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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마린의 끈질긴 ‘세월호 과학’, 국제 여객선 안전기준 바꾼다

등록 2020-04-04 09:13수정 2020-04-07 15:10

[토요판] 커버스토리
세월호가 바꾸는 국제 해사 기준

영국 왕립조선학회 주최 국제회의
네덜란드 연구소 마린, 논문 발표
‘세월호 전복·침수’ 여객 안전 내용
국제 해사 기준 바꾸는 계기 기대

세월호 선조위 용역으로 연구 시작
모형 시뮬레이션해 사고 원인 분석
수백쪽짜리 보고서 여러 권 제출
자체 예산으로 9974번 모형배 제작
사진 위쪽은 세월호가 기울어진 모습, 아래는 마린이 제작한 9929번 세월호 모형으로 길이 573㎝, 너비 87㎝. 세월호 특조위, 마린 제공
사진 위쪽은 세월호가 기울어진 모습, 아래는 마린이 제작한 9929번 세월호 모형으로 길이 573㎝, 너비 87㎝. 세월호 특조위, 마린 제공

다시 4월16일이 다가온다. 2014년 4월16일 진도 인근 해상에서 세월호가 침몰해 304명 안타까운 목숨이 희생된 날이다. 6년의 세월이 흘러도 그날의 진실을 찾는 작업은 현재형이다. 그날의 교훈을 세상을 바꾸는 계기로 만드는 노력도 국내외에서 계속된다. 네덜란드 해양연구소 마린은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가 맡긴 전복·침몰 과정 연구를 통해 세월호와 인연을 맺었다. 2018년 마린은 세월호를 축소한 모형배로 사고를 모의실험했다. 그 결과는 선조위 보고서에 반영됐다. 선조위는 활동을 마쳤지만, 마린은 새 여객선 모형을 자체 제작해 ‘세월호 참사’를 ‘횡경사 공식’, 나아가 ‘여객선 안전 규정’을 바꾸는 연구로 발전시켰다. 잔잔한 바다에서 세월호는 왜 넘어졌을까. 그 의문을 밀어붙인 마린은 연구를 집약한 ‘세월호의 전복과 침수’ 논문 등을 최근 국제학회에서 발표하고, 국제 해사기준을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더 안전한 배를 만들려 애쓰지 않으면 세월호 참사를 헛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그들은 다짐한다. 전치형 카이스트 교수가 마린의 연구를 소개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지난 3월 초 네덜란드 바헤닝언시에 있는 해양연구소 마린(MARIN)의 연구진이 그리스 아테네행 비행기에 올랐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럽 각국에도 퍼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국가 간 이동을 막진 않을 때였다. 이들은 그리스 출장 취소 여부를 두고 며칠 상황을 지켜보다가 계획대로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3월4일 아테네 근처의 ‘그리스 요트 클럽’에서 영국 왕립조선학회가 주최하는 여객선 안전 분야 국제학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마린은 이 학회에 두 편의 논문을 제출했다. 각각 ‘선회 중 횡경사 각도와 승객 안전’, ‘세월호의 전복과 침수’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제출 논문, 학회 현장 발표 자료와 녹음파일, 이메일 인터뷰 등을 통해 마린의 연구활동을 복기해보았다.

마린과 세월호

3월4일 학회 오전 세션에서 ‘선회 중 횡경사 각도와 승객 안전’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사람은 마린에서 여객선 조종 연구와 모형시험을 맡고 있는 선임 프로젝트 매니저 빅토르 페라리였다. 그는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옆으로 기운 사진을 보여주는 것으로 발표를 시작했다. 횡경사, 즉 선박이 왼쪽 또는 오른쪽 측면으로 기우는 것이 배에 탄 승객의 안전에 미치는 영향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이미지는 없을 것이다. 사진은 이 추상적인 제목의 과학 연구가 다름 아닌 세월호의 침몰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었다.

