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6일 한화 이글스와 케이티(KT) 위즈와의 경기에서 기자는 이글스 마스코트 수리가 되어 꼴찌팀 이글스의 경기를 지켜봤다. 대전/글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사진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안녕. 난 수리예요. 이글스 마스코트. 몇살? 다섯살. 아빠 독수리 이름은 위니, 엄마는 비니. 날 수 있냐고요? 농담도 잘하셩. 날개도 한뼘, 다리도 한뼘이니 이제 겨우 걸음마인데. 아직 새끼라니깐요. 겉만 하얗지 안은 까맣고, 눈만 있지 앞은 보이지도 않는다고요. 참, 수리 응원 봤어요? 프로야구가 어린이날 개막했는데 올해는 관중이 없다고 아무도 안 불러서 수리 출격은 두달 만에 처음, 흑! 그래도 수리가 응원하니까 이글스가 승리했잖아요. 오랜만에 신나 보인다고요? 속사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네욧. 수리가 파닥파닥 응원해도 주위엔 아무도 없고(무관중 경기라는 건 나도 안다고요!), 숨 돌리려 올라가니 수리마카롱 팔던 그 가게도 문을 닫았어요.(힘들다던 매장 아저씨, 잘 지내죠?) 수리는 외로워. 정말 눈물이…. 수리만 보면 열광하던 삼촌·이모들, 다 어디로 갔어요? 코로나19, 그 녀석만 아니면 오늘 우리 얼싸안고 춤을 췄겠죠? 손꼽아 기다릴게요. 미운 코로나19 저 멀리 가면, 그때 우리 꼭꼭 다시 만나요. 진짜 만나요!
한국프로야구가 개막한 지 두달을 넘어섰다. 코로나19 속 초유의 무관중 경기가 이어졌다. 지난 6월26일 기자는 한화 이글스 구단의 협조로 마스코트 ‘수리’가 됐다. 수리 탈을 쓴 채로 이글스의 경기를 지켜보고 경기장 안팎을 취재했다. 그곳에는 “뒤척이다 새벽 5시에 잠드는” 최원호 감독대행과 “코로나19로 어려워진 생계를 위해 새벽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구장 점주의 삶이 있었다. “그저 있어줘서 고맙다”는 팬의 바람이 있었다. 그 속에 야구가 있었다.
한화 이글스와 케이티(KT) 위즈의 6월26일 경기. 준비가 시작됐다. 경기장 밖 중앙출입구 쪽으로 은빛 가스탱크가 조심스럽게 이동한다. 드라이아이스가 담겼다. 투수 어깨를 위해서다. 경기장 안 작업차에 시동이 걸린다. 내야와 외야 마사토 고르기 작업에 들어간다. ‘켄터키 블루그래스’종인 천연잔디는 하루 전 비를 머금고 빛을 뿜는다. 종래 모습은 딱 여기까지다. 어김없이 북적여야 할 티켓 판매대부터 치킨 냄새로 가득했던 푸드트럭까지 자물쇠가 단단히 잠겨 있다. 광장은 텅 비었다. 위즈 선수단 차량 타이어가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25년 동안 이런 적막은 처음이다. 4년 전 태어난 마스코트 ‘수리’를 창고 안에서 불러냈다.
아빠 마스코트인 ‘위니’, 엄마인 ‘비니’도 경험해보지 못한 광경이다. 수리도 바깥세상이 궁금했을까. 수리 속으로 들어가보니 겉도 속도 시꺼멓다. 사방이 틈 없이 막혀 있다. 텅 빈 공간 안에서 독수리 새끼의 기운을 느끼긴 어렵다. 그냥 거대한 구운 계란이 된다. 코로나19, 팀의 18연패를 수리는 알까. 날개를 파닥여봤다. 수리는 한화 이글스의 새끼 독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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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수리입니다
“코로나 때문에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글스까지 저러니 이래도 저래도 안 되겠다 싶더라니까.”
6월26일 수리가 되기로 한 날이었다. 구장 뒤편 한 식당의 ㄱ 사장은 말했다.
3년 전인 2017년 3월 그날도 기자는 거기에 갔다. 야구장 건너편 충무체육관(대전 중구 대종로)에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충청지역 경선이 있었다. 당시 ㄱ 사장은 기자라는 말에 “될 넘이 되겄지(유)”라며 슬쩍 비켜섰다. 그곳의 분위기는 3년 전과 사뭇 달랐다. 코로나19 때문일까. 이날 식당 텔레비전에는 대전지역 확진자 4명이라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시까지 104번째 확진자였다.
