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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강제퇴거당한 쪽방 주민 5명 중 1명꼴로 세상에 없다

등록 2020-05-30 07:11수정 2020-06-11 13:03

[토요판] 커버스토리
가난의 경로 5년

2015년 동자동 쪽방 강제퇴거 사태
쫓겨난 주민들 45명 5년 동안 추적

67% 직선거리 100m 안에서 이주
69% 쪽방에서 쫓겨나 다시 쪽방
5년 새 20%인 9명 사망…6명 무연고
3명이 고립사, 2명 사고(의심)사

세입자 비대위원장이었던 김택부
지난 정월대보름 홀로 죽어 발견
이기방 사망은 병원 의료사고 의심
싸워줄 가족 없어 책임 묻지 못해
지난 22일 저녁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9-2× 앞에 선 김윤창(가명·61)이 내리는 어둠을 맞고 있다. 그는 5년 전 강제퇴거 된 사람들 중 지금까지 9-2×에 살고 있는 두 명 중 한 명이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지난 22일 저녁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9-2× 앞에 선 김윤창(가명·61)이 내리는 어둠을 맞고 있다. 그는 5년 전 강제퇴거 된 사람들 중 지금까지 9-2×에 살고 있는 두 명 중 한 명이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 2015년 초 한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 중 한 곳에서 강제퇴거 사건이 벌어졌다. 쪽방을 리모델링해 외국인 대상의 게스트하우스로 만들려던 건물주는 주민 45명 전원의 방문마다 퇴거 통보 딱지를 붙였다. 그로부터 ‘공사 시도~저항~단전·단수~이사~철거~법정 공방~공사 중단~쪽방으로 땜질~귀가’로 이어지는 시간이 그해 연말까지 펼쳐졌다. 이 전 과정을 취재한 내용이 ‘가난의 경로’란 제목으로 <한겨레21>에 1년 동안 연재(☞ 2015년 4월~2016년 5월 기사 모음)됐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쫓겨나는 일은 일상이었다. 쫓겨나고 다시 쫓겨나는 일을 되풀이하며 그들의 가난은 단단해졌다. 사건이 마무리되고 다섯 해가 흘렀다. <한겨레>는 그 시간 동안 ‘사건 이후’를 계속 좇아왔다. 모이고 고여 공고화되는 가난은 ‘사건의 순간’이 아니라 ‘사건이 지나간 일상’에 있었다. 그 사이 주민 45명 중 9명(20%)이 사망했다. 그들은 죽고 나서야 더는 쫓겨나지 않았다. 그 9명의 마지막 길을 따라가며 ‘가난의 경로 5년’을 되밟았다.

그들은 죽고 나서야 더는 쫓겨나지 않았다.

“이 방에 살던 사람요? 돌아가셨다던데요.”

지난 19일 108호 방문을 열고 나온 남자가 말했다.

“우리 이사 온 지 한 달도 안 됐어요.”

남자 옆에서 여자가 거들었다.

한 사람으로도 꽉 차는 크기의 방에서 두 사람이 앉고 누운 그 방엔 빈틈이 없었다.

그 방 108호는 5년 전 106호였다. 2015년 건물주가 게스트하우스로 리모델링을 한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강제퇴거시킨 뒤 보수공사(1층 방 두 개 추가)를 거쳐 108호가 됐다. 공사 전까지 주민 45명이 거주하던 쪽방 건물에서 “이 방에 살던 사람”은 당시 세입자비상대책위원장이었다. 두 사람이 이사 오기 두 달 전 ‘그 사람’ 김택부(가명·향년 81)는 그 방에서 홀로 죽어 발견됐다.

“돌아가셨다던데요”

정월 대보름 전날(지난 2월7일)이었다.

“오늘 근무 끝. 내일 보세.”

오후 4시께 김택부는 방범대 초소(새꿈어린이공원 안)에서 일어섰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동네 자율방범대 1조 조장으로 활동해왔다. 설날에 오지 않은 아들 부부가 보름엔 찾아와주길 바라며 그는 차오르는 달을 밤이 깊도록 올려다봤다.

