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열차가 통과하던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의 공현진 터널 안(지난 6월18일). 터널 입구엔 한국전쟁 때 날아와 박힌 총탄 수십 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지워진 선로가 다시 살아날 때 평화를 실은 기차도 터널 반대편의 작은 빛을 뚫고 북상할 것이다.
▶일제의 한반도 수탈을 목적으로 건설된 뒤 남과 북을 오르내리며 주민들의 삶을 실어 나르던 철도가 분단으로 허리가 잘렸다. ‘동해안을 오르내리며 남북을 잇는 쇠줄’이 됐던 동해북부선의 시간엔 이 땅의 슬픈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2018년 4·27 남북정상회담으로 내달리던 동해북부선 연결의 꿈이 북-미, 남북 관계가 답보 상태에 빠지면서 속도를 떨구고 정차했다. 정상회담 2주년인 지난 4월27일 철도기관사 박흥수(<철도의 눈물> <시베리아 시간여행> 등 지은이)는 통일부와 국토교통부가 주관한 ‘동해북부선 추진 기념식’에 참석해 더디게 진행되는 사업 현실을 보고 왔다. 그가 6월5일부터 두 차례에 걸쳐 동해북부선 옛 흔적들을 찾아나섰다. 1차 답사와 2차 답사 사이 북한이 개성공단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며 남북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밭에 버려진 철도 침목, 수풀에 덮인 승강장, 민가가 된 옛 역사, 건설 과정을 지켜봤거나 기차를 타고 남북을 오갔던 주민들의 이야기가 출렁이는 한반도 정세 속에서 긴박하고 절박했다.
이른 아침부터 내린 이슬비가 산을 완전히 적셨다. 궂은 날씨 탓에 수십 가구가 모여 사는 산 아래 마을과 주변 도로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초목이 우거진 숲 한가운데서 잡초를 발로 다져 밟아 길을 냈다. 거의 늪으로 변해버린 땅 때문에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점까지 다가가 초록 이끼를 덮은 시멘트 구조물 앞에 섰다.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강원도 고성군 배봉리에 있는 옛 동해북부선 배봉리 터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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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철도의 날’을 열흘 앞둔 6월18일 1박2일 일정으로 동해북부선을 찾았다. 철도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과 함께하는 노동조합 공부 모임의 답사 프로그램 안내차 나선 길이었다. 배봉리 터널은 양양역 터에서 시작한 답사 일정 중 서울로 돌아가기 전 들르는 마지막 코스다. 1차 답사 이후 불과 2주 만에 다시 찾은 곳이었지만 마음은 돌덩이가 들어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앞선 여정 때는 동해북부선의 흔적을 확인할 때마다 기쁨이 넘쳤고 희망이 솟아났다. 한때 우렁찬 기적을 울리며 양양에서 원산까지 달렸던 철마를 상상했다. 새롭게 태어날 동해북부선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다. 누구라도 만나면 동해북부선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단 2주 만에 남북관계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벽 밑으로 추락했다. 북은 대북전단 문제로 남쪽을 비난하더니 2차 답사를 떠나기 이틀 전(16일)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해버렸다. 이어지는 뉴스도 암담했다. 전략자산 전개, 해안포 개방, 불바다…. 전쟁의 언어가 난무했다.
조심스럽게 다져온 남과 북의 신뢰가 이렇게 순식간에 무너질 줄은 몰랐다. 고성군 토성면 아야진항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부석환(58)씨는 갑자기 식어버린 남북관계에 안타까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고 했다. “남북관계가 좋아져야죠. 철도가 다니면 더 좋고요. 강원도 사람이면 다 같은 마음이지 뭐.” 옛 간성역 자리에서 만난 주민은 북한에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한다고도 했다.