페라리의 다음 슬라이드는 실제 세월호가 아니라 마린이 제작한 노란색 세월호 모형이 대형 수조 안에서 좌현(배 뒤쪽에서 뱃머리를 향해 섰을 때 왼쪽 뱃전)으로 기울어진 사진을 담고 있었다. 페라리는 사진 옆에 모형시험 조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붙였다. “바람 없음. 파도 없음. 조류 없음. (선체) 손상 없음. 선회만 있음.” 즉 세월호 모형시험 결과에서 마린 연구진이 주목한 것은 잔잔한 바다에서 항해하던 배가 외부 충격이 없는 상태에서 선회하다가 크게 기울었고 결국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는 사실이었다. 학회가 끝나고 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페라리는 “세월호 사고는 선회 중 횡경사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느꼈다.” 페라리와 마린은 왜 세월호를 국제 여객선 안전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게 되었을까.

마린과 세월호의 인연은 2018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린은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의 주요 용역 기관으로서 2018년 상반기에 세월호의 전복, 침몰 과정을 밝히기 위한 모형시험과 시뮬레이션을 실시했다. 당시 선조위 위원장, 소위원장, 위원 및 조사관 여러 명이 마린을 방문해서 모형시험을 진행하거나 참관했다. 세월호 가족 대표들도 시험 과정에 함께했다. 여러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취재진을 파견해서 마린의 모형시험 장면을 찍고 인터뷰를 내보냈다. 그만큼 기대가 컸던 모형시험이었다. 마린은 2018년 4월과 7월에 수백쪽짜리 보고서 여러 권을 선조위에 제출했다.

당시 마린이 실시한 세월호 모형시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세월호가 빠르게 선회하면서 45도까지 기운 과정에 대한 분석이고, 다른 하나는 기울어진 세월호에 물이 들어가서 100분 만에 침몰하는 과정에 대한 분석이다. 마린은 선회 및 횡경사 분석과 침수 및 침몰 분석을 위해 세월호를 각각 25분의 1과 30분의 1로 축소한 9929번 모형과 9930번 모형을 제작했다(마린은 모형 제작 순서대로 일련번호를 붙인다). 9929번 모형에는 배의 전체적인 움직임을 측정하고 화물 이동을 구현할 수 있는 장치를 달았고, 9930번 모형은 침수 경로 분석을 위해 객실과 화물칸 등 세월호 내부 구조를 정확하게 재현했다.

2018년 3월1일 9929번 세월호 모형으로 시험을 진행하고 있는 마린 해양연구소의 빅토르 페라리 연구원.
2018년 3월1일 9929번 세월호 모형으로 시험을 진행하고 있는 마린 해양연구소의 빅토르 페라리 연구원.

이 중 9930번 모형배를 사용한 마린의 침수·침몰 시험 결과는 선조위가 이견 없이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해수가 처음 유입된 지점과 침수 경로를 밝혀냈고, 무엇보다 수밀문과 맨홀 등이 제대로 닫혀 있었다면 세월호가 그렇게 빨리 가라앉지 않았을 것이라는 시뮬레이션 결과도 내놓았다. 이런 내용은 선조위의 ‘내인설’ 보고서와 ‘열린안’ 보고서 제3장에 거의 동일하게 실렸다. 두 보고서는 모두 “세월호는 침수에 매우 취약한 ‘열려 있는’ 배”였으며 세월호의 “수밀 구획이 유지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예상보다 빠르게 침몰했다고 판단했다.

