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계양아이쿱생협 조합원들이 지난해 5월11일 열린 세계공정무역의날 행사에서 어린이들을 상대로 공정무역을 알리기 위한 ○× 퀴즈 풀기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계양아이쿱생협 제공
우리의 흔한 일상 몇 장면. 바쁜 직장인에게 바나나는 맞춤한 아침거리다. 점심 식사 뒤 동료들과 둘러앉아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소확행’을 안겨준다. 나른해지는 오후에 즐기는 초콜릿이나 코코아 음료는 또 어떤가. 가벼운 혼술 안주로는 캐슈넛이나 건망고만한 게 없다. 하나같이 한국에선 나지 않지만, 돈만 있으면 쉽게 살 수 있는 것들이다. 바다 건너 이름 모를 누군가가 땀 흘려 일한 덕이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말했듯이, 우리는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에게 늘 빚을 진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빚을 제대로 갚고 있을까? 국제무역으로 입은 혜택에 대한 정당한 대가 말이다. 안타깝게도 국제무역의 결과는 공평하지 않다. 기업은 이윤을, 소비자는 값싼 제품을 원한다. 그 틈바구니에서 등이 터지는 건 주로 저개발국의 생산자들이다.
공정무역은 이런 ‘관행 무역’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제시된 개념이다. 무역의 혜택에서 배제된 저개발국 생산자들에게 제 몫을 돌려주자는 게 핵심이다. 장승권 성공회대 경영학부 교수는 “공정무역은 국제무역의 가치사슬을 건강하게 변화시키려는 대안운동이다. 다국적기업 등에 의해 형성된 착취적 가치사슬을 좀 더 공평하고 정의로운 가치사슬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공정무역은 취약한 생산자들을 위한 시장 접근성 보장, 공정한 가격 지불, 생산자와 소비자의 장기적 파트너십, 생산자 역량 강화 지원 등을 원칙으로 삼는다.
개인 소비에서 마을운동으로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공정무역운동은 주로 개인의 소비 차원에서 전개돼왔다. ‘각성’한 개인이 공정무역 제품 판매처를 수소문해 물건을 사는 식이다. ‘윤리적 소비’ ‘착한 소비’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요 몇년 새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차원으로 공정무역운동의 질적 변화를 꾀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공정무역마을운동이 그것이다. 공정무역마을운동은 공공기관, 학교, 종교기관, 기업, 사회적 경제 조직 등 지역의 다양한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공정무역을 실천하자는 공동체 운동이다. 공정무역에 대한 인식을 확산하고 공정무역 상품의 판매를 늘리는 데 목적을 둔다. 한국공정무역마을위원회 장주영 사무국장은 “개인의 소비 차원을 넘어 공동체가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면 공정무역 확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민관협력을 바탕으로 한 풀뿌리 운동의 성격을 갖는 공정무역마을운동이 활발해져야 공정무역의 저변이 확대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공정무역마을은 2000년 영국의 작은 마을 가스탱에서 시작됐다. 그 뒤 이웃나라들로 퍼져 지금은 세계 35개국에 2030개의 공정무역마을이 있다. 유럽에 95% 이상이 몰려 있다. 독일이 687개로 가장 많고, 영국(425개), 오스트리아(207개) 등이 뒤를 잇는다. 국제공정무역마을위원회(이하 국제마을위)가 제시하는 다섯가지 목표를 달성하면 심사를 거쳐 공정무역마을로 등재된다. 다섯가지 목표는 △지방정부 및 의회의 지지 △지역 내 공정무역 제품 판매처 확보 △다양한 공동체에서 공정무역 제품 사용 △미디어를 통한 홍보와 대중의 지지 △공정무역위원회 구성 등이다. 지방정부의 지지와 지역 내 다양한 커뮤니티의 참여를 인증 조건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민과 관이 협력하지 않고는 인증을 받기 어려운 구조다.
인증 심사는 나라별로 꾸려진 공정무역마을위원회가 담당한다. 우리나라에선 2013년에 한국공정무역마을위원회(이하 한국마을위)가 출범했다. 한국마을위는 공정무역도시(광역단체, 기초단체, 읍·면·동), 공정무역대학, 공정무역학교, 공정무역 실천 기업 및 기관, 공정무역종교기관 등으로 나눠 공정무역마을 인증을 하는데, 국제마을위에는 공정무역도시만 등재된다. 한국에선 2017년 인천시와 부천시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모두 7곳이 공정무역도시 인증을 받았다.(
표 참조) 경기 시흥시와 광명시, 서울 성동구 등 공정무역도시 인증을 준비 중인 곳도 여럿이다.
