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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방이 없나요, 모깃소리로 물어봤다

등록 2020-02-15 15:07수정 2020-02-15 15:10

[토요판] 이란주의 할 말 많은 눈동자
② ‘있지만 없는’ 아이들

3년 전 인도네시아인 파니
미얀마인 남편 공장에서 만나
두살, 6개월 아이 낳았지만
남편은 떠나고 고시원 생활

연락 끊긴 남편 수소문해 찾아
잘하겠다고 빌고는 또 잠적
엄마·아이들 자립 방법 없을까

비자 없는 부모가 낳은 아이들
출생등록조차 못해 서류상 ‘부존재’
유엔, 모든 아동 출생등록 보장해야
일러스트레이션 순심
일러스트레이션 순심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있지만 없는’ 아이들이 있다. 아내 수수(미얀마인)와 함께 인천 부평에서 미얀마 식당을 운영하는 윈라이(미얀마인, 50살)의 눈동자에는 그 아이들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지난 12월 중순이었어요. 처음엔 그냥 밥 먹으러 온 손님인 줄 알았어요. 엄마 혼자 아기 둘을 데리고 왔으니 좀 이상하긴 했어요. 미얀마 사람은 아니고, 한국 사람도 분명 아니고, 어느 나라 사람이기에 미얀마 밥을 다 먹으러 왔을까, 궁금함을 누르며 밥을 차려줬어요. 엄마가 아기들 때문에 제대로 먹을 수 없을 것 같아 우리 부부가 아이들을 안았어요. 나는 두 살도 안 돼 보이는 큰애를 안고 밥을 먹이고, 수수는 오륙 개월이나 되었을까 싶은 작은애에게 우유병을 물렸어요. 엄마는 고맙다는 눈인사를 하더니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어요. 그런데 이 엄마가 밥을 다 먹고도 일어나질 않는 거예요. 머뭇머뭇… 왜 그러지, 돈이 없나?

아기 엄마는 한참이나 말없이 앉아 있어요. 결국 못 참고 물어봤죠, 혹시 무슨 일 있냐고. 그다음 이야기는 좀 부끄럽네요. 그래도 용기를 내서 말할게요. 아기 아빠는 미얀마 사람이래요. 이런, 우리 나라 사람이네! 아기 엄마는 인도네시아 사람이었어요.

아이들 아빠를 찾습니다!

우리는 한국어, 영어를 섞어 아는 단어를 총동원해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아기 엄마 이름은 파니(가명·31), 3년 전에 한국에 와서 한 공장에서 일하며 아이들 아빠 쏘우(가명·27)를 만났대요. 의지가 되고 좋아서 기숙사에 같이 살며 큰아이 정우(가명)를 낳았고, 곧 둘째가 또 생기자 기숙사를 나와 고시원으로 옮겼대요. 고시원에서는 어쩐 일인지 남편이 일을 안 해서 자기가 임신 7개월까지 일해서 간신히 먹고살았다는군요. 둘째 낳기 얼마 전, 일을 찾겠다고 나간 쏘우가 돌아오지 않자 파니는 죽음 같은 시간을 보냈대요. 두려움 속에 산통이 시작되고 고시원 총무가 병원에 데려가고 거기서 둘째 현우(가명)를 낳아 다시 고시원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듣기에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파니는 부평에 미얀마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것을 알고 남편을 찾으러 온 것이었어요. 약 15년 전부터 자연스럽게 부평에 미얀마 사람들이 모여들어 미얀마 타운을 이뤘어요.

이 뻔뻔하고 한심한 놈을 그냥! 내가 찾아야지! 파니는 남편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어요. 겨우 이름과 핸드폰에 든 사진 몇 장. 나는 그걸 단서로 조사에 들어갔어요. 이름 철자를 바꿔가며 페이스북을 샅샅이 뒤졌어요. 사진과 대조하며 후보를 몇 명 찾아 파니에게 보여주니 한 사람을 짚더군요. 요놈이군! 27살, 멀쩡하게 생긴 녀석입니다. 이제부터는 끈기가 좀 필요하죠. 연락 달라고, 메신저로 글을 남기니 대답이 없어요. 다음 단계는 좀 세게! 미얀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사진과 글을 올렸어요. 이런저런 일로 아이들 아빠를 찾습니다! 한참 기다리니 입질이 옵니다. 먼 지역에서 일하고 있대서 주말에 오라고 했죠.