동해북부선 기차가 지나던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배봉리 철교 교각 터에는 남북 철도 연결을 염원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배봉리 터널을 뒤로하고 포장도로로 걸어 나오다 멀리 밭이랑 끝에 할머니 한 분이 일하고 계신 것이 보였다. 할머니는 90살의 연세에도 밭을 돌보실 정도로 정정하셨다. “나는 여기서 계속 살았지. 요 앞으로 기차가 다녔어. 전쟁 때 철교 폭격 나는 것도 봤고.” 할머니는 동해북부선 철도가 놓이기 전에 태어나셨다. 철도 건설 과정도 지켜보고 열차가 달리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풍경 속에서 살아오셨을 것이다. “그럼 기차도 타봤지. 원산까진 안 갔고 고성역까지 기차 타고 갔었어.” 배봉리 토박이인 정순모(90) 할머니는 기차가 다녔던 길을 가리키며 옛 기억을 꺼내주셨다. “근데 걱정이여. 며칠 전에 북에서 막 폭탄(개성공단 남북연락사무소 폭파)이 터졌잖아. 여기 사는 사람들은 다 불안하지.” 전쟁이 중단된 지 오래됐지만 비극을 몸으로 겪으셨던 할머니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전쟁은 삶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공포만 남긴다. 이 공포가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 국가기록원의 자료를 보면, 한국전쟁 중에 사망하거나 실종된 민간인은 67만명이 넘는다. 이들 중 상당수의 죽음은 상대방 진영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전쟁의 공포가 조장한 의심으로 치안이 유지되는 곳에서 죄 없이 살해당했다. ‘입 한번 뻥끗 잘못 놀렸다’거나 과거에 그랬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죽었다. 죽은 자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도 찢어버리는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배봉리에서 정순모 할머니를 만나기 두달쯤 전인 4월27일 새벽 지하철 첫차를 탔다. 동해북부선의 남쪽 최북단인 강원도 제진역에 가기 위해서였다. 2018년 4·27 남북정상회담 2주년을 기념하여 ‘평화와 번영, 대륙을 향한 꿈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통일부와 국토교통부가 주관하는 ‘동해북부선 추진 기념식’에 통일부의 초청을 받았다. 통일부 출입기자단을 위해 준비한 버스를 얻어 탔는데, 버스가 내린천(인제군)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을 때 잠을 깼다. 버스가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7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는 동안 창밖의 풍경을 유심히 관찰했다. 곳곳에 옛 동해북부선 열차가 달렸던 철길과 터널, 철교를 받치던 교각의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2년 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곧 남북을 잇는 철도가 연결될 것만 같았다. 정상회담 열흘 만에 나희승 철도기술연구원장과 나는 <한겨레> 취재팀과 함께 제진역으로 달려갔다. 4·27 판문점 선언에 담긴 동해선 철도 연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서였다.(관련기사▶▶
기차로 유럽 간다면…기관사와 철도박사의 ‘동해선’ 가이드) ‘금강산’이 적힌 낡은 행선표가 서 있는 제진역 승강장과 녹슨 선로 위를 걸으며 우리의 가슴은 부풀었고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2018년 11월30일에는 남쪽 조사단을 태운 신의주행 열차가 서울역을 출발했다. 남과 북의 철도 관계자들은 열차를 타고 북녘땅의 철도 노선을 돌아보며 공동조사도 진행했다. 북한 철도 남북 공동조사는 애초 8월에 시도되었지만 유엔사가 48시간 전 통보 지침을 어겼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남쪽 열차의 군사분계선 통과를 막았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 공학은 실타래처럼 얽힌 방정식임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북한은 남한이 남북관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길 원했다. 그러나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없는 남한의 사정도 있었다. 관계 개선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정치 세력과 언론이 있다. 또 대북사업을 ‘북한 퍼주기’라고 비난하는 시민들도 있다. 관료들은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능력이 부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미 관계는 하노이 회담 이후 차갑게 식었다.
