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필코 살아내겠다는 의지가 높은 베트남 출신 지연(가명·31)씨는 경기도의 한 도시에서 한국인 남편(37), 아들 영민(가명·10)과 함께 산다. 버티컬 공장에서 일하며 스스로 힘으로 남들만큼 살고 싶다는 꿈을 가진 지연씨, 하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월세 12만원? 여기서 살아보자
지금 이사 가고 싶은 집은 전세보증금이 2700만원이래요. 내가 가본 집들 중에서 제일 좋아요. 친구가 살던 집인데, 벌레도 없고 화장실이 안에 있고 냄새도 안 나요. 부족한 돈은 대출받으려고 했는데, 말짱 꽝이 됐어요! 점심시간에 밥도 굶고 전세보증금 대출을 알아보러 은행에 갔는데 실망만 잔뜩 하고 왔어요. 안 된다는 말을 들으니 더 배고프고 서러웠어요. 처음엔 될 거라고 이것저것 쓰라더니 마지막에 계약서를 보더니 지층이라 안 된다는 거예요. “지층이 뭐예요?” 하고 물으니, 그것도 몰랐냐는 눈으로 나를 봐요. 여기, 하고 계약서를 손가락으로 콕 찍으며 “지층 102호. ‘지하’잖아요. 이 집 반지하죠? 우리 은행에서는 반지하는 전세대출 안 되는데요, 혹시 신용대출로 알아봐드릴까요? 전세금 대출보다는 이자가 높아요. 통장에서 자동이체 하는 거 있으세요? 휴대폰요금이나 전기요금 같은 거요, 없어요? 아, 그럼 신용대출도 어려운데, 어쩌지요?” 어려운 말이 많아서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어요. 하지만 대출을 안 준다는 말인 것은 확실해요.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어요. 과장님이 분명히 은행에서 빌릴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럼 1천만원을 어떻게 만들지!
2008년, 내가 베트남을 떠나올 때 친구들이 다 부러워했어요. 깡촌년이 출세해서 한국에 가는구나. 너도 이제 좋은 집에서 멋지게 살겠네. 친구들만 그런 게 아니에요. 나도 한국에서는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어요. 높고 멋진 아파트, 넓고 푹신한 침대. 뭐, 아시잖아요. 한국 드라마에 그런 집이 수두룩하게 나온다는 거. 그때 우리가 한국에 대해 알았던 것은 그게 다였어요. 그 철없던 시절을 생각하면, 휴우우.
지적장애가 있는 남편은 부모님을 일찍 잃고 고모 손에 자라서 어찌어찌 나랑 결혼했어요(음, 결혼한 이야기는 안 할래요. 울컥할지도 몰라요). 한국에 처음 와서는 전남 순천 시골에서 농사짓는 시고모 댁에 얹혀살았어요. 지금 사는 이 도시로 이사 온 것은 영민이 가져서 5개월 때였어요. 벌써 10년 전 일이네요. 고향 친구가 놀러 오라고 하도 졸라서 남편과 손잡고 물어물어 왔어요. 버스에서 내릴 때는 엄청나게 높은 건물과 깔끔한 거리 풍경에 목이 움츠러들었는데, 마중 나온 친구를 따라 들어온 동네는 낡아서 그런지 친근한 모습이었어요. 외국 사람이 많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베트남 말을 하니, 신기하고 고향 같은 느낌이었어요. 베트남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 나를 보고 깔깔거리던 친구가 다시 내려가지 말고 이 동네에서 같이 살자고 했어요. 일자리 구하기도 쉽다고. 하지만 그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주머니에 1만원짜리 몇장밖에 없는데 어떻게 여기서 먹고살아? 남편은 그저 빙글빙글 웃기만 했어요.
친구가 자기 사는 옆집에 보증금 없이 월세만 12만원인 방이 있대요. 12만원? 내가 화들짝 놀라니까, 친구가 낄낄 웃으며 말했어요. “여기서는 한달 열심히 일하면 100만원은 벌 수 있어. 남편이랑 너랑 둘이 같이 일하면 200만원 벌잖아. 괜히 고모 눈칫밥 먹지 말고 여기서 살아.”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한참 생각했어요. 일하라면 도망다니는 남편, 너 데려온 값은 안 받을 테니 니들 먹을 건 네가 책임지라며 쉴 새 없이 농사일을 시키던 고모님. 공짜로 지낼 방이 있고 밥은 먹지만 돈은 받지 못하는 노동, 가끔 용돈으로 주던 만원짜리 한두 장. 말을 다 알아듣진 못해도 눈치만으로도 서글펐던 하루하루. 나는 결심했어요. 여기서 살아보자, 더 나빠질 것도 없잖아!
숟가락, 바가지, 슬리퍼, 하루 하나씩!