마린은 9929번 모형배를 사용한 선회와 횡경사 시험에서는 세월호의 속력, 복원성, 화물 이동, 방향타의 각도 변화, 핀 안정기 등의 조건을 조합한 340개 이상의 시나리오를 테스트했다. 또 외력이 작용했다면 배의 선회와 경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에 대한 시험도 실시했다. 마린은 세월호의 낮은 복원성 조건과 방향타의 움직임이 결합했을 때 배가 우현으로 선회하면서 좌현으로 최소 18도 이상 기울었고, 이때 화물이 처음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최초 화물 이동과 함께 배가 점점 더 기울어 33도에 이르자 2차 화물 이동이 진행되었고, 이후 세월호는 45도 이상 기울어진 다음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마린의 결론은 세월호에 외력이 작용했다는 가설을 도입하지 않고도 세월호의 선회와 횡경사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적으로 확신한다”

이러한 마린의 분석을 두고서는 선조위 내부 견해가 크게 엇갈렸다. 선조위의 ‘내인설’ 보고서는 마린의 시험 결과와 해석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고, 외력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열린안’ 보고서는 마린의 결론을 수용하지 않았다. 특히 외력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마린의 시험 결과 해석을 두고 ‘열린안’ 보고서는 “마린과 선조위 외력 검증 티에프(TF) 사이에 상이한 지점이 다수 존재”한다고 서술했다. 결국 세월호의 선회와 횡경사를 다루는 제2장에서 두 보고서의 견해차가 가장 두드러졌고, 이는 상당 부분 마린의 모형시험 결과를 서로 다르게 해석한 데서 비롯했다.

2018년 8월 초 선조위가 내부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내인설’과 ‘열린안’으로 나뉜 침몰 원인 종합보고서를 내고 종료했다는 소식이 마린에도 전해졌다. 마린 연구진은 선조위 종합보고서에 대한 한국 내 반응과 추가 논의를 궁금해했다. 자신들이 한 모형시험의 결과가 세월호 침몰 원인을 규명하는 데 기여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주변의 한국인들을 통해 세월호에 대한 한국 언론 기사를 접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조위에서는 마린 쪽에 선조위 종합보고서를 보내주지도 못했다. 종합보고서가 최종 편집과 인쇄를 마쳤을 때는 선조위가 이미 해산된 뒤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 있던 이들이 직접 읽을 수는 없었겠지만, 마린의 분석과 결론에 대한 선조위 내 상반된 견해는 양쪽 보고서에서 마린을 언급하는 표현에서도 드러났다. ‘내인설’ 보고서는 선조위가 마린을 세월호 조사 파트너로 선정한 것이 “어렵고 복잡한 분석을 할 수 있는 실력과 경험을 높이 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반면, ‘열린안’ 보고서는 “마린이 모형시험을 잘 수행하는 업체이고, 선정을 고려한 3개의 업체 중 조사 기한 내 시험 일정이 가능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중 후자는 마린을 고객이 주문한 대로 모형시험을 해주는 업체로 여기고 있다.

2018년 5월31일 세월호 선조위 조사관들과 함께 전남 목포신항의 세월호 내부를 둘러보는 마린 해양연구소 연구진. 전치형 제공
2018년 5월31일 세월호 선조위 조사관들과 함께 전남 목포신항의 세월호 내부를 둘러보는 마린 해양연구소 연구진. 전치형 제공

그러나 선조위 내 양쪽이 마린의 지위를 어떻게 보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세월호 모형시험을 의뢰했던 선조위는 2018년 8월에 사라졌지만 마린은 세월호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해 여름 무렵부터 세월호 모형시험 결과를 정리해서 논문으로 발표하기 위해 준비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이번 왕립조선학회 여객선 안전 분과에서 발표한 또 한 편의 논문 ‘세월호의 전복과 침수’다. 마린의 세월호 모형시험 프로젝트 책임자였던 헹크 판덴봄이 직접 논문 발표를 맡았다. 판덴봄 외에도 당시 선회와 횡경사 시험을 담당했던 페라리, 침수와 침몰 시험을 담당했던 리너르트 판바스턴 바텐뷔르흐, 그리고 선조위 조사관으로서 마린의 모형시험을 함께 진행했던 서승택씨가 공저자로 참여했다.

