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가정은 다양성이 만나고 섞이고 충돌하고 타협하는, 그야말로 다양성의 치열한 현장이다. 필리핀 출신 어머니를 둔 열다섯살 수정(가명)은 그 속에서 치열하고 아슬아슬하게 파도를 넘고 있다. 어린 수정의 눈동자에 가득한 슬픔을 보아주기를.
가출했다. 계획했던 일은 아니다. 그냥 너무 답답하고 화나는데 다른 방법은 생각이 안 났다. 재희(가명)에게 말했다. 재희랑 나는 비밀이 없다. 동갑인데다 둘 다 필리핀 엄마를 둬서 그런지 우리는 자매 같은 사이다.
“나 집 나왔어.”
“엥? 왜?”
“아빠 땜에. 아씨, 정말 웃기지도 않아.”
안 울려고 했는데 눈물은 계속 났다. 나는 억울하다. 화난다.
지금 아빠는 새아빠다. 친아빠는 따로 가족이 있다. 엄마는 친아빠 얘기를 잘 안 하지만 나는 다 안다. 아빠가 바람을 피웠다. “네 아빠가 먼저 배신 때린 거야.” 소피아(가명) 아줌마가 고급진 한국어로 말해줬다. 소피아 아줌마는 재희 엄마다. 아빠가 엄마랑 말이 잘 안 통한다고 밖으로만 돌았다고, 그러다 다른 사람을 만나 애기까지 생겼다고, 애기를 낳은 뒤에야 엄마가 그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엄마가 많이 울었다고, 역시 아줌마가 말했다. 말이 안 통할 줄 모르고 필리핀 사람이랑 결혼했나? 치사한 변명이다. 소피아 아줌마는 또 말했다. “어른들 일은 좀 복잡해. 너도 크면 이해할 거야.” 참나, 이해 같은 소리! 어른들은 다 제 맘대로다.
내가 네살 때 아빠와 헤어진 엄마는 나를 혼자 키웠다. 헤어졌어도 아빠는 엄마의 비자 연장이나 국적 따는 것을 도와줬다고 했다. 국적 면접 때도 같이 갔다. 내 손을 잡고 아주 친한 척을 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토 나온다. 알고 보니 비자니 국적이니 도와준 것은, 알아서 먹고살라는 거였다. 엄마와 나를 버리려고 차근차근 준비한 거다. 지가 아빠면 책임질 것은 책임져야지! 너는 이제 아빠도 아냐!
엄마는 지독하게 일했다. 화장품 용기 만드는 사출회사에서 오래 일했는데, 엄마는 야간수당 받아야 돈이 된다고 죽어라 야간을 했다. 내가 애기 때는 소피아 아줌마 집에서 재희랑 같이 잤고 초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는 나 혼자 잤다. 밥 잘 챙겨먹고 현관문과 창문 꼭꼭 잠그라고 엄마는 말하고 또 말했지만, 나는 이미 용감하고 야무진 어린이였다. 혼자서도 다 잘했다.
엄마는 쉬는 날이면 이불 속에서 핸드폰을 붙잡고 지냈다. 채팅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아줌마들과 통화도 길게 했다. 필리핀 타갈로그어와 영어에 한국어가 조금 섞인 말이다. 나는 영어와 타갈로그어를 못하지만 무슨 말인지 대충은 안다. 힘들고 아프다는 말을 자주 했고, 내 이야기도 자주 했다. 가끔은 내 얘기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그냥 넘어가 줄 때가 많았다. 엄마가 불쌍했다. 엄마는 예쁜 얼굴인데 화장을 안 했다. 항상 일에 찌들어 살았다. 쉬는 날도 잠자고 통화하면 끝, 어디 놀러 가는 것도 별로 없다. 가끔 나 데리고 마트에 가는 게 나들이라면 나들이랄까. 그러던 엄마가 갑자기 결혼을 했다! 잠잘 시간도 없는 사람이 남자를 어떻게 만난 거야? 새아빠는 옷가방만 가지고 집으로 들어왔다. 열한살 겨울이었다.
‘최애 음식’ 삼겹살이 사라졌다
나는 좋았다. 친아빠한테 복수하는 느낌도 들었다. 이제 엄마가 고생 덜 하겠다고, 소피아 아줌마가 그랬다. 그 말이 맞았다. 엄마가 야간 일을 그만뒀다. 엄마가 자주 웃었다. 엄마는 새아빠랑 영어로 대화했다. 아빠는 파키스탄 사람이다. 한국어는 잘 못했다. 나에게 하는 한국어는 ‘말’이라기보다 단어를 나열하는 수준이었다. “네가 가르쳐줘.” 엄마가 부탁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아빠가 옷도 사주고, 공원에도 같이 놀러 갔다.