우리는 당장 방을 보러 갔어요. 3층 건물의 맨 아래층이었어요. 대문 오른쪽에 같이 쓰는 화장실이 하나 있고 맞은편에 세 가구가 사는 구조였어요. 마당에서 계단 몇개를 내려가면 나무 문 3개가 나란히 있고 문 하나에 한 집씩 산대요. 열고 닫을 때마다 썩은 나무 부스러기가 부슬부슬 떨어지는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누런색 타일이 촘촘히 깔려 있고 수도꼭지가 왼쪽 벽에 낮게 붙어 있어요. 오른쪽 벽에는 낡은 가스보일러와 방문이 나란히 붙어 있어요. 방은 네명이 꼭 붙어 누우면 꽉 찰 정도로 아주 작았어요.
“계약서는 무슨 계약서, 그냥 살어.” 집주인 할머니가 바로 들어오래요. “오늘 12만원 주고 매달 이 날짜에 12만원 주면 돼. 가스, 수도, 전기는 세 집이 똑같이 나눠 내면 되고.” 첫 월세는 친구에게 빌렸어요. 우리 집은 3호, 가운데는 필리핀 남자 2명이 사는 2호, 맨 왼쪽은 베트남 부부가 사는 1호. 우리는 할머니가 준 걸레로 방을 닦고 몇가지 물건을 사 왔어요. 이불, 냄비와 밥그릇 2개씩, 휴대용 버너와 가스, 쌀 한 봉지, 수건. 아참, 칫솔도. 그날 샀던 물건이 하나하나 다 기억나요. 컵라면 살 때 끼워주는 나무젓가락을 한 뭉치나 공짜로 얻었어요. 황당하지만 재미나기도 했어요. 살림 장만하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고모 집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방에 장롱과 티브이가 놓여 있었고, 부엌살림도 밥그릇 하나 내 손으로 산 것이 없었으니까요. 우리는 버너와 냄비를 수도꼭지 옆에 놓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몸도 씻었어요. 손잡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둥근 구멍만 뻥 뚫려 있는 방문에는 비닐 끈을 묶어 손잡이를 만들었어요.
다음날, 바로 일자리를 구했어요. 일당 알바라 저녁에 3만원씩 바로 받았어요. 저녁마다 그 돈으로 물건을 하나씩 샀어요. 숟가락, 바가지, 슬리퍼, 이런 것들을 하루 하나씩! 컨베이어벨트 속도를 맞추느라 죽을 맛이었지만 내 손으로 물건을 살 때면 기쁨이 넘쳤어요. 사실 전자부품 조립하는 일은 뙤약볕 아래서 호미질하고 모기에 뜯겨가며 고추 따는 일에 비하면 일도 아니었어요. 남편은 회사에 가자마자 욕먹고 쫓겨 나오기를 몇번 하더니 취직에 흥미를 잃었나 봐요. 일을 찾아볼 생각도 않고 방바닥에 붙어 있었어요. 나는 월급제 회사로 옮겨 죽자 살자 일했어요.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죠. 아기 가진 사람이 그러다 큰일 난다고 사모님이 걱정할 정도였어요. 처음 받은 월급이 124만원, 그렇게 큰돈은 처음 받아봤어요. 꿈인 것 같았어요. 뱃속 아기가 점점 자라 몸이 무거워졌지만, 나는 악바리였고 아기는 더 악바리였어요.
첫 월급 받아서, 조그만 중고 냉장고를 하나 샀어요. 9만원 달라는 것을 조르고 졸라서 8만원만 줬어요. 음식이 든 냄비를 방에 뒀더니 바퀴벌레가 까맣게 덤비곤 해서 냉장고가 꼭 필요했어요. 중고 가스레인지도 사고 길에서 서랍장도 주웠어요. 방에 냉장고와 서랍장을 놓으니 이제 딱 두 사람 누울 자리만 남았어요. 그 방에서 우리 영민이를 낳아 키웠어요. 출산하고 서너달 일 못할 것을 생각해서 생활비를 벌어놓느라 진통이 오는 순간까지 일했어요. 아기 낳고 허리가 계속 아팠는데 바깥에 있는 화장실을 가려니 몹시 힘들었어요. 허리 아파 옷도 제대로 못 추스리고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다 마침 자기 방에서 나오던 필리핀 남자랑 눈이 마주쳤을 때는 창피해 죽을 것 같았어요. 빨리 돈 벌어서 안에 화장실 있는 집으로 이사 가자! 나는 겨우 2개월 된 영민이를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을 나갔어요. 첫날은 영민이가 너무 가여워서 울었어요.
그 방에서 겨울을 나면서 영민이는 계속 감기를 달고 살았어요. 문틈, 창문 틈으로 찬 바람이 씽씽 들어와서 비닐로 막았더니 벽에 곰팡이가 새까맣게 올라왔어요. 수녀님이 아기 옷에서 곰팡내가 난다고 환기에 신경 쓰라고 했지만, 그렇게 추운데 어떻게 문을 열어놔요.