북한은 계속해서 북-미 관계에 종속된 남북관계에서 탈피해줄 것을 남한에 요구했다. 2018년 12월26일 판문역에서 열린 ‘경의선·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에서 북한 철도성 김윤혁 부상은 “북-남 철도·도로 협력 사업의 성과는 우리 온 겨레의 정신력과 의지에 달려 있으며 남의 눈치를 보며 주춤거려서는 어느 때에 가서도 민족의 뜨거운 통일 열망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착공 없는 착공식’ 이후 남한에서 실질적으로 진척된 일은 없었다. 지난 4월의 동해북부선 추진 기념식은 북쪽에서 볼 때 남쪽만의 요란한 행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운신의 폭이 제한된 통일부 입장에서는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를 타개하고 남한의 협력 의지를 북에 보여주려는 노력이 반영된 행사였다. 동해북부선은 한때 한반도 동쪽 남북을 잇는 쇠줄이었다. 사람들은 동해북부선을 탔다. 잊힌 동해북부선이 긴 세월을 돌아 마침내 도착한 장소는 제진역이었다. 북녘에 가장 가까이 맞닿은, 새 꿈을 꾸기에 딱 알맞은 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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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동쪽 남북을 잇는 쇠줄
추진 기념식 이후 40일이 지난 6월5일, 갑작스러운 무더위가 시간을 추월했다. 양양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에어컨 풍량을 최대한 올려야 했다. 남북관계의 ‘급랭’을 예상치 못한 채 옛 동해북부선을 찾아 동료 3명과 1박2일 답사길에 올랐다. 역사가 구성한 장소는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지금 시간으로 충만된 시간’(발터 베냐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이다. 베냐민의 말이 생각난 것도 갑작스러웠다. 식민과 분단, 전쟁을 지나온 한반도는 지금 시간으로 충전돼온 과거이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흔적을 남긴다.
“요 앞으로 기차가 다녔어.”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배봉리 터널 근처에서 밭일을 하던 정순모씨가 옛 철도를 가리키며 동해북부선에 대한 기억을 꺼내놓았다.
지난 4월 제진역 방문 이후 동해북부선의 흔적을 제대로 답사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겨우 시간을 냈다. 전날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탈북자들이 날린 대북전단 살포 행위를 비난했다. 이어서 남북연락사무소 폐쇄와 남북군사합의 파기까지 거론했다. 동해북부선 추진 기념식이 열린 지 한달 조금 넘은 시점에 터져 나온 북한의 싸늘한 반응이 걱정됐지만 남북관계 진전에 남쪽이 진정성을 보이라는 압박 정도로 생각했다. 휴게소 티브이 뉴스와 강원도에서 만난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도 코로나19인 시점이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찾은 곳은 양양군 청곡리 옛 양양역 터다. 양양역은 원산에서 시작한 동해북부선의 남쪽 종착역이다. 1928년 2월 강원도 원산 밑 도시 안변에서 개시된 동해북부선 건설 공사는 1929년 안변~흡곡 구간을 시작으로 단계적 개통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왔다. 1937년 12월 간성~양양 구간 건설로 원산~양양 동해북부선이 완공됐다. 원래 계획은 남쪽으로 더 내려가 강릉을 거쳐 포항까지 동해남부선과 연결, 부산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동해안 종단 철도를 완성하는 것이었으나 1937년 일본의 침공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이후 태평양 전쟁까지 이어지면서 연장공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해북부선은 이렇게 전쟁에 휘말린 한반도의 현대사와 운명을 같이했다.