다른 변화도 따라왔다. 엄마가 갑자기 삼겹살을 안 해줬다. 둘이만 살 때는 반찬 없다고 삼겹살, 밥하기 귀찮다고 삼겹살, 삼겹살을 많이 먹었다. 내 최애 음식도 삼겹살이다. 그런 삼겹살이 집에서 사라졌다. 내가 삼겹살을 조르면 아빠가 야간 하는 날 밖에서 사주곤 했다. 엄마는 가끔 마시며 행복해하던 맥주를 안 먹었다. 할랄가게에서 식료품을 사는 일이 많아졌다. 거기는 닭고기도 엄청 비싼데 굳이 거기서 샀다. 갑자기 왜?
봄과 함께 반바지 전쟁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엄마가 반바지를 입고 나가는 나를 잡아 세웠다. 긴바지로 바꿔 입으라고 했다. 그런 말은 생전 처음 들었다. “싫어!! 옷도 내 맘대로 못 입어?” 슬픈 표정을 하는 엄마를 뒤로하고 나는 쌩 도망 나왔다. 그런데 왜?
그날 저녁 엄마는 나를 붙잡고 사정사정했다. 나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 옷 중에 반바지와 짧은 치마를 다 찾아서 가지고 나갔다. 나는 펄펄 뛰며 성질을 냈지만 엄마는 단호했다. 엄마가 변했다. 그다음엔 춤추는 것을 금지당했다. 친구들과 모이기만 하면 하는 일이 방송댄스 연습인데, 그걸 하지 말라고 했다. 엄마 앞에서 에이오에이(AOA)의 ‘심쿵해’ 춤을 흉내 내던 나는 그 말에 심장이 쿵! 했다. “엄마, 갑자기 왜 그래?” 앙칼지게 대드는 내 앞에서 엄마는 또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도대체 왜?
새아빠는 무슬림이다. 할랄음식을 먹어야 한다거나 돼지고기나 짧은 옷, 댄스를 금지하는 이유가 다 아빠가 이슬람교를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 무슬림이 됐느냐고 물으니, 태어날 때부터 그랬기 때문에 왠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빠 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슬람교를 믿기 때문에 아주 당연한 일이란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더러 알고 있었지만, 아예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다.
아빠는, 무슬림은 하루 다섯번 기도한다고 말하면서도 진짜로는 잘 못 지켰다. 아침과 잠자기 전에만 기도한다. 처음 한국 와서는 다섯번 다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근무시간에 기도하다가 욕을 왕창 먹은 뒤로는 못 한다고, 무슬림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슬프다고 했다. 아빠가 집에서 기도하는 것을 자주 봤다. 아빠는 사원 모양이 그려진 붉은색 양탄자를 펴고 단정한 자세로 기도했다. 엎드려 절하는 모양은 세배하는 것과는 좀 달랐다. 경건해 보이기도 했다.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아빠가 기도할 때 엄마도 수줍게 따라 했다. 나도 해보라는데 쿨하게 거절했다. 아주 가끔이었지만 성당에 다니던 엄마는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래야만 결혼할 수 있다고 해서 그랬단다. 엄마가 웃겼지만 나는 참견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는 잘 몰라. 그냥 하라는 대로 하는 거야. 히잡은 안 쓸 거야. 히잡까지 쓰면 너무 힘들 거라고 아빠가 쓰지 말래.” 엄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히잡 안 쓰는 게 지금 자랑이야? 하는 말이 꽥 튀어나올 뻔했다. 어쨌든 좋아, 엄마 선택이니까 존중하겠어.
어벙하다, 딱 촌년이다
엄마가 종교를 바꾼 것까지는 좋은데 그걸 나한테까지 훅 들이미는 것은 사양이다. 이것저것 금지 항목이 늘어났지만, 금지한다고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풉! 아빠는 한국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춤은 밖에서 얼마든지 출 수 있고 돼지고기도 몰래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옷은 큰 문제였다. 중학생이 되면서 아빠가 더 엄격해졌다. 눈이 나만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엄마는 교복 살 때 무릎을 덮는 치마를 달라고 했다. 입이 잔뜩 튀어나온 나를 보고 사장님이 웃었다. 요즘 애들이 다 짧게 입어서 긴 치마는 아예 안 나와요. 엄마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표정 짜증 난다.