두번째 집은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16만원짜리 방이었어요. 마당보다 방이 낮은데 다행히 철문이어서 문을 꼭 닫으면 찬 바람이 새지 않을 것 같아 마음에 들었어요. 게다가 싱크대가 있어서 쪼그려 앉지 않고도 음식과 설거지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제일 좋은 것은, 역시 화장실! 화장실이 안에 있어서 행복했어요. 하지만 이 방은 너무 좁은 게 문제였어요. 영민이 살림이 늘어나는데 어디 둘 데가 있어야죠. 방에 장난감 바구니라도 쏟아놓으면 발 디딜 틈이 없었어요. 야간까지 마치고 오면 남편과 아이는 그 쓰레기통 같은 방에서 장난감이 등에 배기거나 말거나 이불을 둘둘 말고 잠들어 있곤 했어요. 햄을 꺼내 먹고 그대로 굴려둔 캔을 밟아 발이 찢어진 적도 있어요. 그때는 정말 울화가 치솟아 머리가 터질 것 같았어요. 나는 피 나는 발을 붙들고 앉아 엉엉 울었어요. 우리가 개야? 엉엉, 개도 이거보다는 낫게 살겠다! 엉엉. 부스스 일어난 남편이 멍하니 나를 바라봤어요. 흐흥, 지금 생각해보니 좀 우습네요.
지금 사는 집은 이 도시로 이사 오고 다섯번째 집이에요. 젤 문제는 화장실이에요. 욕실 바닥보다 변기가 높이 있는데 자주 똥물이 올라와요. 일을 보고 물을 내리면 쿨럭대다 넘치는 일도 잦아요. 남편과 영민이는 넘친 변기를 그냥 두고 내빼버리니 매일 집에서 똥냄새가 나요. 집주인한테 고쳐 달랬지만, 그냥 참고 살래요. “싼 집이 다 그렇지 뭐! 자꾸 조르지 말고 돈 벌어서 이사 가!” 하면서 오히려 성을 내요.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도 화장실이 제일 문제였어요. 그 집은 계속 월세로 살다 전세로 얻은 첫 집이었어요. 보증금 1천만원. 방 2개! 친구들이 부러워했어요. 얼마나 악착같이 모았으면 전세를 다 얻었어? 그런데 화장실이 밖에 있었어요. 네 가구가 이 화장실 하나로 살아야 해요. 우리 가족 빼고 세 가구엔 한명씩만 살았지만, 역시 아침마다 곤란한 일이 벌어졌어요. 아침 소변은 부엌 하수구에 봐야 할 때가 많았어요. 영민이는 화장실에 있는 거미가 무섭다고 억지로 참다가 똥을 지리곤 했어요. 혼나고 울며 잠든 영민이를 안고 혼자 울먹인 적도 많아요. 너를 이런 집에서 재우는 내가 잘못이지. 미안해, 아들. 그래서 무조건 안에 화장실 있는 집을 찾아 여기로 이사했던 거예요.
콩벌레랑 비슷하다는 생각도
낮에 있던 일로 기운 빠지고 배고파서 급하게 밥하는데 영민이가 씩씩거리며 들어왔어요. 10살짜리 꼬마라도 화내니까 제법 무섭네요. 친구들과 큰길 건너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다가 쫓겨났대요. 돈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이 분명한 엄청 근사한 아파트예요. 놀이터에 예쁘고 새로운 놀이기구가 있어서 아이들이 거기서 놀고 싶어 해요. “엄마가 거기서 놀지 말랬잖아. 지난번에도 쫓겨났다면서 또 갔어?” “얼마나 재밌는데 왜 안 가? 이씨, 그 아저씨 나쁜 놈이야!” 아이가 경비 아저씨를 원망합니다. 하지만 나는 알아요. 경비 아저씨가 아니라 거기 사는 사람들이 우리 애들을 싫어한다는 것을요. 잘살면 좀 너그럽게 굴 일이지! 싱크대 앞에 쪼그려 앉은 영민이는 콩벌레를 잡아가지고 노느라 곧 분한 마음을 잊은 듯해요. 콩벌레는 작은 발을 놀려 달아나다 영민이 손이 닿으면 또르르 몸을 말고 죽은 척해요. 왜 또 잡혔니, 너도 오늘 운이 나쁘구나. 밥하느라 바쁜데 영민이는 하필 거기 앉아 자꾸 발에 차였어요. 짜증스러웠지만 꾹 참고 내가 피해 다녔어요. 쫓겨나서 화나고 서러운 아이한테 나까지 잔소리하면 너무 불쌍하잖아요.
그동안 겪은 일을 생각하면 은행에서 거절당한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이리 속상할까요. 어쩐지 내가 콩벌레랑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죽은 척 가만히 웅크리고 있지만 속으로는 살려고 악착같이 버둥거리는, 그런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일꾼. 국경을 넘어와 새 삶을 꾸리고 있는 이주민들은 저마다 깊은 사연이 있다. 떠나온 사회와 살아내야 할 사회에 하고픈 말이 많지만 그 말은 발화되지 못한 채 눈동자에 잠기곤 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내 당사자 시점으로 전한다. 4주에 한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