‘세월호의 전복과 침수’ 논문에서 마린은 세월호 외력 가설에 대한 자신들의 분석을 더욱 명확하게 제시했다. “(모형배에 외력을 전달하기 위한 장치인) 윈치에 가해지는 힘의 크기, 방향, 지속시간을 어떻게 조합해도 선체조사위원회의 외력 검증 티에프가 선박 자동식별장치(AIS)의 선수 방위각 원자료에서 도출한 높은 선회율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그처럼 높은 선회율을 유발한 외력이 있었다는 가설은 기각되었다.” 마린이 이번 논문의 결론에 쓴 문장이다. 세월호에 외력이 가해지는 상황을 구현하기 위해 모형배에 여러가지 조건으로 힘을 가해 보았지만 선조위 일각에서 외력을 의심했던 만큼 배가 빠르게 선회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마린은 2018년 모형시험 결과를 직접 분석하고 해석하여 외력 가설을 ‘기각’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실은 이와 유사한 문장이 2018년 7월 말 마린이 선조위에 제출했던 추가 모형시험 ‘예비보고서’의 결론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선조위의 검토 의견을 받은 다음 일주일 뒤 마린이 제출한 ‘최종보고서’에는 외력 가설을 기각할 수 있다는 명시적인 문장이 빠졌다. 따라서 마린 보고서를 인용하여 작성한 선조위의 최종보고서(내인설)에도 ‘외력 가설 기각’ 같은 확실한 표현은 사용되지 못했다. 이번 논문에서 마린 연구진은 2년 전 예비보고서에 있던 문장을 다시 불러냄으로써 자신들의 해석을 재확인했다. 학회 발표 직후 이메일 질의에 응답하면서 마린 연구진은 세월호 외력의 존재에 대한 가설을 기각하는 자신들의 결론을 “전적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2년 전과 동일한 입장이다.

세월호의 침몰과 외력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마린의 설명은 사실 2018년 여름 선조위에서 토론하고 검증하고 정리했어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선조위는 8월 초 활동 종료 직전까지 방대한 조사 내용을 차분하게 검토할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논쟁을 거듭하다가 ‘내인설’과 ‘열린안’을 지지하는 두 그룹으로 나뉘고 말았다. 둘로 갈라져 나온 종합보고서는 관련 학계의 공개적인 검증을 받은 적이 없다. 이번에 마린이 영어로 발표한 논문은 세월호에 대한 과학적 공식 조사 결과를 국제 학계가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었다는 의미가 있다.

잔잔한 바다, 외부 충격 없이 선체가
18도 이상 기운 것 심각하다 판단
횡경사 각도 제한·측정 새 공식 제안
15도 기준 삼되 실제 배로 측정하자

국제해사기구 제출 개정안 초안 마련
네덜란드 정부 대표단과 협의 진행
국제 안전규정 바꾸는 길고 힘든 일
한국 정부 개정안 지지해주길 희망

9929번, 9930번 그리고 9974번

선조위가 하나의 결론을 내지 못하고 종료했던 2018년 8월, 마린 연구진은 또 하나의 모형시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시험 대상은 마린 9974번 모형배였다. 마린 연구진은 여러 주에 걸쳐 모형을 만들고 계측 장치를 설치한 다음 사흘 동안 모형시험을 실시했다. 이 9974번 모형배로 실시한 시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가 이번에 페라리가 발표한 ‘선회 중 횡경사 각도와 승객 안전’ 논문에 담겼다. 즉 세월호에서 출발해서 여객선 안전 일반으로 나아가는 연결고리가 바로 9974번 모형배다.