이튿날 아침 서울 용산구의 최저기온은 영하 2도였다. 문 열린 방 안에서 그는 침대 매트리스에 걸터앉은 모습으로 몸이 식어 있었다. 기다리던 대보름이 밝았고,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던 중이었고, 심장에 예고 없이 쇼크가 왔고, 다시 매트리스에 앉아 가슴을 움켜쥐었고, 그러다 심장이 멈춘 것으로 그의 죽음을 경찰에 신고한 방범대 부대장(주민)은 추정했다.

강제퇴거를 알리는 통지문이 방문 앞에 붙은 지 만 5년을 꽉 채우고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김택부는 강제퇴거에 반발하며 끝까지 방을 사수한 4명 중 한 명이었다. 젊어서 쓰레기를 주우며 넝마주이들의 ‘털보 형님’이 됐던 그는 늙어서 9-2×에 들어와 비대위원장이 됐다. 다른 사람들이 쫓겨나는 것을 막진 못했으나 자신이 쫓겨나는 것만은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가난이 모인 동네였다. 이 나라에 철도가 깔린 뒤부터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사람들이 맞닥뜨린 ‘서울의 첫 얼굴’이자 가난이 다닥다닥 밀집했던 ‘서울의 뒤통수’였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판잣집들을 ‘혁명적으로’ 제거(군사쿠데타 8일 뒤인 1961년 5월24일 “혁명과업 완수” 차원에서 1597동 철거 발표)하고, 건물이 통째로 주저앉는 참사(1964년 5월2일 4층짜리 건물 붕괴 등)가 되풀이되고, 중구청(당시 관할 행정기관)이 ‘새봄 새 사업’(1970년)으로 주민 2600여명을 광주대단지(1971년 ‘광복 이후 최대 도시빈민 투쟁’이 벌어진 성남의 옛 이름)로 강제이주를 추진하고, 수십년에 걸친 개발과 재개발이 ‘정비’와 ‘정화’란 이름으로 끊임없이 박멸하려 해도, 가난은 빌딩숲 아래 ‘음지바른’ 땅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9-2×.

1968년 사용승인이 난 지하1층·지상4층짜리 노후 건물이었다. 동자동의 ‘메인 골목’에 있었다. 어디서도 메인일 수 없는 건물들이 그 골목에선 메인이었다. 그 골목에선 가난이 메인이었다. 가난한 방들이 메인을 구성하는 골목에서 가장 풍요로운 것은 가난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모아 그들의 노동력으로 덩치를 키운 도시가 그 가난을 몰아내며 팽창해가는 시간 속에 그 건물 9-2×와 그 사람들 45명(71.1%가 60대 이상, 68.8%가 노숙 경험, 20%가 11년 이상 거주)이 있었다.

2015년 2월 동자동 9-2×에서 그 사람들이 쫓겨났다.

너무 노래서 눈부신 퇴거 통보 딱지가 방문들마다 붙었다. 이주대책이나 보상방안 없이 한 달 보름이란 기한만 주어졌다. 주민들은 저항했으나 공사는 강행됐다. 방들이 해머에 맞아 깨지고 전기와 수도가 끊기면서 9-2×는 ‘철거촌’으로 변했다. 행정기관을 찾아다니며 부당함을 호소하던 주민들은 결국 한 사람씩 방을 뺐다. 45명 중 30명(66.6%)이 직선거리 100m 안에서 이사했다. 고인 가난은 흩어져도 멀리 가지 못하고 돌아와 한데 고였다. 쪽방에서 쫓겨난 그들 중 서른한명(68.8%)이 다시 쪽방에 짐을 풀었다. 헌법이 보장한 거주·이전의 자유는 자유를 살 돈이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권리였다. 퇴거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은 폐허와 공존하며 삶을 견뎠다. 법원이 주민들의 공사중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자 건물주는 게스트하우스로의 리모델링을 포기하고 쪽방으로 땜질 복구했다. 끝까지 버틴 4명과 공사 뒤 재입주(사태를 지켜보던 서울시가 ‘월세 동결, 거주기간 보장’을 전제로 건물 전체를 임차한 뒤 돌아오길 원하는 주민들에겐 우선 방 배정)한 4명만 9-2×에 남았다.