그때 식당에 있던 사람들은 다 이 사건을 알게 됐어요. 우리 직원은 슬쩍 나가 기저귀와 분유를 사 오고, 손님들은 아기들에게 힘내라며 돈을 꺼내놨어요. 다들 미안했던가 봐요.

“그놈이 주말에 몇 시쯤 올까요?”

젊은 손님들이 내게 물었어요.

“왜요?”

“그놈을 때려주게요!”

“아니, 사람을 막 때리고 그러면 안 돼요.”

“처음부터 때릴 건 아니고요, 얘기 들어보다가 정말 아니다 싶으면 그때 때려주려고요.”

“그러다 큰일 나요, 아무리 미워도 때리지는 말아야지. 하하.”

청년들은 배시시 웃었어요.

파니에게 어디서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서울 어디에 있는 쉼터래요. 여기는 방이 없나요? 모깃소리로 물어봐요. 방…. 나도 한때 방 한 칸 없이 떠돌며 지낸 날이 많았던지라 그 말에 가슴이 찌르르 아팠어요. 의지가지없어 보이는 세 식구를 다시 멀리 보내자니 그것도 마음에 걸렸어요. 수수도 그랬는지 여관방이라도 잡아주자고 합니다. 우리 식당 뒤에 작은 숙박업소가 많거든요. 쉼터에는 나중에 짐 가지러 가겠다고 연락했어요. 수수는 밥때가 되면 파니와 아이들을 데려와 밥을 챙겨 먹였어요.

연년생 형제 정우와 현우는 말도 못하게 예쁜 짓을 했어요. 정우는 나만 보면 쪼르르 달려와 안기는데, 끼고 앉아 밥을 먹이면 그렇게 잘 먹을 수가 없어요. 현우는 도통 우는 일이 없어요. 자다 깨서도 방글거리고, 이 사람 저 사람 품에 안겨도 낯가림을 안 했어요. 아이들이 예쁠수록 마음은 더 답답해졌어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어찌해야 하나.

드디어 놈이 나타났어요

며칠 지나 드디어 놈이 나타났어요. 하는 말마다 핑계고 거짓말입니다. 일자리 찾아다니느라 연락을 못 했다는 둥, 전화가 끊겨 연락을 못 했다는 둥. 나는 당장 유심칩을 사다 끼워줬어요. 또 연락 끊으면 정말 혼난다, 파니와 헤어지더라도 아이들은 네 아이고 양육비는 네가 책임져야 하는 거다. 겁도 좀 줬지만 이놈은 끝내 건성입니다. 청년들에게 폭행은 안 된다고 점잖게 타일러놓고 정작 나는 여러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어요. 짐승도 자기 새끼 지키려고 애쓰는데 어떻게 인간이란 놈이 이러나 싶었어요. 아이 둘을 혼자 돌보는 게 어떤 건지 직접 느껴보라며 그날 밤 아이들과 자게 했어요. 파니는 우리 집으로 데려갔죠. 다음 날 아침, 앞으로 잘하겠다고 싹싹 빌고 간 녀석은 며칠 지나자 다시 연락을 끊어 버렸어요. 그사이 나는 녀석의 고향 집과 한국에 와 있는 고향 사람들을 알아냈어요. 이제 녀석이 어디로 튀어도 찾아낼 수 있겠죠. 하지만 아이들을 책임지도록 강제할 방법은 도무지 모르겠어요.

파니는 여권이 없고, 아이들은 출산한 병원에서 받아뒀어야 하는 출생증명서가 없었어요. 출생증명서는 아기들이 태어났음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서류죠. 어느 정부에든 출생등록을 하려면 꼭 필요해요. 파니는 아기수첩만 꺼내놨어요. 병원에서 출생증명서를 받으려면 엄마 신분증이 있어야 하니 여권을 먼저 찾아야겠네요. 여권은 전에 쏘우가 들고 나간 뒤로 돌려받지 못했대요. 어떤 가게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파니가 말했어요. 어떤 가게? 여권을 그냥 맡길 리는 없으니 돈을 빌렸나? 그럼 미얀마 가게겠네, 아마 부평일 거고. 가능성 있는 가게 몇 군데에 수소문하니 여권이 툭 튀어나옵니다. 가게 주인이 말하기를, 그놈이 처음에는 자기 여권을 맡겼다가 나중에 파니 것으로 바꿔치기했답니다! 가게 주인을 설득해서 여권을 돌려받았어요. 놈이 빌렸다는 85만원은 나중에 받아주겠다고 약속했어요. 흐억, 약속을 꼭 지켜야 할 텐데요!