2018년 11월10일 네덜란드 바헤닝언에서 열린 마린 연구소 개방 행사에서 리너르트 판바스턴 바텐뷔르흐 연구원이 9930번 세월호 모형을 전시해놓고 방문객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마린 제공
2018년 11월10일 네덜란드 바헤닝언에서 열린 마린 연구소 개방 행사에서 리너르트 판바스턴 바텐뷔르흐 연구원이 9930번 세월호 모형을 전시해놓고 방문객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마린 제공

선조위의 의뢰를 받아 제작했던 9929번, 9930번 모형배와 달리, 마린은 9974번 모형배를 자체 연구개발 예산으로 만들었다. 모형배 하나를 만드는 데에는 보통 2500만원에서 5천만원 정도가 든다. 페라리는 마린이 매년 예산 일부를 선박 안전과 효율을 증진하기 위한 자체 연구에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마린이 세월호의 사례를 확장해서 여객선 안전 규정 문제를 다루는 것을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의제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새 모형배를 가지고 마린은 무엇을 확인하려 했던 것일까.

2008년에 채택된 국제해사기구(IMO)의 여객선 비손상 복원성 규정은 몇 가지 배의 특성으로부터 선회 중 횡경사 각도를 계산하는 공식을 제시하고 있다. 이 공식으로 계산한 값이 10도를 넘지 않아야 한다. 모형시험에 사용된 복원성 범위에서 세월호는 이 공식에 의한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따라서 사고 당시 세월호가 10도 이상 기울었다는 사실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모형시험을 통해 잔잔한 바다에서 외부 충격 없이 항해하던 세월호가 화물이 움직일 정도인 18도 이상으로 크게 기운 것을 관찰한 마린 연구진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횡경사의 최대값을 확실하게 제한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또 한번 확인했기 때문이다. 특히 많은 국가들이 기상 상태가 좋을 경우 화물 고박 규정을 완화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위험한 화물 이동을 막기 위해서라도 선회 중 최대 횡경사 각도를 더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이번에 발표한 논문에서 마린 연구진은 현재 국제해사기구 규정에 들어 있는 공식이 실제 바다에서 배가 선회할 때의 최대 횡경사 각도를 제한하는 데에 실효가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공식에 배의 설계 수치나 속력이 들어가지만 실제 선회 중 배에 가해지는 동역학적 힘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기 때문에, 공식을 만족한다고 해도 최대 횡경사가 안전한 범위에 있을지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마린은 오랜 모형시험과 해상 시운전 경험을 통해 현행 공식을 만족하도록 설계된 배인데도 실제로는 위험한 각도까지 기울어지는 사례를 많이 알고 있었다. 200건 이상의 여객선 모형시험과 시운전 데이터베이스에는 선회 중 최대 횡경사가 10도, 15도, 20도를 넘는 사례가 상당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사실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오랫동안 인지하고 있던 문제다. 이 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되어 2011년에서 2015년까지 국제해사기구의 위원회가 논의했지만, 당시에는 추가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을 뿐 규정 개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제해사기구에 규정 개정의 필요성을 충분히 설득하기 위해서는 데이터와 논리가 강화되어야 했다. 세월호 참사는 이와 같은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는 일에 현실적 절박함을 더해주었다.

마린의 9974번 모형배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9929번 세월호 모형도 여객선의 선회 중 횡경사에 대한 데이터를 줄 수 있겠지만, 규정 개정을 제안하려면 좀더 대표성 있는 여객선 모형이 필요했다. 요즘의 여객선 디자인을 대표할 수 있도록 만든 9974번 모형은 길이 190m, 너비 30m짜리 여객선을 가정하고 있다. 마린은 9974번 모형을 가지고 세월호 시험 때와 비슷하게 복원성, 속력, 타각 등을 바꿔가면서 배가 선회할 때 기우는 각도를 측정했다. 모형배는 현행 규정의 공식을 만족하도록 설계되었지만 때로는 평범한 운항 조건에서도 20도 넘게 기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세월호에서처럼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누구도 이의제기 않을 것”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논문에서 마린 연구진은 현재 공식을 통해서는 실제 바다에서 배가 최대로 기우는 각도를 확인하기 어려우므로, 물리적으로 승객이 균형을 잃는 각도에 가까운 15도를 확실한 기준으로 삼고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새 공식을 채택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 제안의 핵심은 여객선이 절대 승객이 균형을 잃고 넘어지거나 화물이 움직이는 위험한 각도까지 기우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마린은 평상시는 물론 예상치 못한 긴급 상황에서 여객선이 빠르게 선회하는 경우에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횡경사를 막아야 한다고 믿는다. 논문의 저자들은 배를 설계할 때 사용할 새 공식을 제안하면서, 이와 함께 배를 새로 건조하거나 개조한 뒤 바다에서 실제 횡경사를 측정하도록 하는 규정을 추가하자고 촉구하고 있다.