그리고 5년이 흘렀다.

노란 원색으로 칠한 건물 안에서 여전히 보수되지 않은 잿빛 가난이 충만했다. 주민 45명은 36명이 돼 있었다. 김택부를 포함해 9명이 세상을 떠났다. 강제퇴거에 내몰렸던 주민 5명 중 1명꼴로 세상에 없었다. 사망한 주민들 중 쫓겨나지 않고 자기 방에서 숨을 거둔 사람은 김택부뿐이었다. 그를 뺀 8명은 쫓겨나 이사한 방에서 죽거나 옮겨간 방에서 병원으로 실려 가 숨졌다. 그들은 죽을 때도 이생으로부터 쫓겨나듯 죽었다.

잿빛이었던 동자동 쪽방 건물 9-2×(맨 오른쪽 건물)는 2015년 강제퇴거 사태 뒤 노란색으로 칠해졌다. 외벽은 화사한 원색으로 바뀌었으나 내부의 가난한 무채색은 변하지 않았다. 사진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 거리 1m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 치료 효과 없이 임종 과정 기간만 연장하는 의료를 받지 않겠습니다.”

김택부 사망 2년9개월 전 김동기(가명·향년 81)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명했다. 그는 방 앞에서 쓰러져 응급실에서 깨어났다. 의향서 맨 뒷장 빈 종이에 “유원(언)”을 썼다. 힘 빠진 글씨가 날아갔다.

“장례 치러 달라. 유골 뿌려 달라. 내 삶을 마치고 떠나갑니다.”

2년 전 강제퇴거 직전에도 그는 이름 석 자를 넣어 글을 썼다. 굵은 매직펜으로 종이에 적은 뒤 지하10호 방문에 붙였다.

“제발 그냥 살게 (해)주시든지, 아니면 이사 비용 주세요.”

하나는 지긋지긋한 인생이라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항의였고, 다른 하나는 지긋지긋한 인생을 함부로 연장하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한국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그는 어렸을 때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일하며 밥을 구했다. 젊었을 땐 일급 요정의 ‘처사’(웨이터)로 정치주먹 “김두한과 이정재를 서빙”했고, 늙었을 땐 금붕어의 여린 생명을 팔아 자신의 생명을 건졌다. 기운을 잃은 뒤엔 돈 없이 국밥을 시켜 먹고 “신고하라”며 식당 주인과 싸웠다. 그를 9-2×로 이끈 길 위엔 전쟁이 먹이고 살찌운 궁핍과, 정치권력과 정치깡패가 머리를 맞대고 시국을 논하던 시대와, 국가와 기업의 성장을 위해 노동이 배고픔을 견뎌야 했던 시절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두 개의 글을 쓰는 사이 김동기는 지하10호에서 쫓겨나 맞은편 지하1호로 재입주해 있었다. 2년 동안 그는 복도 너비 1m만큼 움직이고 죽었다. 그 거리가 그의 지긋지긋한 삶과 지긋지긋한 죽음 사이의 간격이었다. 유언장을 쓰고 두 달 보름 뒤였고, 9-2×에서 쫓겨난 지 1년8개월 만이었다. 주검을 인수할 가족이 나타나지 않아 무연고로 화장됐다.

“낙도옹가앙 강바아라아아암이 치마폭을 스치이이면~.”(가요 ‘처녀 뱃사공’ 가사)

정영보(가명·향년 74)는 그 노래를 부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9-2× 307호에서 86㎞ 떨어진 노숙인 요양시설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9-2× 주민들 중 가장 먼 곳으로 이주한 사람이었다. 퇴거 사태 때 동네를 찾아온 가톨릭 수녀들이 그의 방을 청소하고 충북 음성 꽃동네로 데려갔다. 초록 막걸리병이 가득 쌓여 초록 들처럼 펼쳐진 방에서 그는 방 가운데를 초록에 내주고 벽에 바짝 붙어 잤다.