배봉리터널 근처 밭일하던 할머니
철도 건설 지켜보고 직접 타기도
“6·25 전쟁 때 철교 폭격 목격
최근 북이 연락사무소 폭파해서
여기 사는 사람들 다 불안하지”
겨우 설계와 착공 준비에 들어간
동해북부선의 앞날 다시 안갯속
남북 잇고 대륙 여는 동해북부선이
증오 깨고 평화로 달려가길 소망
당시 양양역은 동해북부선의 종착역답게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인 역이었다. 양양역에 사람들이 더 몰렸던 이유는 철광석의 집산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제는 양양역에서 서쪽 산악지대인 서면 장승리까지 7㎞ 길이의 지선을 만들었다. 철광석과 목재를 수탈하기 위한 산업용 지선으로 ‘양양 철광선’이라고 불렀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철도 12년 계획(1927~1938)’을 통해 한반도 국경 지대를 개발하고 항일무장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도문선, 혜산선, 만포선, 경전선, 동해선 등 5개의 국철 노선을 신설하기로 했다. 동해선은 풍부한 해산물을 반출하고 연변의 석탄과 광산물, 임산물을 수탈할 목적으로 계획된 노선이었다.
승객들과 광산 노동자들이 만들어냈을 양양역의 왁자지껄함은 시간의 바람을 타고 사라졌다. 무심코 본다면 이곳에 역이 있었으리라고는 알 수 없는 장소였다. 세월의 무게를 간직한 시멘트 잔해만이 흩어져 있었다. 이 잔해를 따라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숲으로 들어가자 숨어 있던 흔적이 나타났다. 그곳엔 지금까지 형태를 잃지 않고 있는 승강장이 있었다. 승강장의 폭은 약 7m, 길이는 약 30여m로 훨씬 길었을 나머지 부분은 사라져버렸다. 선로가 놓여 있던 자리에는 두꺼운 나무들이 뿌리를 내려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양양역을 출발한 열차는 종착역인 원산을 향해 현재의 7번 국도를 오른쪽에 두고 낮은 구릉 위를 달렸다. 원산행 열차는 현재 철도공사의 낙산 연수원 북쪽 울타리 너머 있었던 낙산사역에 섰다가 물치항 앞을 지나쳤다. 물치항 쌍천교 옆 풀잎에 덮인 옛 철교의 교각을 지나면 설악동으로 들어가는 서쪽 도로와 남북을 잇는 7번 국도가 이어지는 삼거리를 만난다. 이곳에 제법 온전한 형태의 철도 노반과 쌍굴다리가 남아 있다. 선로는 고개를 올라 간이역이었던 대포역을 지나 7번 국도와 겹쳐져 속초시 동명동에 다다랐다.
자동차로 속초시에 이르자 어르신들은 속초역에 대한 기억을 똑똑히 간직하고 있었다. 중앙동에서 어망을 손질하고 있던 어르신 한 분을 만나 다짜고짜 속초역을 아시냐고 물었다. 70살의 노남전 어르신은 기차역이 있던 자리를 설명하며 기차가 다녔던 때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여기 나이 든 사람은 대개가 다 실향민이여. 바로 위 북쪽이 고향인 사람들이 많지. 기차 타고 왔다갔다 했어.” 어르신은 뜬금없이 찾아와 사라진 기차역을 묻는 사람 처음 본다며 신이 나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동해북부선은 1945년 남북 분단으로 북한에 편입됐다. 분단 초기 38선은 상징적인 선이었고 강원도 주민들은 남북을 왕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은 남과 북을 완전히 갈라놓았다. 1950년 6월29일 평양을 시작으로 북한 지역에 미 공군의 대대적인 폭격이 진행된다. 북한 인민군의 병력과 물자 수송선인 철도는 미 공군의 중요한 전략폭격 목표였다.