4~5월 대전 확진자는 9명. 수도권, 대구·경북과 인접한 지리적 여건을 고려하면 잘 지켜낸 셈이었는데 6월 들어 벼락같이 확진자가 늘기 시작했다. 거리는 다시 얼어붙었다. 음식을 내려놓으며 던지는 ㄱ씨의 능청맞은 사투리에 거친 언사가 섞여든다.
“오늘 또 확진자네, 이글스도 우리도 이번 시즌 틀렸다 싶어.”
이글스가 14연패를 당한 6월7일, 한용덕 감독이 자진사퇴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글스는 4연패를 더해 18연패에 다다랐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1985년에 기록한 최다 패배와 같은 기록이다. 6월13일 상대는 두산 베어스였다. 객관적인 전력상 이날 경기가 야구사에 남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몇몇 팬들은 경기장 주변을 배회했고, 이글스파크가 내려다보이는 보문산을 올라 깃발을 흔들었다. 예상 밖 7 대 6의 극적인 한화 승리였다. 응원단도 울고, 보문산도 울었다. 그러나 이글스는 이후에도 자주 지고 가끔 이겼다. 현재 승률은 2할4푼(7월2일 기준)이다.
여전히 시즌 최다패(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 2002년 롯데 자이언츠의 97패)를 경신할 것이란 암울한 전망 속에 힘겹다. 코로나 시대, 무관중 경기 속에서 분투하는 그들이 궁금했다. 수리가 돼 보기로 했다
. 2020년 시즌 수리의 첫 등판이었다.
“수리 뛰어!”
응원단장이 수리를 불렀다. 하지만 수리는 ‘노답’이어야 한다. 수리의 1원칙,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주변에서 추임새를 넣으며 수리의 응원을 거든다. 응원을 시작한 지 5분도 안 돼 숨이 차오른다. “원래 수리가 하는 대로 8회까지 하겠다”는 말에 “한 회도 힘들 것”이라고 되받은 이한성 이글스 홍보팀 과장의 말이 떠올랐다.
수리 마스코트는 두 팔을 벌려도 품 안에 안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입는다’보다는 ‘들어간다’에 가깝다. 검은색 신발과 털바지를 입은 뒤 두 사람의 이글스 직원이 수리 탈을 위에서 씌운다. 관중 없는 경기장, 오늘은 수리까지 나서서 뛰어보지만 반응이 있을 리 없다. 선수들이 응원에 호응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마스크를 쓰고 드문드문 앉아 있는 중계진도 마찬가지다. 그저 묵묵히 공을 향할 뿐이다. 응원 소리가 멈추면 “딱” 하는 타구 소리와 “퍽” 하는 포구 소리가 경기장에 크게 울린다. 절간 같다.
쪼그려 있기 힘들어 다리를 펴자 자세를 바로 잡으라는 지적이 날아왔다. 수리가 응원단과 응원을 한 것은 올 시즌 처음이다. 대전/백소아 기자
수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파닥거리며 뛰는 게 전부다. 살짝 비치는 날개 끝만으로 응원 율동은 역부족이다.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래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평소 경기당 평균 득점 3.5점을 넘지 않는 팀이 오늘따라 불방망이다.
응원단장의 호루라기 소리가 그칠 줄 모르고, 수리는 더욱 자주 열심히 파닥거리며 뛰는 수밖에 없다. 응원에 흥을 더하는 수리 속에서 정작 경기장은 보이지 않는다. 경기를 즐기기는 애초에 불가능, 전광판만 겨우 보인다. 초여름 더위에 허덕이며 응원 중에 빨간불(아웃 카운트 표시)이 들어왔는지 슬쩍 확인한다. 아웃 카운트가 올라갈 낌새가 없다. 1번 타자 “이용규, 베테랑~ 이용규”로 시작된 응원이 “정은원 안타”를 넘어 “김태균 홈런”을 외치다 “경학이는 삐까뻔쩍”에 이르렀다. 요령껏 확인한 전광판의 빨간불이 하나, 원 아웃. ‘이제 좀 그만해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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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야구팬으로 산다는 것
“이글스 응원하러 오셨어요?”