마린 해양연구소가 국제해사기구 여객선 비손상 복원성 규정 개정을 위한 연구에 사용한 9974번 모형. 2018년 여름 마린의 자체 연구개발 예산으로 제작했다. 마린 제공
마린 해양연구소가 국제해사기구 여객선 비손상 복원성 규정 개정을 위한 연구에 사용한 9974번 모형. 2018년 여름 마린의 자체 연구개발 예산으로 제작했다. 마린 제공

페라리는 국제해사기구의 현재 규정을 충분히 신뢰할 수 없으므로 이를 개정해야 한다고 강하게 권고하는 것으로 논문 발표를 마무리했다. 페라리의 발표 슬라이드 마지막 장은 다시 9929번 세월호 모형이 선회하면서 옆으로 기운 사진들로 채워져 있었다. 논문의 공저자인 판덴봄은 마린이 제안한 새 공식에서 기준으로 삼는 횡경사 15도에는 세월호에서 최초 화물 이동이 발생한 18도보다 작은 각도라는 의미도 있다고 덧붙였다. 국제해사기구 규정 개정을 위한 연구가 세월호로 시작해서 세월호로 돌아가고 있었다.

발표가 끝나고 진행한 질의응답 시간에 영국 왕립조선학회의 사무총장 트레버 블레이클리가 마지막으로 발언했다. “오늘 이 방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규정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당신의 결론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국제해사기구가 이 결론을 받아들이도록 어떻게 설득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페라리는 마린이 이미 국제해사기구에 참여하는 네덜란드 정부 대표단과 협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네덜란드 정부를 통해 국제해사기구의 해양안전위원회에 개정안을 공식적으로 제출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블레이클리는 “왕립조선학회는 분명히 그것을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왕립조선학회는 국제해사기구에 비정부기구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다.

페라리가 대답한 대로 마린은 이번에 발표한 논문 외에도 국제해사기구에 공식적으로 제출할 개정안 초안을 마련해 놓았다. ‘2008년 비손상 복원성 규정의 선회 중 최대 횡경사 기준 개정을 위한 제안’이라는 제목의 초안 문서는 역시 이 연구가 세월호 침몰과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한 모형시험을 계기로 시작되었음을 명시하고 있다. 한반도 남서쪽 바다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이 전세계 바다를 다니는 여객선과 승객의 안전 문제로 연결되는 지점이다.

개정안이 먼저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논의되는 데는 여러 달이, 또 국제해사기구의 모든 검토 단계를 통과하는 데는 여러 해가 걸릴 수도 있다. 국제 안전 규정 하나를 바꾸는 것은 그만큼 까다로운 일이다. 하지만 분명히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1987년 카페리선 헤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호 침몰로 193명이 사망한 이후 국제해사기구는 화물칸 등 침수 우려가 있는 공간의 문이 열려 있는지 표시하는 장치를 선교(선장이 배를 지휘하는 공간)에 설치하는 규정 등을 채택했다. 1994년 852명의 목숨을 앗아간 에스토니아호 침몰 사고 이후에도 여객선 복원성 규정 등이 바뀌었다.