꽃동네에서도 초록이 그리울 때면 그는 몰래 요양시설을 나와 읍내 구멍가게로 갔다. 초록병을 따고 한잔 두잔 하면 눈앞에서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정영보가 사라질 때마다 찾아다니느라 고생한 수녀들은 그가 눈에 쉽게 띄도록 노란색 윗옷을 입혔다. 그가 어느 날 수녀에게 부탁해 강원도 화천강 옆의 고향집을 찾아갔다. 헐리고 없는 집의 터를 더듬으며 정영보는 아버지와 새엄마를 떠올렸다. 술을 마신 두 사람은 정해진 순서처럼 서로 싸웠고 정해진 순서처럼 그를 때렸다. 멍이 차오를 때마다 그의 몸에서도 초록이 짙어졌다.

“군인 간 오라버어어어니이이이 소오시이이익이 오오오네~.”

강 옆에서 노래 한 자락을 뽑았는데 소리가 개운치 않았다. 입안에서 혀암이 자라며 발음을 먹어치웠다. 그는 2018년 2월 숨을 거뒀다. 9-2×를 떠난 지 2년9개월 만이었다. 같은 요양시설에 사는 동료들이 모여 가톨릭 장례를 치렀다. 꽃동네 묘역에 안치됐다.

“쓸개 떼어내는 수술을 했더니만 12㎏이 훌렁….”

김상천(가명·81)은 얼굴을 몰라볼 정도로 살이 빠져 있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몹시 야윈 그가 지난 7일 동자동의 한 골목에 조용히 서 있었다. 지난해 “숨이 차고 죽겠어서 119도 안 부르고 병원을 찾아갔더니 의사가 바로 입원시키고 수술한 뒤부터” 몸무게가 급격히 줄었다. 5년 전의 기운도 체중과 함께 소진된 듯했다. 그는 누구보다 완강하게 퇴거에 저항했었다.

“같이 떨어져 뒈져 불자고.”

건물주가 방들을 부수며 내부 철거를 시작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2015년 6월1일)이었다. 화가 치민 김상천이 공사를 지켜보던 건물주를 옥상으로 잡아끌었다.

“이렇게 살아서 뭐 허겄냐고.”

죽을힘을 다해 팔을 잡아당기는 그와 딸려가지 않으려는 건물주가 서로의 팔을 움켜잡고 줄다리기를 했다. 팔을 빼고 계단을 내려온 건물주는 경찰서를 찾아가 김상천을 폭행 혐의로 신고했다. 김상천은 대낮의 빛도 닿지 않는 지하 깊숙한 방(9호)에 살았다. 옆방에서 김동기가 쓰러지는 걸 볼 때마다 세살 어린 그가 달려와 부축하곤 했다. 결기 넘치던 그가 건물주의 단전·단수 뒤 어둠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2m 거리의 옆 건물로 이사했다.

강제퇴거 사태 뒤 5년 동안 동자동 9-2× 주민 45명 중 9명(20%)이 세상을 떠났다. ➊ 사태 당시 세입자 비대위원장이었던 106호(공사 뒤 108호) 김택부는 지난 정월대보름날(2월8일) 방에서 심근경색으로 홀로 사망했다. ➋ 9-2×에서 쫓겨난 지하5호 서혜자는 10년 전 보수공사를 이유로 쫓겨났던 건물로 돌아갔다. 2018년 5월 요양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➌ 9-2× 퇴거 주민들 중 가장 먼 곳(충북 음성 꽃동네)으로 옮겨간 307호 정영보는 혀암이 악화돼 2018년 2월 노숙인 요양시설에서 세상을 떠났다. ➍ 보수공사 뒤 9-2×로 가장 먼저 돌아왔던 304호 이수걸은 2015년 11월 재입주 열흘 만에 출입구에서 넘어져 실족사했다. 그가 남긴 운동화(사진 왼쪽)가 주인 없는 방문 앞을 지키고 있다. 류우종 &lt;한겨레21&gt; 기자 wjryu@hani.co.kr
강제퇴거 사태 뒤 5년 동안 동자동 9-2× 주민 45명 중 9명(20%)이 세상을 떠났다. ➊ 사태 당시 세입자 비대위원장이었던 106호(공사 뒤 108호) 김택부는 지난 정월대보름날(2월8일) 방에서 심근경색으로 홀로 사망했다. ➋ 9-2×에서 쫓겨난 지하5호 서혜자는 10년 전 보수공사를 이유로 쫓겨났던 건물로 돌아갔다. 2018년 5월 요양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➌ 9-2× 퇴거 주민들 중 가장 먼 곳(충북 음성 꽃동네)으로 옮겨간 307호 정영보는 혀암이 악화돼 2018년 2월 노숙인 요양시설에서 세상을 떠났다. ➍ 보수공사 뒤 9-2×로 가장 먼저 돌아왔던 304호 이수걸은 2015년 11월 재입주 열흘 만에 출입구에서 넘어져 실족사했다. 그가 남긴 운동화(사진 왼쪽)가 주인 없는 방문 앞을 지키고 있다. 류우종 <한겨레21> 기자 wjryu@hani.co.kr