케이티 위즈와의 경기 30분 전이다. 보문산에 올라 팬을 찾았다. 원군을 얻었다고 느꼈을까. 나아무개(30)씨의 얼굴이 환해졌다(기자라는 말에 금세 흙빛이 됐다). 보문산은 해발 457.6m, 전망대인 보운대는 보문산 중턱 아래쯤인 140m에 있다. 그 높이에 이름처럼 구름이 있을 리 만무하다. 다만 차령산맥의 기세를 뽐내듯 나름 가파르다. 이글스파크까지의 직선거리는 770m로 손에 닿을 듯하나 실상 야구를 감상한다기보다 ‘야구적 형태’를 느낀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하다. 이글스파크
안 다이아몬드 같은 네 점의 베이스와 함께 점과 점으로 흩어져 몸을 푸는 선수들이 보인다. 경기장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견디지 못해 그 모습이라도 보겠다고 모이는 팬이 주말에는 10명이 넘는다.
“그러니까 3년 전쯤인가. 정근우 때문이죠. 원래 홈런이 많은 편은 아닌데, 딱… 쳤거든요. 와, 그런데 공이.”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외야로 날아든 단 하나의 포물선이 완성되는 순간, 나씨의 글러브가 그 끝점에 있었다. “툭 들어온 공에 툭 마음을 빼앗겼”다. 그 이후로 홈경기 세번 중 최소 두번을 직관(직접 관람)했다. 겨우 3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사이 이글스도 나씨도 곡절이 있었다. 그
가 팬이 된 이듬해인 2018년 이글스는 3위로 11년 만에 가을야구를 했지만, 다음 시즌엔 9위로 추락했다. 그리고 ‘그’ 정근우 선수는 2018년 1루수로 보직을 변경했다 2019년에는 외야수로 또다시 자리를 옮기더니 결국 트윈스로 이적했다. 그리고 18연패가 찾아왔다. 이글스가 롤러코스터를 타듯 두 시즌을 보내는 동안 “성격 때문에 상대와 눈을 보며 대화하기 힘든” 나씨는 학교를 겨우 졸업했고,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 취직했다. 그러다 코로나19가 왔고, 일자리를 잃었다. 뒤끝이 닳은 슬리퍼를 끌고 산에 오른 서른살의 구직자이자, 이글스의 열성팬이다. 코로나19가 지나가면 처지는 달라질까.
“취업요? 별수 없을 거 같은데…. 어? 홈런인가?” 저 멀리 검은 점 하나가 다이아몬드 꼭짓점을 유유히 돈다. 약 5초 뒤 나씨의 휴대전화 화면에 위즈의 멜 로하스 주니어가 이글스 선발투수 서폴드의 7구째 투심 패스트볼을 밀어쳐 좌측 담장을 넘기는 장면이 나온다.(휴대전화 중계는 경기 현장보다 몇초가 늦다.) 올 시즌 수리가 등장하는 첫 경기, 홈런으로 기선제압을 당한 셈이다. 행여 수리 때문에 졌다는 말이 나오면 안 될 텐데…. 다급하게 경기장으로 향했다.
이글스 팬인 나아무개씨가 26일 저녁 대전 보문산 전망대인 보운대(중구)에 올라 경기를 보고 있다. 실제 경기와 손안의 중계에는 몇 초의 간격이 있었다. 대전/백소아 기자
“베테랑~ 이용규!”
타자 일순했다. 응원단장의 호루라기 소리로 짐작하건대 팀의 대량득점으로
그 역시 무아지경이다. 응원이 격렬해지면서 수리의 속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머리 위 숨구멍으로 코와 입을 최대한 가까이 가져간다.
비가 와 선선할 것이라는 일기예보는 빗나갔다. 경기장은 23도로 야구하기 나쁘지 않은 날씨였지만, 수리 속은 이미 습기를 잔뜩 머금은 아마존 어딘가다. 스미는 장마철 습한 공기가 건조한 에어컨 바람처럼 느껴진다. 3년 동안 수리를 거쳐 갔다는 두 명의 아르바이트 학생은
이 숨구멍에 코를 들이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땀이 눈을 타고 입으로 흘러들었다. 그래도 손을 쓸 수 없다. 날개를 유지해야 한다. 손을 빼는 순간, 날개는 무너진다. 동심을 파괴할 수 없다. 얼굴을 삐죽거려 땀을 털어냈다. 이르면 7월 첫주 일부 관중이 입장하면, 수리 안에는 원래의 임자가 들어서야 할 텐데, 한여름 어찌 버티고 땀 냄새를 어쩌나, 하는 미안함과 민망함, 체념이 뒤섞였다. 그즈음 “수고하셨습니다” 소리가 들렸다. 길고 긴 3회가 끝났다.
