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기술교육 협동조합 ‘여기공’ 이사 5명 중 문하(임주희), 인다(이현숙), 자베(박소연)씨가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의 여기공 사무실이 있는 공유오피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며 밝게 웃고 있다.
“여성으로부터 시작해 모두가 안전하고 즐겁게 기술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여기공은 여성과 기술을 연결하는 자리를 만드는 회사다. 여성 대상 기술교육과 여성 기술인 연결망 구축을 중심으로 여성 친화적인 작업 공간 조성, 성별 구분 없이 모든 기술인을 대상으로 한 젠더스쿨 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잠깐, 여성으로부터 ‘시작’하는 기술 문화라니. 이 표현에는 전복의 기운과 함께 자신감이 은은하게 배어 있다. 권력의 매체인 기술은 역사적으로 남성이 장악해왔기 때문이다.
지난달 30일과 이달 15일, 두 번에 걸쳐 여기공의 주인공들을 만났다. ‘여성으로부터 출발해 모두’에게 이르는 길을 그려가는 중이라면서 그
‘꿈의 지도’를 꺼내 보여주었다.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다 가져가라고 했다. “출발점은 분명히 여성이되 목적지를 여성으로 가두지 않는” 지도였다.
서울 마포구 신수동에 있는 공유오피스에 자리잡은 여기공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했다. 여기공 이사 5명 중 인다(이현숙), 자베(박소연), 문하(임주희)가 함께했다.
_________
여기, 스스로 서는 여성
―여성 기술자가 여성을 대상으로 주택 수리 기술을 공유하는 수업 ‘집 고치는 여성들’(5월9일~7월23일) 수강생 모집이 순식간에 마감됐어요.
인다 “네. 처음엔 14명(1개 반) 정원이었는데, 대기 인원이 100명쯤 됐어요. 그래서 추가로 반을 2개 더 개설했어요. 10회 90만원인 수강료가 저렴한 편이 아니어서 그렇게 많이 신청하실 줄은 몰랐어요. 저희도 엄청 놀랐죠.”
―수강생 연령대가 2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합니다.
인다 “저희가 2018년부터 용접, 목공, 직조의 기초를 다루는 단기 워크숍도 해오고 있는데요, 그때부터 연령대가 이랬어요. 20~30대가 대부분인데 40~60대도 꼭 뵙게 돼요. 세대를 불문하고, 살면서 기술 배울 기회가 없다시피 했다고 얘기해요. 어렵게 기술교육을 받으러 가면 강사도 수강생도 거의 다 남성인 게 현실이죠. ‘집에 남자 없냐’ ‘얼굴이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내가 해줄게, 이리 줘봐’ 이런 차별의 언어를 너무 많이 들어온 거예요.”
‘집 고치는 여성들’ 수업에 참가한 20~50대 여성들이 전동드릴 사용법을 배워보고 있다.
한국판 미투가 불붙으며 페미니즘이 공론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2018년. 바로 그해 8월 여기공의 모태 ‘여-기’가 탄생했다. ‘여-기’는 여성 기술교육 프로젝트팀으로, 현재는 지역에서 활동 중인 세모(민재희·여기공 이사)와 인다, 자베 이렇게 3명이 꾸렸다. 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거나 중퇴하고 20대 중반에 들어간 대안학교(하자센터 하자작업장학교)에서 2년간 목공, 용접, 직조, 미장 등 ‘적정기술’을 공부한 친구 사이다. 이후 문하와 조엘(김지선·여기공 이사)이 연이어 합류했고, 지난해 11월 ‘여기공’이라는 협동조합으로 팀의 규모와 성격이 확장됐다.
여기공 이사 5명은 모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여성이다. “자립”과 “삶의 전환에 대한 절박함”이 이들의 구심점이 됐다. ‘여-기’는 ‘여성과 기술’의 줄임말이자 시공간의 현존인 ‘여기’를 뜻하기도 한다. 여기에 공유, 공간, 공동체, 장인(工·공)의 의미를 더한 이름이 ‘여기공’이다.
―처음 개설한 수업 주제가 ‘여성의 집수리 기술’인 이유는요?