마린이 준비하고 네덜란드 정부가 제출할 개정안이 채택되려면 왕립조선학회 같은 공신력 있는 기관을 비롯하여 여러 회원국 정부의 지지가 필요하다. 페라리는 세월호 참사를 겪은 한국 정부도 이 개정안을 지지해주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런 비극이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힘을 합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린의 작업을 통해 세월호는 배를 운항하는 모든 국가가 함께 막아내야 할 참사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다. 페라리는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 우리가 더 안전한 배를 만들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이는 세월호의 침몰과 그 이후의 모든 일들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응답할 차례다.

“세월호 시련 다시 겪어선 안 돼”

마린은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을까. 그들은 왜 2년 전 한국의 선조위라는 고객의 요청으로 시작한 작업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뒤에도 지금까지 세월호를 붙들고 있을까. 세월호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조선공학자로 마린에서 40년 동안 근무한 판덴봄은 전문가의 임무와 책임에 대해 말했다. “마린의 우리들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찾는 조사에 기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마린은 세월호에 대한 과학적 조사가 해양 안전은 물론 재난 이후에 필요한 정의의 실현에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90년 가까운 역사의 해양연구기관인 마린은 선박 관련 기업과 기관들의 의뢰를 받아 일할 때가 대부분이지만, 이와 함께 “더 안전하고, 더 지속가능하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세월호 모형시험 결과를 얻은 마린이 곧 복원성 기준 개정을 위한 추가 실험에 착수한 것도 그 때문이다. 판덴봄은 “이 일에 참여한 것은 나에게 임무인 동시에 영광이었다”고 말했다.

2020년 3월4일 그리스에서 열린 여객선 안전 분야 국제학회에서 마린 연구소의 헹크 판덴봄 연구원이 ‘세월호의 전복과 침수’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영국 왕립조선학회/헬레닉해양기술연구소 제공
2020년 3월4일 그리스에서 열린 여객선 안전 분야 국제학회에서 마린 연구소의 헹크 판덴봄 연구원이 ‘세월호의 전복과 침수’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영국 왕립조선학회/헬레닉해양기술연구소 제공

판덴봄은 2년 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밝힌 적이 있다. 2018년 1월 말 세월호 모형시험 당시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그는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철저히 밝히는 것은 한국을 넘어 세계의 여객선 안전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과거 대형 선박 참사들 이후 국제해사기구가 관련 규정을 바꾸었듯이 “세월호 사고 원인이 명백해지면 더 안전한 여객선을 건조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 규정이 생겨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논문 발표와 국제해사기구 규정 개정안 마련 등 마린의 최근 작업을 보면, 2년 전 그의 인터뷰는 지나가듯 흘린 말이 아니라 하나의 약속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판덴봄과 그의 동료들은 전문가로서, 프로로서 그 약속을 지키려 지금까지 애쓰고 있다.

“실패에서 배운다”, “참사에서 교훈을 얻는다”라는 말은 너무나 교과서적이고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런 배움이 실제로 일어나는 경우는, 안타깝게도, 매우 드물다. 우리는 어쩌다 세월호와 인연을 맺게 된 유럽의 전문가들이 세월호의 교훈을 실천하기 위해 2년 넘게 일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9929번과 9930번 모형에서 멈추지 않고 9974번 모형으로 나아간 마린의 행보가 반갑고, 앞으로의 결실이 궁금하다. 세월호 연구의 의미에 대해 페라리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과거에서 배움을 얻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이번에 논문을 발표한 판덴봄과 페라리를 포함해서 마린 연구진은 2018년 세월호 모형시험 기간 내내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달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도 마린의 연구와 활동이 세월호 가족들에게 하나의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이메일 인터뷰에서 그들은 4월16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상기하며 가족들에게 다시 한번 애도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 희망과 다짐의 말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이 연구를 통해 더 안전한 선박을 향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누구도 세월호 가족들이 겪은 가혹한 시련을 다시 겪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전치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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