한화의 마스코트는 독수리 가족 위니, 비니, 수리다. 수리는 아빠 위니, 엄마 비니 사이에서 태어난 새끼 독수리다. 구단은 이 마스코트 가족을 관리하는 직원들을 따로 둔다. 3회가 끝난 뒤 수리 날개를 잡아끈 것도 담당 직원이었다. 무관중 경기가 아니었다면 수리는 3회가 응원을 마치고 구장을 돈다.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그 마음속에 이글스를 새기는 임무를 위해서다. 야구의 사회화를 위한 조기학습인 셈이다. <야구란 무엇인가>를 쓴 <뉴욕 타임스> 야구담당 기자 레너드 코페트는 “야구팬은 누구나 자기가 야구를 처음 좋아했을 때로부터 약 10년간을 개인적인 황금기로 여기고 있다. 그 사람에게는 그 10년이 차후 야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기준이 된다”고 했다. 그 ‘10년’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 기간 동안 팬이 된다는 것은 호감을 가진 팀의 문화적 관습을 익히고 승리의 신념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사회화되면 코로나 시대라고, 무관중 경기라고 달라질 것은 없다. 집에서 쓰레기봉투를 뒤집어쓰거나 방구석에서 ‘남행열차’를 부르는 것은 팬들에게 단순한 응원이 아니다. 승리를 향한 성스러운 의식이다. 철없다 말해도 어쩔 수 없다. 1년 내내 야구 시즌이다.(겨울에는 ‘스토브 리그’가 있다.) 화장실에서 이글스의 행복송(“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한화라서 행복합니다”)을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18연패 뒤 “나는 승리가 아니라 한 점을 위해 응원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삶이라면서.
수리의 임무를 다하기로 했다. 관중은 없지만 구장을 돌아보기 위해 단상을 내려섰다. 이글스파크는 56년 전에 지은 구장이다. 계단의 크기와 위치가 고르지 않다. 발을 헛디뎌 뒤뚱거렸다. 아찔했다. 잘못하다간 20여m 아래 스탠드까지 굴러갈
판이다. 천년 사찰 불국사 계단도 반듯하기만 한데, 누가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위쪽으로 움직이니 이마 위로 뚫린 구멍을 통해 앞을 보려면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야 확보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김태균 선수 뒤로 이글스 팬들이 보낸 인형들이 빈 관중석을 대신 차지하고 있다. 이는 팬들의 부캐(부캐릭터)다. 구단은 무관중 경기가 끝나게 되면 인형들을 사회복지단체에 기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대전/백소아 기자
자꾸 수리가 고개를 푹 숙인다는 지적이 있었다. 앞을 보려면 수리 머리통 상단의 숨구멍이 앞을 향해야 한다. 사실상 땅에 코를 박는 자세다. 하도 답답해 머리통을 슬쩍 기울여 전광판 두어번 본 것뿐인데 그걸 구단 관계자는 귀신같이 잡아냈다. 물론 그 모습이 영락없이 더위먹은 새끼 독수리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승리의 상징이 돼야 할 수리가 맥없이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 현재 점수 6 대 1, 에이스인 투수 서폴드가 던지고 있지만 중간계투, 마무리까지 안심할 수 없다. 수리야, 정신차려, 날자, 날아보자.