인다 “여성은 기술을 만날 기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수리를 해보기도 전에 못 한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그러니까 남에게 의존하게 되죠. 하지만
기술 공부를 직접 해보면, 어렵지 않다는 걸 알게 돼요. 흔히 공구는 힘이 세야만 잘 쓸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공구 사용은 힘의 세기가 아니라 원리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여성의 힘만으로 충분해요. 드릴이 있으면 누구나 구멍을 뚫을 수 있듯이요.
기술을 자립의 도구로 삼은
여성들이 자기 손으로 자기 공간부터 고칠 수 있다면, 삶의 전환이 일어날 거라고 봐요.”
_________
느림, 어떤 속도보다 빠른 템포
―이사님들은 기술을 만나고 무엇이 달라졌어요?
문하 “질문과 언어가 확실히 바뀌었죠. ‘이거 고칠 수 있는 남자분?’ 대신 ‘이거 고칠 수 있는 분?’”
인다 “소비하는 패턴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기술은 만들기잖아요.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게 가장 큰 변화예요. 지금 제가 입은 바지는 작업복·유니폼 디자이너 성아리님이 만드신 건데요. 누가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물건이 좋아졌어요.”
여기공 사무실이 있는 건물 옥상에 천장 높이가 약 170㎝인 실습장 겸 작업장을 만들고 있다. 원래 있던 공간을 새로 꾸미는 것인데, 여성들이 올려다보며 전등을 갈거나 배선하는 연습을 하기에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편안한 높이여서 여기공의 첫 실습장으로 낙점됐다. 이곳엔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다양한 크기의 공구가 음악 기호 크레셴도(<·점점 세게 연주하라는 뜻) 모양을 그리며 놓여 있다. ‘남성 표준’의 단일한 크기가 없다. “더 많은 사람이 기술을 누리려면 더 많은 디테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술을 배우러 온 분들께 어떤 점을 가장 강조하시나요?
자베 “천천히 가는 게 결국 제일 빠르다는 거예요.”
―근사한 기술이네요.
자베 “사소하게 장갑 끼는 것부터 안전수칙을 다 지키고, 신중하게 실행하는 일련의 과정이 불편할 수 있어요. 하지만 불편해도 천천히 가지 않으면 반드시 수정할 일이 생겨서 원점으로 돌아가요. 드릴이 쉽고 재밌으니까 흥분될 때, 그때가 바로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가야 할 때예요. 나사가 비뚤게 박히기 쉽거든요.”
―기술을 어디서 배우셨어요?
문하 “저는 여기공에서 기술을 처음 배웠어요. 제 기술 선생님은 인다예요.”
인다·자베 “기본적으로 하자작업장학교에서 배웠고요. 철수님이 그중 한분이에요.”
―무슨 철수요?
인다 “나무를 다루면 목수라 하듯이, 선생님은 철을 다루니까 스스로 철수라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하세요. 그분은 남성이지만 ‘너희는 여자니까’ ‘배우다가 중간에 결혼할 거니까’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어요.”
‘철수’ 진일주(57)씨는 2017년부터 하자작업장학교에서 인다, 자베, 세모에게 용접과 적정기술을 가르쳐준 스승이자, 지금도 이들과 함께하는 벗이다. 그는 현대중공업 울산공장에서 37년간 기술자로 일한 용접 전문가로, 전국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노동문화정책연구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지난해 퇴직한 뒤 적정기술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_________
기술, 여성의 일상에 스며들면
―기술을 가르쳐준 선생님 중에 여성도 있나요?
인다 “저희 선생님 중에 여성은 없었어요. 그만큼 찾기가 어려워요. ‘선배 여성 기술자는 어디에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지난해 6~10월 여성 기술자들을 찾아 전국을 다녔죠. 타워크레인 기사, 형틀 목수, 수제 자전거 제작자 등 7명을 만나서 인터뷰했어요. 굉장한 힘과 위로가 됐죠. 어림짐작은 했지만 여성 기술인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럼에도 얼마나 끈질기게 기술을 이어가고 있는지를 봤어요.”
