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사진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서울 영등포구 당산역 인근의 19㎡(5.7평) 크기 원룸에서 4년 동안 전세살이를 한 직장인 정아무개(34)씨는 최근 이사를 결심했다. 지난 두어 달 당산역 근처에서 원룸, 투룸을 찾아봤지만 전세 2억원 이하의 집을 찾긴 어려웠다. 대부분 월셋집이었다. 부동산 중개인은 “전세 매물이 씨가 말랐다. 오전에 집을 내놓으면 당일 오후에 나간 적도 많다”고 말했다. 간신히 찾은 1억3천만원짜리 원룸은 영화 <기생충>에서나 볼 법한 반지하방이었다. 정씨는 1일 <한겨레>에 “월세를 내자니 돈이 안 모이고, 전세는 아예 없더라”며 “나는 이번 생에 집을 사긴커녕 평생 메뚜기처럼 이동해야 하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서울 아파트 전셋값 오름세가 고공행진을 이어가며 수도권 세입자들의 주거난이 현실화되고 있다. 보유세 부담과 저금리 기조로 전세를 월세나 반전세로 돌리는 집주인들이 늘면서 전세 품귀 현상마저 빚어지고 있다. 덩달아 월세까지 오르면서 집 없는 청년층과 서민층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최근 청년층이 주로 모이는 인터넷 카페엔 전셋값 상승에 대한 불만과 불안을 담은 글이 자주 올라온다. 전세난을 보도한 한 기사를 퍼나른 다음 카페의 한 게시물엔 “서울 전세 1억은 죄다 반지하냐”, “알아보던 집 월세가 한달 전보다 10만원 뛰었다”, “무주택 사회초년생들만 망했다”, “전세 대출도 힘든데 (매물로) 나온 집도 없다니, 전세 구하기 하늘의 별 따기 됐네”, “엄마, 아빠, 나 싹 다 집 없는 무주택자인데 답이 없다. 눈앞이 캄캄해” 등의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직장인 신혼부부인 여아무개(32)씨는 최근 서울 광진구의 2억3천만원대 투룸 전셋집을 부동산에 내놨다. 전세를 내놓자마자 이튿날 계약이 성사됐다. 그는 전셋집을 구하려다 물건이 없어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로 집을 사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여씨는 “(정부가) 다주택자를 규제해야 하는데 무주택자랑 1주택자를 규제하는 상황이 됐다. 집 없는 사람들을 더 서럽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회원들이 1일 낮 청와대 분수광장에서 ‘청와대 다주택 공직자 주택처분’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주택 모형물로 고위공직자와 서민의 주거 격차를 보여주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전세가 상승 속에 일부 신축 아파트 집주인들이 되레 전세를 놓지 않고 공실로 유지해 전세난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다. 임대료 인상폭이 5%로 제한된 점을 고려해 최초 계약가를 최대치로 부른 채 낮은 지연이자를 물며 기다린다는 것이다.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한 아파트에서 5년 동안 전세로 살아온 윤아무개(32)씨 부부는 “전셋집을 옮기려고 신촌의 신축 아파트를 알아봤는데 7억원까지 말이 나와 너무 비싸 옮기지 못했다. 내년까지 계약기간이 남았으니 버틸 수 있지만 지금 추세대로라면 전셋값이 얼마나 더 오를지 가늠이 안 돼 걱정되고 불안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정부의 ‘6·17 부동산 대책’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김헌동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부동산본부장은 “정부가 집값도 못 잡았는데 임대료를 잡기 위한 대책을 내놓은 것도 없다”며 “결국 정부의 무대책과 기성세대들의 투기가 청년들의 주거난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정용찬 민달팽이유니온 사무국장도 “정책 방향은 맞지만, 그보다도 전월세 상한제 등 임차인의 주거 안정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채윤태 이재호 전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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