85m 거리 쪽방으로 이주한 박기택
4년 만에 똑같은 이유로 퇴거 몰려
서혜자는 10년 전 쫓겨난 곳 재입주
주민 다수가 강제퇴거·철거 되풀이

누구는 거듭 쫓겨나며 더 가난해지고
누구는 가난을 쫓아내며 이득 얻어
45명 중 현재 해당 건물 거주 2명뿐
임대사업자 건물주 월세 3만원 인상

노란 원색으로 색칠한 건물 안에서
여전히 보수되지 않은 잿빛 가난 충만

퇴거와 철거의 무한궤도

퇴거 사태가 한창일 때 김상천은 205호 박기택(가명)과 앞날을 걱정하며 자주 ‘골목 토론’을 벌였다.

박기택은 9-2×가 완공된 1968년(당시 26살)부터 동자동에 살았다. 쪽방이 아니라 판잣집이 동네의 대표 건축물이던 시절이었다. 그때만 해도 가족 단위 주민이 많았고 이젠 동네에서 볼 수 없는 아이들이 골목을 뛰어다녔다.

205호를 나온 박기택은 85m 떨어진 동자동 35-×××로 이삿짐을 날랐다. 이주 4년 만(2019년)에 그곳에서도 강제퇴거(용도 변경 이유)가 진행됐다. 9-2×에서 쫓겨나 옮겨간 건물에서 그는 9-2×에서와 똑같은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저주인지 다행인지 그는 퇴거 2개월을 앞두고 사망(지난해 4월)했다. 지켜보는 사람 없이 혼자 죽어 발견됐다. 죽기 전 음식을 잘 넘기지 못했고 막걸리만 마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4년 사이 같은 이유로 거듭 쫓겨나게 된 처지가 그의 죽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진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영정으로 쓸 사진이 없자 동네 주민들이 수년 전 함께 찍은 사진을 찾아 그의 얼굴을 오려냈다. 무연고 사망 처리됐다. 향년 77.

가난은 퇴거와 철거의 무한궤도 안에서 깊어졌다.

9-2×의 주민 다수가 강제퇴거를 되풀이해 겪었다. 누군가 쫓겨났다. 다른 곳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흘러와 앞서 쫓겨난 사람의 자리를 채웠다. 한 번 쫓겨난 사람(박기택)은 쫓겨간 곳(35-×××)에서 자신이 쫓겨왔던 동일한 상황에 놓이며 다시 쫓겨났다. 쫓겨난 누군가(지하5호 서혜자)는 힘들게 정착한 방(9-2×)에서 다시 쫓겨나 과거 자신이 쫓겨난 곳(40m 거리의 9-×)으로 돌아갔다. 쫓겨나고(성북구 여인숙에서 리모델링을 이유로), 거듭 쫓겨나고(마포구 여인숙에서 건물이 철거되며), 계속 쫓겨났더니(9-2×), 쫓겨나는 일은 일도 아닌 사람(109호 조만수·현재 서대문구 매입임대주택 거주)이 돼 있었다.