보는 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수리 원래의 모양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만만찮다. 평균 키의 일반인이 수리 속에 들어가 서면 수리 탈이 쑥 올라가 무릎이 드러난다. 머리는 새끼 독수리, 다리는 두루미처럼 된다. 그건 수리가 아니다. 그냥 거대한 막대사탕 외계인이다. 아이들은 그런 수리에게 다가가지 않는다고 한다. 다리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수리 몸통을 무릎 아래로 내렸다. 다리와 허리가 굽어진 얼차려 자세가 된다. 지난 시즌까지 수리 안에 들어갔다는 아르바이트생이 떠올랐다. 그는 코로나19 무관중 영향으로 아르바이트를 쉬고 있었다. 코로나19가 수리까지 잡은 줄은 몰랐다. 위니, 비니까지 쉬고 있으니 아르바이트 자리 세개가 없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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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틸 만큼 버텨보겠지만…”
이날 돌아본 경기장 구석구석에는 방역을 위해 뿌려진 소독약 냄새가 남아 있었다.(하루 2번 경기와 무관하게 이뤄진다.) 식음매장은 역시나 문을 닫았다. 매장은 경기장 안에만 17곳이다. 이 가운데 편의점과 전국 체인망을 가진 치킨 전문점을 제외한 15곳은 모두 지역 소상공인이 운영한다. 장사를 포기하는 점주가 나오는 다른 구장과 달리 15명 모두 근근이 버티고 있다. 이유는 이글스 구단과의 계약 형식 덕분이다. 이글스는 점주들과 임대료가 아닌 수수료 기반으로 계약을 맺고 있다. 수익이 발생하지 않으니 비용을 내지 않아도 되는 셈이다. 물론 수입이 끊겨 어렵긴 이들도 마찬가지다. 점주들이 모인 에스엔에스 단체 대화방에서 한 점주가 대리운전을 나가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머지 점주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상황이 어렵지만 구단에 무언가를 요구하기도 어렵다. 코로나19 상황에다 18연패를 했다. 무관중으로 구단이 입는 경제적 피해도 막대하다.
지난해 이글스파크 입장 수입은 75억원. 전체 144경기 중 50경기가 지났으니 구단은 산술적으로 3분의 1 손실을 고스란히 안았다. 일부 관중이라도 들어오면 좀 나아질까. 6년째 ‘수리마카롱’ 매장을 운영하는 이명철 사장은 모든 게 조심스럽다. 그는 코로나19를 겪으며 개막 뒤 18연패를 지켜보면서 가장 마음 졸였던 사람 중 하나다.
일부 관중 입장 허용 소식에 기쁨도 잠깐이다. 개막 전부터 합하면 식음매장 개장 얘기가 벌써 세번째다. 일부 식음매장은 제외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확진자가 나오면 어떡할까 하는 불안도 떨칠 수 없다. “버틸 만큼 버텨볼게요. 좋은 방법 없을까요?” 오히려 기자에게 묻는다.
보문산 전망대서 응원하는 취준생
열성팬으로 만든 건 홈런볼 하나
‘코로나19 가도 달라질 건 없다’
매점 점주 버티는 비밀은 ‘임대료 0’
수리 마스코트 임무 원칙은 ‘침묵’
끝까지 지키길 바랐던 건 귀여움
이글스 득점해도 수리 속 타들어가
올 시즌 18연패의 쓴 맛을 본 그들의 두번째 우승은 언제일까. 코로나19로 무관중 경기가 진행 중인 이글스파크는 모든 식음매장이 문을 닫았다. 대전/백소아 기자
3회와 달리 4회말 이글스의 공격은 쉽게 끝났다. 응원가가 멈추니 1만3000명을 수용하는 경기장은 다시 진공상태가 됐다. 앞뒤를 가늠하지 못하고 몇걸음 주춤댔다. 홍창화 응원단장은 “수리는 스피커 옆에서 귀엽게 앉아서 경기하는 거 지켜봐야지”라고 역할을 주지시켰다. 가만히 앉아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응원에 참가하는 수리의 또 다른 역할이다. 하지만 그 시간에 ‘초보’ 수리가 편히 쉴 수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수리 구조상 편히 앉을 수 없다. 무릎을 꿇거나 아니면 양변기 자세로 쪼그려 앉아야 한다.(풀썩 엉덩이를 깔고 앉을 수도 있지만 이는 요령이 생긴 다음이다. 잘못하면 일어서다 수리 안의 ‘인간’이 관중에게 노출될 수 있다. 이는 마스코트의 세계에서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사고’다.) 상대의 공격이 길어지니, 앉아서도 다리에 쥐가 오른다.
5회도 두 팀 모두 삼자범퇴로 마무리됐다. 경기장 정리 시간이다. 마스코트가 대기실로 돌아가 탈을 벗고 공식적으로 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한걸음 가기도 벅차다. 날개를 잡아끌던 직원이 “무관중이니 저쪽 통로에서 잠깐 벗고 쉬자”고 한다. “원칙대로 사무실로 가도 된다. 괜찮다”는 나의 말이 “그러자”로 들렸는지 직원이 탈을 벗긴다. 벗자마자 신물이 올라온다. 저녁을 꼭 챙겨먹지 않으면 나중에는 힘들어 버티지 못한다는 말에 구장 앞 중국집 ‘동춘원’ 볶음밥의 짬뽕국물까지 털어 먹은 게 화근이었나 보다. 직원이 다가와 “5회까지만 해도 많이 했다. 8회는 무리”라고 했다. 그 말에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단상에 올라섰다. 6회 위즈 타선이 살아나 2점을 따라붙었다. 관중이 없으니 반대편 위즈 더그아웃의 고함이 더 생생하게 들린다. 이럴 때 응원단이 필요하다.