그중에서도 동해북부선의 시발역인 원산은 미 공군이 집중적으로 폭격한 곳이었다. 원산에는 북한 동부 최대 철도기지인 원산조차장이 있었으며, 원산기관차 공장은 한반도에서 두번째로 큰 기관차 제작·수리 공장으로 노동자만 1천명이 넘었다. 또 한반도 최대 정유공장이 있었고, 조선소들도 밀접해 있었다. 원산시는 물론 원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동해북부선은 폭탄의 비를 피할 수 없었다. 학창 시절 교문을 지나다 보면 선도부 선생은 품행이 불량한 학생들을 모아놓고 “원산폭격 실시”라는 구령으로 혼을 냈다. 폭격이 얼마나 심했으면 학교나 군대에서 가혹행위의 하나인 이른바 “대가리 박기”의 다른 이름으로 “원산폭격”을 차용해 쓸 정도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동해북부선 주변의 주민들은 폭격을 피해 남으로 내려왔다. 양양과 속초가 고향인 사람들은 전쟁 이후 남한 땅이 된 곳에 자리를 잡았지만 군사분계선 위쪽이 고향인 사람들은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고향을 잃은 사람들, 실향민들이 속초에 많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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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역에서 태어난 사람
노남전 어르신이 가르쳐준 곳을 향해 차를 몰아 속초역 터에 도착했다. 철도역이 있었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과 리모델링 중인 주택이 있었다. 남의 집 마당을 서성이는 사람들이 이상했는지 한 분이 다가와 어떻게 왔냐고 물어왔다. 나는 이 근처에 속초역이 있었다는데 혹시 아시냐고 물었다. 상대방은 바로 이 자리가 속초역 자리라고 화답을 했다. 답을 한 이는 김호권(54)씨로 자신이 속초역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 어떻게 된 사연인지 물었다. 김호권씨의 부친 김일해님은 속초역 관리인이었다. 김일해 어르신은 전쟁 이후 운행이 중단된 속초역을 관리하면서 다시 열차의 기적 소리가 울릴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열차가 운행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역사 관리를 맡아 기거하게 된 중에 김호권씨를 낳게 된 것이다. 김호권씨는 나를 끌고 보여줄 것이 있다며 집 안으로 안내했다. 안채에는 사진 액자들이 늘어서 있었다. 김호권씨가 그중 하나를 가리켰다. 속초시 전경을 담은 흑백사진이었다. 해방 이전 서울을 찍은 사진 속 명동성당처럼 속초역이 서 있었다.
1938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발행한 동해북부선 열차시간표를 보면 원산에서 양양 간은 하루 두 편, 양양에서 원산 간은 세 편이 운행됐다. 2년 뒤인 1940년 시간표에는 원산-양양 세 편, 양양-원산 네 편으로 한 편씩 증차됐다. 그만큼 승객들이 몰렸기 때문이리라. 원산~양양 거리는 208.3㎞이고 운행시간은 6시간50분 안팎이 소요됐다. 3등석 운임은 3원25전이었고 2등석은 5원85전이었다. 1938년 열차 안에서 판매하는 도시락은 30전이었으니 3등 요금만으로도 한끼 밥값의 11배에 이르는 금액이었다. 개통 초기에는 20개 역이었으나 정차역이 신설되어 31개 역으로 늘어났다. 철도가 생기면 사람이 몰려들어 마을이 조성되거나 커졌음을 보여준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나흘 뒤인 1953년 7월31일에 양양역에서 속초역까지 남쪽 구간은 영업 재개를 알렸다. 그러나 상징적인 조처였을 뿐 전쟁으로 파괴된 역과 선로를 복구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굶주림이 만연했던 가난한 나라였다. 막대한 복구비를 마련하지 못해 동해북부선 철도는 서서히 그 형체를 잃어갔다. 전쟁으로 파괴된 동해북부선은 그렇게 분단의 상처로 남았다.