그들에게 강제퇴거당하는 일은 일상이었다. 어떤 사람은 쫓겨나고 다시 쫓겨나는 일을 되풀이하며 더욱 가난해졌고, 어떤 사람은 그들을 쫓아내고 다시 쫓아내며 이익을 늘렸다. ‘특별한 퇴거 사태’를 ‘특별할 것 없는 일상’으로 만드는 도시 안에서 그들의 가난은 더욱 견고해졌다.

그런 거 없었다.

아버지다운 아버지, 따뜻한 남편, 애틋한 자식, 넉넉한 방…. 서혜자(가명)는 그런 거 없이 살아온 사람이었다. 어머니를 때리고 쫓아낸 아버지, 일하러 간다며 나간 뒤 돌아오지 않은 남편, 품어본 적 없는 자식, 작고 좁고 춥고 더운 방…. 서혜자에겐 그런 것만 있었다. 남들 다 있는 보통의 삶이 그에겐 없었다. “소설로 쓰면 우는 사람 많을 이야기”는 있었지만 소설거리도 되지 않는 그저 그런 심심한 인생이 그에겐 없었다.

건물주가 정한 퇴거 시한을 사흘 남기고(2015년 5월28일) 서혜자는 직선거리 40m 떨어진 방으로 짐을 날랐다. 그는 9-2×에서 2명뿐인 상시 거주 여성 중 한 명이었다. 온통 남자들뿐인 9-2×에서 그는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았다. 남자들이 오가며 들여다볼까봐 더워도 문을 열지 못하고 방 안에서 벌겋게 익어갔다. 9-2× 지하5호(14만원)보다 7만원이나 비싼 방이었지만 남자들이 버럭버럭 소리 지르던 9-2× 쪽으로는 한 톨의 미련도 없었다. 쫓겨난 그가 이사한 곳은 10년 전 보수공사를 이유로 쫓겨났던 건물이었다. 그에게 10년의 시간은 종점에서 출발해 종점으로 되돌아온 버스 같았다.

강제퇴거 직후부터 서혜자는 치매를 앓았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그는 동네 사람이 다녀간 날이면 마음이 흩어졌다. 병원이 면회를 차단하고부턴 자주 울었다. 강제퇴거 만 3년째 되던 달(2018년 5월) 그는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83.

슥슥슥슥.

이황수(가명)는 9-2×에서 서혜자의 옆방(지하4호)에 살았다. 중증의 관절염을 앓고 있던 그는 뒤꿈치를 땅에서 떼지 않은 채 발바닥 전체로 지면을 끌었다. 보폭은 10㎝였다. 관절염 없는 사람들이 타박타박 걸을 때 그의 보폭은 셀 수 없을 만큼 잘게 쪼개져 슥, 슥, 슥, 슥 했다. 그는 매일 10㎝씩 땅을 잡아당겨 수백m 저편의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먹은 뒤 다시 10㎝씩 땅을 밀어 지하방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밥이란 그렇게 온 힘을 짜내야 닿을 수 있는 물질이었다.

언젠가 그 10㎝들을 이어 붙이며 밥길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방 안에서 죽음이 몸을 말고 누워 있었다. 전날 밤 찾아와 잠자리를 청한 옛 노숙 동료가 호흡을 멈추고 주검이 돼 있었다. 월세를 내지 못해 고시원에서 쫓겨난 그가 이황수의 방에서 마지막 잠을 의탁했다. 밥 먹으러 가자는 말에 “어지럽다”던 그는 이황수가 슥슥슥슥 걷는 동안 스르르륵 삶을 멈췄다.

9-2×에서 쫓겨난 이황수가 이사한 방도 서혜자가 옮겨간 건물에 있었다. 이황수는 그 방에서 서혜자가 죽기 4개월 전 죽었다. 호흡이 정지된 채로 그를 찾아온 이웃의 눈에 띄었다. 그가 자신의 방에서 발견한 외로운 죽음처럼 그도 2018년 1월 자신의 방에서 그렇게 죽어 발견(향년 66)됐다. 강제퇴거 2년8개월 뒤였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45명 중 2명뿐

2014년 이황수에게 9-2× 지하방을 소개한 사람은 김윤창(가명·61·강제퇴거 전 311호)이었다.