경기 전 이글스 3년차 2루수인 정은원 선수는 “관중 응원이 없으니 오히려 응원단의 한마디가 귀에 꽂혀 힘을 내기도 한다”고 했다. 한 심리학자는 응원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스포츠 종목으로 야구를 꼽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한국 야구의 집단 응원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립된 이론일 것이다. 물론 코로나 시대의 응원은 또 다른 모습이다. 무관중 경기장의 응원단은 전광판에 실시간으로 에스엔에스 응원에 참여한 팬을 뽑아 룰렛 돌리기, 사다리 추첨 이벤트 등을 진행했다. 에스엔에스에서 실시간으로 참여하는 팬들은 응원단장의 안내에 따라 전광판의 룰렛을 돌려 선수 모자와 사인볼을 받는다. 지난 홈경기에는 응원단장이 사다리 추첨 이벤트를 통해 보운대에서 깃발을 흔드는 팬들에게 치킨을 직접 배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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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스야 함께 날자
“최! 강! 한! 화!” 드디어 8회 육성 응원이 시작됐다. 이글스 팬이라면 뒷짐을 지고 한 글자씩 외치며 일체감을 만끽할 수 있는 순간이다. 트윈스의 서울 아리아, 자이언츠의 부산 갈매기, 타이거즈의 남행열차 등에 견줄 만하다(고 이글스 팬들은 자신한다). 아쉽지만 이날 육성 응원은 코로나19 시대에 변형된 언택트(?) 형태로 변모했다. 팬 100명이 온라인으로 보내준 ‘최, 강, 한, 화’ 목소리를 합성해 이글스파크의 스피커에 담은 것이다. 육성 응원을 마지막으로 마스코트 응원은 끝이 났다. 등장할 때보다 돌아가는 길은 길게 느껴졌다.
그사이 경기가 마무리됐다. 7 대 4. 이글스가 승리했다. 수리의 등장이 최소한 구설에 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한결 마음을 놓았다.
“수리 덕분에 이겼어요”라는 홍보팀 관계자의 말이 진심이라 믿고 싶었다. 다행히 ‘승리의 수리’가 된 하루였다.
이글스는 부활 조짐 보여
6월 4주차 팀타율 1위(2할9푼2리)
지금 꼴찌라도, 날자 날아보자꾸나
이날 정은원 선수는 “코로나19 가고 빨리 팬들의 육성 응원을 듣고 싶다”고 했다. 대전/백소아 기자
수리는 곧바로
땀 냄새를 제거하는 탈취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기자실로 이동했다. 경기가 끝나도 취재 목적으로 경기장 안으로 드나들 수는 없다. 출입 전 신고와 발열체크는 당연하다. 마스크는 구장 안에서 벗을 수 없다.(물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수리를 뒤집어쓴 채로 마스크를 쓰지는 않는다.) 위즈 선수들이 중앙출입구 옆 관계자 통로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글스 선수들은 반대편 통로로 이동했을 것이다. 구단 프런트와 기자가 쓰는 통로도 따로 구분돼 있다. 코로나19 전에는 티켓부스를 거친 관중들이 출입하는 문 한곳, 홈·원정 가리지 않고 선수와 관계자들이 출입하는 통로 하나가 주 동선이었다. 구단은 5월5일 개막에 맞춰 구장에 들어오는 모든 관련자들의 동선을 출입구별로 6곳으로 쪼개 관리했다.
1997년 한화그룹으로 입사해 입사 2년 만에 이글스의 우승을 경험하고 구단으로 자리를 옮긴 김재만 구장관리팀장은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것이 목표”라며 마스크를 고쳐 쓴다. 그가 은퇴하기 전 이글스는 우승할 수 있을까. 승률 3할도 안 되는 꼴찌팀이라고 벌써 좌절할 필요는 없다. 그게 내년일지, 언제일지 누가 알까.(벌써 이글스의 부활 조짐도 있다. 6월 4주차에는 2할9푼2리로 팀타율 1위에 올랐다.) 그가 꼼꼼하게 갈라놓은 동선을 따라 야구를 마친 이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30분이 채 안 돼 경기장을 적막이 감쌌다.