1937년 완공된 원산~양양 노선
김대중·노무현 정부 화해 무드 타고
2007년 남북 정기운행 열차 개통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으로 ‘멈춤’
2년 전 문재인-김정은 회담 직후
남북 공동번영 기치로 재추진
북의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등
두차례 답사 사이 남북관계 급랭
사라져가던 동해북부선의 기억을 되살리게 된 계기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남북 화해 무드를 탄 남북철도 연결사업이었다. 2000년 7월31일 제1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경의선 철도와 도로 연결을 합의했다. 2002년 9월18일에는 경의선 및 동해선 철도·도로 착공식을 거행했다. 2004년 4월13일에는 ‘제4차 남북 철도·도로 실무협의회’를 열어 남북 사이 열차 운행에 관한 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남북을 잇는 철도의 꿈은 무럭무럭 커나갔다. 마침내 2007년 5월17일 경의선과 동해선에서 남북철도 연결구간 열차 시험운행이 이루어졌다. 이산가족과 남북의 인사들은 북과 남에서 출발한 열차를 타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뜨겁게 손을 맞잡았다. 남쪽 열차는 문산에서 개성까지 새로 복원된 26.8㎞의 경의선을 달렸고 북쪽 열차는 금강산에서 제진까지 25.5㎞의 동해선을 타고 내려왔다. 북한과의 철도 연결사업을 위해 새로 만들어진 남쪽 최북단 역이 바로 제진역이었다. 제진역의 딜레마는 열차를 타고 북으로는 갈 수 있지만 남쪽으로는 달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남쪽의 동해북부선은 파괴된 채 방치돼, 강원도의 강릉, 양양, 속초 같은 남쪽 도시에서 북으로 이어지는 철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 길을 이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동해선·경의선 시험운행 이후 남북철도 연결사업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2007년 12월11일에는 분단 62년 만에 마침내 남북 정기운행 열차가 개통됐다. 문산~봉동 화물열차 개통식이 열리고 북으로 향하는 정기 화물열차가 아침 6시20분 문산역을 출발했다.
당시 내가 일하는 서울기관차 승무 사업소에도 군사분계선을 넘는 개성 승조가 생겼다. 베테랑 기관사 2명이 짝을 이루어 매일 아침 수색 차량기지를 출발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판문역을 지나 개성공단 입구 봉동역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남쪽으로 돌아오는 열차를 승무하기 전에는 봉동역 대기실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이때 북쪽의 철도원들이나 안내원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운행 초기에는 남과 북의 철도노동자들이 잔뜩 긴장한 채 서로 눈치만 보고 말도 못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농담도 하고 친해졌다는 일화를 개성 승조 선배에게 듣기도 했다. 만나게 되면 길이 나고 길이 열리면 서로 이해할 수 있음을 개성 승조는 보여줬다.
2008년 1월29일에는 ‘남북철도협력 분과위원회 제1차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개성~신의주 철도 개보수 실무적 문제 협의’가 이루어졌다. 개성까지 달렸던 남쪽 열차가 반도를 종단해 국경까지 달릴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된 이후 남북관계는 금세 얼어붙었다. 12월1일에는 남북 정기화물열차 운행 중단 사태가 벌어졌고 개성 승조도 없어졌다. 철도가 끊긴 것을 신호로 남북은 갈등과 대결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먼지를 뒤집어쓴 동해북부선 연결사업에 한 줄기 빛이 비친 때는 2018년 4월27일이다. 판문점에서 만난 문재인-김정은 남북의 두 정상은 “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하여 10·4선언에서 합의된 사업들을 적극 추진해 나가며 1차적으로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와 도로들을 연결하고 현대화하여 활용하기 위한 실천적 대책들을 취해나가기로 하였다”는 내용이 포함된 판문점 선언을 발표했다. 동해북부선 철도 연결이 평화와 공동번영으로 나가는 중요한 열쇠임을 다시 확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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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가 대립을 뚫는다면
다시 6월5일, 북으로 이어진 국도를 타고 고성군 천진리 역터를 본 뒤 문암교 옆에 남아 있는 철도 교각에 도착했다. 천진리역을 출발한 열차가 달려왔던 길은 황토색 비포장도로로 이어져 오다 교각 앞에서 끊겼다. 이 철교를 넘으면 문암역을 만난다. 하루를 머문 뒤 이튿날 아침 일찍 문암역 철도 관사를 찾았다. 옛 관사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고 관사 앞에는 송암리 경로당이 있다. 경로당 앞 그늘 정자에 어르신들이 볕을 피해 쉬고 계셨다. 철도 이야기를 꺼내자 어르신들이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기차 오는 소리 들리면 다 철둑길로 따라 나가서 손 흔들고 그랬어! 기차 기적 소리가 얼마나 큰지 놀라기도 하고.” 올해로 75살인 45년생 황경자 어르신은 마치 어제 일처럼 동해북부선의 추억을 들려주셨다.