그는 노숙 시절 만난 이황수를 형님으로 챙겼다. 그들은 굿당 일도 같이 했었다. 무속인들이 정기 좋은 산을 찾아다니며 굿을 할 때 그들은 굿에 쓸 무구와 음식을 짊어지고 뒤를 따랐다. ‘굿 성수기’ 동안 산속에서 먹고 자며 굿당을 관리하는 것으로 그들은 신령님의 신세를 졌다.

5년 전 김윤창은 퇴거에 불응하며 박살난 방과 깨진 벽돌 사이에서 살았다. 건물주가 전기를 끊은 그날 밤 복도에서 철거 잔해에 걸려 넘어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피를 흘리며 병원에 입원한 그는 며칠 뒤 10m 거리의 건물로 이사했다. 9-2× 보수공사 뒤 2××호로 재입주했다. ‘황수 형님’에게도 방을 잡아줬으나 그는 9-2×로 돌아오지 않았다.

시대가 난폭해질 때마다 역사는 부서진 사람들을 상한 음식물처럼 길모퉁이에 토해 놓았다. 젊어서 김윤창은 팔에 바늘로 용(龍)자를 새긴 뒤 먹물을 뿌렸다. 신군부가 한국 사회를 후려치던 1980년이었다. 용인지 이무기인지 거머리인지가 팔뚝에 있다는 이유로 군인들이 그의 목을 비틀며 삼청교육대로 끌고 갔다. 각종 짐승들을 대표해 붙잡혀 온 호랑이, 표범, 늑대, 오소리 등과 개골창에 처박혀 소총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맞았다. 불의한 정치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희생시켜 정의를 위장했다. 역사가 흘린 그 이야기들이 가난의 경로를 따라 굴러와 9-2× 방마다 드러누웠다.

“외출 중. 전화주세요.”

김윤창은 전화번호를 2××호 방문 앞에 붙여두고 살았다. 놓치지 말아야 할 전화가 있는 듯 방 안에 있을 때도 번호를 떼지 않았다. 그는 “당뇨 조절이 안되고 어지럼증이 심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있었다. “코로나19 탓에 입원 날짜가 잡히지 않아” 계속 대기 중이었다.

45명→8명→2명.

사태가 마무리된 2015년 말 9-2×엔 퇴거 주민 45명 중 8명만 남아 거주했다. 보수공사가 끝날 때까지 9-2×를 떠나지 않았거나(106호 김택부, 203호 박수광, 301호 김대광, 303호 박세기), 공사 뒤 되돌아온 주민들(지하10호 김동기, 105호 민태진, 304호 이수걸, 311호 김윤창)이 자신의 옛 방에서 그대로 살거나 방을 옮겨 살았다.

사태 뒤 5년이 차는 동안 그들도 9-2×에서 차례로 사라지고 있었다. 105호 민태진은 동자동의 다른 방으로 옮겨갔고, 203호 박수광과 301호 김대광은 동자동을 떠났으며, 지하10호 김동기, 106호 김택부, 304호 이수걸은 세상을 떠났다.

304호 이수걸(가명·향년 61)은 공사 뒤 9-2×로 가장 먼저 돌아온 사람이었다. 그가 건물 출입구 계단에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그의 재입주 열흘째 되던 날(2015년 11월20일)이었고 김윤창의 재입주 첫날이었다. 원인이 파악되지 않은 실족으로 그는 절명했다. 퇴거 통보 딱지가 붙고 열흘 만(2015년 2월15일)에 죽은 209호 나환수(향년 74)에 이어 그는 사태 뒤 두 번째로 사망한 사람이 됐다. 가난은 부검되는 사인이 아니었다.

2020년 5월. 45명 중 9-2×에 아직 거주 중인 주민은 2명(김윤창·박세기)뿐이었다.

“왜요?”