“
카드기 포스에 100만원이 넘게 찍힌 날도 있었지.”
이날이 지난해였다면 경기장 인근 식당 곳곳은 뒤풀이가 한창이었을 것이다. 이용규, 김태균 선수 등 베테랑들의 활약으로 오랜만의 승리다운 승리를 거둔 날이다. 팬들이 나눌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물론 무관중 경기에서는 상상일 뿐이다. ㅂ(46) 사장의 가게는 텅 비어 있었다. “그래도 이글스 덕분에 먹고살았다”고 했다. 3위로 올라섰던 2018년만 해도 대박이 났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손님이 넘쳤다. ㅂ 사장에게 그해의 이글스(팬들)는 주문이 밀리다 못해 팔뚝이 아파서 음식을 나르지 못할 정도로 살맛나게 해준 은인이다. 이글스가 날아오를 때 그도 날았다. 지난해 이글스가 9위로 추락하니 장사도 삐걱댔다. 올해는 좀 나아질까 했는데, 코로나19가 들이닥쳤다. 이제는 문을 열기도 버겁다.
ㅂ 사장네만이 아니다. 경기장 대로변을 따라 야구팬들이 자주 찾던 가게 모두 코로나19 위기에 눌려 숨쉬기조차 힘들다. 경기장 앞 닭강정집은 올해 한번도 열지 않았다. 몇 가게 건너 소머리국밥집도 마찬가지다. 사실 ㅂ 사장은 이글스 처지가 자기와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포기할까 하면 반짝 나아져 버틸 뿐 좀처럼 더 나아지지 않는다. 요즘은 ‘잘될 때 대박 칠 생각 말고 차근차근 준비라도 해둘걸’ 하는 후회뿐이다. 빈 테이블을 바라만 봐야 하는 곤경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최근 중소벤처기업부가 발표한 소상공인 매출액 감소율 조사(코로나19 발생 이전 매출을 100으로 가정)를 보면 6월22일부터 28일까지 매출 감소 폭이 33.4%에 달했다. 무관중 경기가 열리는 야구장 인근 상인들의 체감은 그보다 더하다. ㅂ 사장은 “원래 야구는 봄 시즌에 바짝 벌어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전국의 구장이 다르지 않다. 가을야구를 전망할 만한 순위가 판가름 나기 전인 4~5월 장사가 절반을 넘는다. 7월 관중 입장이 일부 허용되면 상황이 나아질까.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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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의 기록은 어떻게 남을까
훗날 2020년은 어떻게 기록될까. 코로나19가 맨 윗자리다. 세계적으로 1000만명의 확진자가 나왔고, 현재까지 미국은 260만명, 브라질은 132만명, 영국은 30만명을 넘어섰다. 2월 대구에서 신천지 교인 1000여명이 대거 확진됐을 때만 해도 최악의 상황을 걱정하던 한국은 확진자 1만2000명 선을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다. 코로나19 속에서 치러진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예상을 넘어 176석을 확보했다.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무릎에 질식해 숨진 뒤 미국은 시위로 들끓었다. 그럼에도 트럼프 지지율은 바닥이지만 여전히 재선 가능성은 남아 있다. 북한은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스펙터클을 연출하며 한반도가 종전이 아닌 정전 지역이었음을 상기시켰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분식회계 혐의에도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원회에서 불기소 의견을 받았다. 언론의 유례없는 신뢰도 추락으로 기자들은 ‘기레기’ ‘기더기’로 불릴까 전전긍긍했고, 그 와중에 <조선일보>는 100주년을 기념했다. 충남의 한 부모가 아홉살 아들을 여행용 가방에 가둬 사망에 이르게 한 것도 그해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겐 그깟 공놀이이지만 누군가에겐 딱 이것만 기억날 하나의 사건도 있었다. 한화 이글스가 18연패를 기록했다. 마스코트 수리는 무관중 경기 중 딱 한번 응원에 참가했다.
*참고자료: <야구란 무엇인가>, <야구의 심리학>, <야구가 뭐라고>, <홈런을 한 번도 쳐 보지 못한 너에게>,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등
대전/하어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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