시간에 묻혔던 이야기를 뒤로하고 공현진 마을로 향했다. 한옥 마을이 시작되는 옥수수밭이 공현진역이 있던 자리다. 공현진역을 출발한 열차는 지금의 7번 국도를 가로질러 공현진 해변으로 향하다 산 귀퉁이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3년 전 한 방송사 취재팀 안내차 찾아왔을 때만 해도 나무가 우거진 임도를 따라 들어가야만 했다. 숨어 있던 공현진 터널은 주변이 개발되면서 모습을 온전히 드러냈다. 터널 입구에는 수십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전쟁의 상처를 보여준다. 터널 안벽에 움푹 파인 공간은 이 굴이 철도 터널임을 알려준다. 보수작업을 하는 선로정비원들이 열차 접근 신호를 받으면 대피하는 공간이다.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물치항 쌍천교 인근의 쌍굴다리. 이 쌍굴다리 위로 기차가 달렸다.
터널을 빠져나온 열차는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고 간성을 향해 달렸다. 간성읍 신안리 석재 공장에는 간성역 승강장 구조물이 남아 있다. 간성 북쪽을 흐르는 북천을 넘는 자전거 다리에는 동해북부선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어 이곳이 옛 철교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북천을 넘은 열차는 거진역을 지나 현내역에 닿았고 마차진 터널을 통과했다. 1935년 개통된 구간임에도 최근에 지어진 터널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콘크리트 상태가 튼튼하고 말끔하다.
마차진 터널 북쪽은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다. 이곳을 지나 북으로 5분 정도만 더 달리면 배봉리 마을을 만나게 된다. 이 마을에는 동해북부선 남쪽 구간에서 가장 큰 교각이 남아 있다. 교각은 캔버스가 되어 남북철도 연결과 통일을 염원하는 큰 벽화가 그려져 있다. 교각의 남쪽으로 이어진 언덕길로 오르면 민가가 한 채 보이고 길이 끊긴다. 길이 끝난 지점에서 산속을 향해 숲길을 걸어가면 거짓말처럼 은밀하게 숨어 있는 터널을 만나게 된다. 동해북부선 남쪽 구간 최북단 터널인 배봉리 터널이다. 배봉리 터널을 빠져나온 열차는 바로 제진역에 닿았고 삼일포, 외금강을 지나 원산까지 달렸다. 시대의 무게를 짊어진 민중들은 달리는 기차 안에서 창밖으로 펼쳐진 동해바다의 풍광을 보며 서로를 위로했을 것이다. 기관사는 속도계 바늘만큼 흔들리는 기관차를 윽박지르기도 하고 쓰다듬기도 하면서 강원의 산과 들을 주파해냈을 것이다.
남북관계는 다시 얼어붙었다. 겨우 기념식을 치르고 설계와 건설에 들어간 동해북부선의 앞날은 안개에 싸여 보이지 않는다. 동해북부선은 증오로 끊어진 길이었다. 퇴임한 통일부 장관의 말처럼 증오로 증오를 이길 수 없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남북관계 개선의 실천 의지는 철도를 통해 보여줄 수 있다. 우리는 또 길을 낼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철도가 열 수 있다. 남북을 잇고 대륙을 여는 동해북부선은 평화의 철도가 되어 달려야 한다.
글·사진 박흥수 철도기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