방(현재 3××호) 밖에서 누군가 부르면 박세기(가명·50)는 방문을 조금만 열고 물었다.

“뭐요?”

강제퇴거로 입주민 대부분이 바뀐 뒤부터 박세기는 경계심이 커졌다. 사태 당시 9-2×의 최연소자였던 그는 최장기 거주자(지금까지 23년)이기도 했다. 20대 후반일 때 그는 악명 높은 철거업체의 선봉대로 철거민들을 내쫓으며 9-2× 방값을 벌었다. “인간이 할 짓이 못 되는 그 일”을 그만두고 건설현장 노동자로 살던 그가 2015년 쫓겨날 처지에 놓이자 끝까지 싸우며 방을 지켰다. 가난한 처지는 돌고 돌았다.

이기방(가명·향년 63)은 억울하게 죽었다.

9-2× 퇴거 뒤 그도 서혜자·이황수가 방을 잡은 건물로 옮겨갔다. 평소 심장이 안 좋았던 그는 쫓겨난 지 2년10개월 됐을 때 대학병원에서 혈관 확장 수술을 받았다. 회복이 순조롭자 병원에서 잠시 외출해 동자동의 자기 방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이웃에게 담배도 사줬다. 병원으로 돌아간 지 이틀 뒤(2018년 3월) 그는 회진 돌던 의사에게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숨이 끊어지고 5시간쯤 됐을 때였고 침상엔 커튼이 쳐진 채였다.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가 일하는 대학병원에서 그는 자기 방에서 홀로 죽어간 사람들처럼 혼자 죽었다. 담당의는 “의사 생활 15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라고 달려온 동네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주민들은 황망했다. 이기방도 태어나서 그렇게 죽기는 처음이었다. 의료사고가 의심됐으나 병원 책임 없이 죽은 사람으로 정리됐다. 수술이 잘못돼 발생한 심장발작인지, 그의 심장이 너무 피곤해 알아서 멈춘 것인지, 죽음의 책임을 밝히며 싸워줄 가족이 그에겐 없었다. 무연고 사체로 뼛가루가 됐다.

사망자 9명 중 6명(김동기·박기택·서혜자·이황수·나환수·이기방)이 ‘인연 없는 죽음’으로 처리됐다. 4명(김택부·박기택·이황수·이기방)이 지켜보는 사람 없이 죽었고, 2명(이수걸·이기방)이 사고사하거나 사고로 의심되는 상황에서 죽었다.

노랑 안에 도사린 검정

서울시(서울역쪽방상담소에 운영 위탁)와 건물주의 임대차 계약(4년)은 지난 1월 종료됐다. 작년 가을부터 9-2× 주민들은 2015년 사태가 반복될까 우려해 모임을 갖고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계약 조건을 두고 논쟁하던 서울시-상담소-건물주는 지난 3월 말 재계약(4년)했다.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용도 변경할) 생각이 여전히 없진 않지만 5년 전처럼 문제 생길까봐 그냥 다시 계약했다.”(지난 20일 건물주)

건물주는 공동 화장실(층마다 2개)·세면장(층마다 1개) 등의 보강 공사를 해주는 조건으로 모든 방의 월세를 3만원씩 올렸다. 인상(7월부터)이 시작되면 9-2×에서 얻는 건물주의 월수입(공과금 등 뺀 순수익)은 560만원에서 714만원으로 늘어난다. 그는 9-2× 외에도 아파트 세 채와 상가 한 채를 소유한 임대사업자였다.

떨쳐지지 않는 가난, 반전 없는 죽음의 과정, 빈곤을 조일수록 증가하는 이익, 노랑 안에 도사린 검정. 5년의 시간이 ‘가난의 경로’ 위에 찍은 발자국들이었다.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난의 미로 안에서 끝나지 않는 가난한 이야기가 맴을 돌았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동자동 9-2×를 통과한 5년의 시간과, 쫓겨난 주민 45명의 경로와, 역사가 그 길에 흘린 이야기들이 최근 책 <노랑의 미로>(☞ 관련 기사)로 출간됐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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