의 범행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경찰에서 자백한 박아무개(30)씨가 1991년 1월4일 오후 안양경찰서에서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사진. 진천규 기자 촬영.
가스총과 다이너마이트 1994년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끔찍한 범죄에 직면하게 된다. 1994년 7월 두목 김기환(당시 26살)을 비롯한 20대 초반 6명으로 구성된 소위 ‘지존파’ 사건이 발생하여 우리 사회에 충격을 준다. 이들이 밝힌 범행 동기는 대학 입시부정과 당시 강남을 중심으로 땅 투기가 급증하는 등 가진 자들에 대한 저항이다. 그러나 실제 이들이 살해한 피해자들은 부유층이 아니었다. 급격한 경제 양극화 현상 등으로 인한 박탈감, 무력감 등의 감정을 무차별 표출한 분노형 범죄다. 이들은 부자를 납치하여 돈을 빼앗고 반드시 살해한다. 개인당 10억원을 모을 때까지 계속 작업하며 조직을 이탈하면 죽인다는 조직강령까지 만들었다. 이러한 점을 보면 결국 이들이 주장한 범행 동기는 촉발 요인이었을 뿐이고 궁극적인 범행 동기는 금품 강취였다. 1995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11월2일 모두 사형이 집행되었다.
경찰이 지존파 사건 현장검증 뒤 기자회견 모습. 1994년 9월21일께 이정우 기자가 촬영했다. 당시 지면에는 흑백사진이 공개되었으나 이번에 비컷 필름을 새로 발굴해 컬러 원본 사진을 공개한다.
1994년 9월19일 경찰에 붙잡힌 지존파 일당이 서울 서초경찰서에서 기자들 앞에 섰다. 김현양(왼쪽 넷째) 등 일부는 얼굴에 웃음을 짓기도 했다. 강창광 기자가 촬영했다.
경찰이 지존파 검거 이후 전남 영광군의 아지트를 현장검증했다. 1994년 9월21일께 강창광 기자가 촬영했다. 당시 지면에 소개되지 않았던 사진이다.
지존파 조직원 김기환의 집 지하에 설치한 사체 소각로. 한겨레 아카이브에 임시취재반으로 표기되어 있어 촬영자가 분명하지 않다.
지존파 현장 검증에 미디어의 관심이 쏠렸다. 포토라인도 없던 시대다. 1994년 9월21일께 이정우 기자가 촬영했다. 당시 지면에 소개되지 않았던 사진이다.
1994년 9월21일 오후 전남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연쇄납치살인조직 지존파 일당의 아지트에서 범인 김현양이 도끼로 피해자 대역인 마네킹을 내리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촬영.
지존파 10년 뒤엔 유영철 무엇이 이들을 살인마로 만들었을까. 이들은 모두 중고교를 중퇴하였고 가난한 집에서 성장하였다. 돈을 벌기 위해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전전하던 중 두목 김기환이 조직을 결성하자 무조건 충성을 맹세하며 조직구성원이 되었다. 친구들이 모두 학교를 다니는 나이에 가난으로 인해 건설 현장에서 힘든 일을 한다는 것은 이들의 자존감을 훼손하는 일이었다. 또한 그런 상황에서 경험하는 사회적 고립감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공범들끼리 서로를 의지하고 결속력을 다지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결국 사회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부자를 납치하여 돈을 빼았는다는 목표와 관계없이 여성을 납치하여 성폭행하고 살인 연습을 하였고, 잔혹하게 시신을 훼손하고 유기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그야말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악마들이었다.
1994년 9월22일 국회 내무위원회에 출석한 최형우 내무장관(왼쪽)과 김화남 경찰청장이 지존파 연쇄살인사건 등에 대해 의원 질의를 받는 모습. 이종찬 기자 촬영.
온보현의 어떤 요구 지존파 사건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 1994년 9월1일 새벽 1시께 귀가하던 권아무개씨를 절취한 택시에 승객으로 태운 뒤 성폭행하고 전북 김제에 소재한 야산에 끌고 가 나무에 결박해놓는 등 택시를 이용하여 여성 승객들을 납치 성폭행 살해한 온보현(당시 37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성장기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면서 살아온 그는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빈곤 상태가 지속되었고, 24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자살한 뒤 아버지를 폭행하고 가출하여 13차례 구속되는 등 범죄를 저지르면서 살게 된다. 나름대로 어려운 처지를 극복하고자 노력하였지만 사귀던 여성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이후 부모와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으로 자살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죽음의 길에 자신만이 억울하게 세상을 살아왔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나이만큼 사람들을 살해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6차에 걸친 살인과 성폭행을 저지르던 온보현은 자신이 공개 수배된 것을 알고 더 이상 범죄를 저지를 수 없다는 생각으로 1994년 9월27일 지존파를 검거한 서울 서초경찰서를 찾아가 자수하였다. 이때 그는 지존파와 자신을 같은 방에 넣어 같은 취급을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결국 그는 1995년 11월2일 지존파와 함께 사형되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지존파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1994년 9월28일치 〈한겨레신문〉 23면에 실린 온보현의 얼굴 사진. 이정우 기자 촬영. 1980~90년대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피의자 얼굴 공개 심사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최근 사례 등을 참고하여 지존파 범인 등의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를 하지 않고 공개한다.
경찰이 1994년 9월29일 온보현 사건 현장검증을 했다. 택시 트렁크에 피해자의 시신을 싣는 현장검증 장면. 이정우 기자가 촬영했다. 당시 지면에 소개되지 않았던 사진이다.
막가파의 등장 1996년 한국 사회는 또 한번 큰 충격에 빠진다. 소위 지존파의 대를 이은 막가파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두목 최정수(당시 21살)를 중심으로 공범 3명으로 시작하여 17살의 청소년까지 포함한 9명으로 결성된다. 이들은 취객을 무차별 폭행하여 금품을 강취하거나 부녀자를 납치하여 성폭행하고 주유소를 대상으로 3번의 강도 사건을 저지른다.
1996년 10월30일치 〈한겨레신문〉에 실린 막가파 검거 사진. 김봉규 기자가 촬영했다.
2001년 5월30일치 〈한겨레신문〉의 4살 여아 살해사건 보도. 1호 프로파일러가 최초로 수사 중인 사건 분석에 투입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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