여성 기술자는 얼마나 있을까. 먼저 한국산업인력공단 ‘국가기술자격통계’(2018년)를 보면, 기술 관련 자격을 딴 여성은 전체 취득자의 36.3%(24만9359명)를 차지한다. 그런데 가장 높은 기술자격 등급인 ‘기술사’의 경우 여성 비율은 6.7%(129명)에 불과하다. 기술 수준이 높아질수록 여성 기술자가 확 줄어드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대표적인 기술산업인 건설업 통계로도 확인된다. 한국건설기술인협회 통계 자료(2019년)를 보면, 건설기술인 가운데 기술사로 분류된 여성 비율은 2.1%뿐이다.
이렇게 올라갈수록 단단해지는 유리천장에도, 건설 일을 하는 여성은 완만하나마 증가세를 보인다. 여성 건설기술인 비율은 2005년 10.4%에서 지난해 14.2%로 늘었다. 그래도 갈 길은 아직 멀다. 김민형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분석한 결과, 2018년 12월 말 기준 건설업 취업자 중 여성 비율은 9.9%로 산업별 성비로 최하위 수준이다. 전체 산업 취업자 중 여성 비율 42.9%에도 한참 못 미친다.
인다 “건설 현장에선 대개 2년 정도 보조인력으로 일하는데 그 이후로 여성에겐 안전 관리 등 지원하는 성격의 일을 주로 맡긴대요. 남성은 본격적으로 기술을 배우고요. 기술은 도제식으로 전수되는 면도 있다 보니까, 이런 차별적 구조에선 고급으로 올라갈수록 여성과 남성의 기술 보유 능력 차이가 더 벌어질 수밖에 없어요. 기술이 그렇듯 현장이 남성 중심적으로 설계된 현실도 여성을 버티기 어렵게 만들어요. 현장에선 남성 노동자 뒷모습만 봐도 놀란다는 여성 기술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소변 누고 있을까 봐요. 내 일터인데, 가보면 남성용 소변통이 여기저기 있다는 거예요.”
―기술이 여성의 일상에 자리잡으면, 기술계에 만연한 젠더 고정관념에도 균열이 생길까요?
문하 “여성 기술자, 공구를 다루는 여성의 모습이 사회 표면에 자주 드러나기를 기대해요. 기술을 경험할 기회를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다 보면, 여성은 기술에 약할 거란 편견이 실은 얼마나 허약한지 드러나겠죠.”
자베
“지난해 남성 집수리 기사님들을 대상으로 젠더 감수성 교육을 열었는데요, 암나사·수나사 대신 볼트·너트라는 말을 쓰자는 등 실용적인 제안들을 했어요. 그땐 참여자가 4명뿐이었는데, 현장에서 더 고민하게 될 것 같다는 반응을 대부분 보내주셨어요. 남성 기술자를 위한 젠더 감수성 교육은 올해도 열 거예요.”
인다 “여성으로부터 출발하는 기술 문화를 펼쳐가고 있지만, 그런 저희는 남성을 대결하는 관계로 여기진 않아요. 이게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여성 기술인의 동료 대부분이 남성이고 기술은 대개 협업으로 완성되기 때문에 남성을 적대시할 수는 없어요. 철수님 같은 좋은 선생님의 영향도 컸지요. 여기공은 분명 여성으로부터 시작하는 기술 문화를 지향해요. 그리하여 도착하고 싶은 곳은 ‘모두를 위한 기술’이에요. 여성뿐만 아니라 모든 젠더, 아동·청소년, 장애인, 몸이 작든 크든 누구나 안전하고 편안한 상태에서 기술을 누릴 수 있길 바랍니다.”
문하, 자베, 인다씨가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 여기공 사무실 옥상에서 대형 목재 플랜터를 제작하기 위해 설계도를 그리는 모습.
―가장 나누고 싶은 기술의 매력이 뭔가요?
인다 “감각의 전환이죠. 풀어서 말하자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안전해야 안전의 조각이 채워져요. 그래야 최대한 내 감각에 집중할 수 있고, 또 그래야 기술을 익힐 수 있어요. 그 기술이 특정 젠더나 환경을 위협하는 쪽으로 쓰이지 않아야 기술의 지도가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기술과 젠더와 생태가 함께 가지 않을 수 없어요. 이것들이 얽혀서 같이 전달되어야만 삶에 기술이 들어온다고 생각해요. 착취하는 기술이 아니라 순환하는 기술이 가능하네, 이런 ‘반전’ 매력!”
글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사진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