엄마는 그중 제일 크고 긴 사이즈를 골라 나에게 억지로 입혔다. 말할 것도 없다. 어벙하다. 딱 촌년이다. 나는 치마를 벗어 던지고 나와 버렸다. 저녁에 집에 가니 엄마 아빠 옆에 그 치마가 같이 앉아 있었다. 나는 아빠랑 말하기도 싫었다. 눈도 마주치기 싫었다. 엄마는 나만 설득하려 들었다. 아빠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무슬림의 딸답게 자라기를 바라는 거래. 뭐? 정말 웃긴다. 나는 그 종교를 믿지도 않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도대체 왜?
나는 줄창 체육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학교 화장실에서 짧은 교복 치마로 갈아입고 아무 일 없다는 듯 교실로 들어갔다. 나름 치밀한 나는 그렇게 1년을 버텼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다. 나는 곧 숨이 막혀 죽을 거 같다.
아빠가 짧은 교복을 입고 남자애랑 같이 걸어가는 나를 봤단다. 걔는 그냥 우리 반 애다. 같이 걸어간 것도 죈가? 집에 들어갔더니 잔소리가 쏟아졌다. “수정, 스쿨유니폼. 프로블럼, 그거 안 돼. 남자, 그거 뭐야?” 얼마나 급한지 엄마한테 시키지도 않고 자기가 직접 말했다. 말도 잘 못하는 주제에 잔소리는 잘도 했다. 내가 너무 잘 가르쳤다! “정말 이렇게 다 참견할 거예요? 싫어요. 싫다고요. 아빠면 다예요?” 꽝! 쏘아붙이고 방문을 거세게 닫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너무 한심하다. 별일도 아닌데 눈물이 났다. 저런 아빠는 차라리 없으면 좋겠어. 처음 왔을 때처럼 가방 들고 가버려! 세살짜리 동생 민정이가 문을 콩콩 두드리며, 언니이, 하고 불렀다. 나는 모른 척했다. 엄마고 민정이고 다 싫다.
홧김에 집을 나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고맙게도 재희가 자기 집으로 나를 끌고 갔다. 소피아 아줌마가 엄마한테 전화했다. 오늘은 여기서 재운다, 타갈로그어로 빠르게 말하던 아줌마는 그 말만 아주 천천히 한국어로 했다. “엄마, 울어요?” “몰라,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엄마가 울었으면 좋겠다. 펑펑 울면서 아빠랑 헤어지면 좋겠다. 아니, 그럼 두번이나 이혼한 여자가 되는데! 그럼 민정이도 아빠 없는 애가 되겠지? 그건 안 돼. 나만 없어지면 다 편한데, 내가 사라질까? 학교 그만두고 알바해서 방을 따로 얻을까? 마음속이 새까만 연기로 가득했다. 열다섯살 인생이 너무 거지 같다. 밤늦게 엄마가 찾아왔다. 엄마가 울었다. 엄마가 우는 게 싫다.
아프기는 부모도 마찬가지
어느 가정이나 부모-자녀 간에 크고 작은 갈등을 겪으며 살지만 이주가정은 그 정도와 내용의 폭이 더 크고 다양하다. 이주 1세대인 부모들은 대체로 본국에서부터 지켜온 문화와 전통, 사고방식과 종교를 유지하며 자녀들도 그에 따라주기를 바란다. 반면 자녀들은 현시대 한국의 또래 문화를 접하며 자라므로 부모의 기대에서 자주 벗어난다. 갈등은 필연적이고 때로 억압과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수정의 경우는 더 난감하다. 수정은 종교적 특성이 담긴 가부장적 규율을 요구하는 새아빠가 등장하면서, 가족 간 신뢰와 정서, 생활관습 등 삶의 조화가 어긋나는 상황을 아프게 겪고 있다. 아프기는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이주 1세대 부모들은 자기 문화를 지키는 동시에 자녀가 이 사회에서 안녕하도록 지지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이는 가족 단위에서 알아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인권과 다양성, 공존의 가치가 각 가정에까지 잘 스며들도록 사회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또 이주 1세대의 재사회화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주민도 지역사회 활동에 참여하며 교류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하고, 한국의 사회와 문화, 자녀교육 등에 대한 정보도 적극적으로 제공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