첫 자치구 공정무역마을의 탄생
가장 최근인 지난 1월 인증을 받은 인천 계양구는 자치구 중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장주영 한국마을위 사무국장은 “자치구는 다양한 커뮤니티들이 밀접하게 연대하고 협력할 수 있는 생활 단위라는 점에서 최적의 공정무역마을운동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치구에서 성공 사례가 많이 나와야 광역 단위의 운동도 힘을 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추진 과정에서 민관이 유기적으로 협업한 점도 돋보인다고 장 사무국장은 평가했다.
계양구 공정무역마을운동은 2018년 11월 계양구 공정무역 조례가 제정되면서 본격화했다. 이 조례에 따라 지난해 초에는 ‘공정무역도시 계양’ 세부 추진계획이 수립됐다. 부구청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공정무역위원회도 꾸려졌다. 구의회는 공정무역 지지 결의문을 채택하며 힘을 보탰다. 민간 차원에서는 생협 등 다양한 지역단체들이 참여하는 공정무역협의회가 출범했다. 민간에서 중추 구실을 한 곳은 2003년부터 이 지역에 터를 잡고 활동하며 지역과의 연대를 고민해온 계양아이쿱생협이었다. 아이쿱생협은 국내 공정무역 제품의 절반가량을 소비하는 주요 공정무역단체다. 공정무역마을운동에 참여하면서 계양아이쿱생협이 가장 공을 들인 건 교육이다. 공정무역 활동을 해오면서 인식 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초·중·고교 학생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수십차례 교육을 진행했다. 공정무역 강사단을 양성하는 교육도 병행했다. 지난해부터는 ‘공정무역의 가치 확산’을 생협의 주요 사업목표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 아이쿱생협과 함께 공정무역협의회에 참여하고 있는 참좋은두레생협도 공정무역 활동가 양성 교육을 진행했다.
계양구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초·중·고교를 다닌 토박이인 양미선 계양공정무역협의회 대표(전 계양아이쿱생협 이사장)는 “계양구의 모든 주민들이 ‘나도 공정무역 제품 사용해 봤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정무역협의회의 올해 목표 중 하나는 계양구에 공정무역학교 인증 학교가 생기는 것이다. 공정무역 홍보 캠페인에 적극 참여해온 작전여고는 지난해 가을 한국마을위에 공정무역학교 인증을 신청해 현재 심사가 진행 중이다. 심사를 통과하면 국내에선 두번째 공정무역학교가 된다.
‘로컬’과 공정무역의 콜라보
공정무역운동의 새로운 흐름 가운데 하나가 ‘로컬페어트레이드’(이하 로컬페어)이다. 국제무역과 관련된 개념인 공정무역(페어트레이드)과 지역(로컬)을 합친 말이다. 공정무역의 대상을 저개발국 생산자뿐만 아니라 소비국(선진국)의 농민으로까지 확장한 개념이다. 유럽과 북미에서 자국과 인접 국가의 소외된 농민들에게 공정한 거래를 보장하기 위해 10여년 전에 등장했다. 공정무역 원칙에 따라 생산한 자국의 농산물과 공정무역 수입품을 혼합해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국내에선 2018년 ‘세계 최대 규모’ 공정무역마을인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로컬페어 제품이 개발됐다. 경기도와 경기지역 경제단체 등이 공동 출자해 설립한 경기도주식회사의 ‘공정무역 활성화 지원사업’을 통해서다. 베트남에서 수입한 공정무역 캐슈넛과 경기지역에서 재배한 콩으로 만든 ‘캐슈두유’가 첫 사례다. 2017년 경기도 공정무역 조례를 대표발의한 원미정 경기도의원은 “공정무역운동을 하면서 ‘가난한 나라의 생산자들은 도우면서 국내 소농은 외면한다’는 비판을 어떻게 극복할지가 늘 고민이었다. 윈윈 전략 차원에서 로컬페어 개념을 도입하게 됐다”고 말했다. 경기도 공정무역 조례에 ‘공정무역과 지역경제의 상생을 위해 노력한다’는 조항이 들어가게 된 이유다.
김정희 경기도공정무역협의회 준비위원회 공동대표는 “경기도에는 도농복합지역이 많아서 수입품에 대한 주민들의 거부감이 있을 수 있는데, 로컬페어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로컬페어가 활성화하면 공정무역 확산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종규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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