여권을 들고 아기수첩에 적힌 병원을 찾아갔어요. 안양에 가서 정우 출생증명서를 받고, 안산으로 가니 병원비를 안 내서 현우 출생증명서를 줄 수 없다고 해요. 고시원 총무가 몇 달에 걸쳐 조금씩 갚아줬다지만 그래도 꽤 큰돈이 미납금으로 남아 있대요. 사정사정했지만 원무과 직원은 자기 사정도 좀 봐달라고 오히려 하소연해요. 내친김에 고시원에도 들렀어요. 정우, 현우가 왔다는 소리에 방방마다 문이 열리고 아저씨들이 나와서 반가워합니다. 이분들 온정으로 파니가 살았구나 싶었어요. 파니는 고시원 방값이 여러 달치 밀리자 울면서 나왔다고 해요. 총무가 도우려고 애썼지만 자기 힘이 거기까지밖에 안 됐다고 미안해했어요. 한 아저씨는 아픈 아이를 병원에도 못 데려가고 그저 끌어안고만 있던 파니를 안타깝게 지켜봤던 이야기를 했어요. 엄마와 아이들이 지냈다는 방을 열어보니 창문도 없는 작디작은 방입니다. 정우가 고시원 복도를 기어 다니고 그 벽을 잡고 걸음마를 배웠을 것을 생각하니 목이 메었어요. 우는 일이 거의 없는 현우가 그때 갑자기 크게 울어댔어요. 내 마음이 그래선지 몰라도 현우 울음소리가 그렇게 서러웠어요.

파니는 혼자서 이 궁리 저 궁리 많이 했나 봅니다. 아픈 어머니 병원비 마련해 보겠다고 한국에 왔다가 졸지에 아이가 둘이나 생겼으니 스스로도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이미 엄마 껌딱지인 정우를 떼어 보낼 수는 없으니,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현우를 쏘우 고향으로 보내 어른들에게 키워달라고 부탁해야겠다, 정우 하나면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거야, 어린이집에 보내고 일하면 어머니 병원비를 해결하고 돈도 조금은 모을 수 있겠지, 고향으로 돌아간 뒤 미얀마에 가서 현우를 찾아와야지, 이게 파니 계획입니다.

미얀마 대사관은 아이를 보내려면 쏘우를 아빠로 해서 출생등록을 하고 무조건 쏘우가 데리고 나가야 한다고 말했어요. 저 뺀질이가 다시 못 올 것이 뻔한 마당에 자진해서 나갈 리가 없으니 첫 단계부터 꽉 막히네요. 파니가 한국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살 경우를 생각해 봤어요. 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자면 원비만 80만~90만원 들겠죠. 돈 벌어 원비 내면 끝이니, 몸이 깨져라 일을 해도 어머니 병원비는커녕 자기 생계도 잇기 어렵겠어요. 같이 앉아 이런 계산을 해보다가 파니는 겁을 먹고 어깨가 잔뜩 움츠러듭니다. 급기야 아이들을 보육원에 맡기는 상상을 하고 눈물을 한 바가지 쏟고 말았어요.

이 가족을 계속 여관에서 지내게 할 수는 없어서 가까이에 쉼터를 알아봤어요. 한 쉼터에서, 빈방이 없지만 그래도 같이 지내보자고 받아주어서 그리 들어갔어요. 거기서 좋은 분들을 만난 덕에 파니는 용기와 위로를 좀 얻은 듯 보입니다. 파니는 내가 중고시장에서 사준 2인용 유모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식당에 옵니다. 주변 미얀마 사람들은 그놈이 마음잡고 아이들 키우며 살겠다면 같이 돈을 마련해서 방을 얻어주고 일자리도 찾아 주자고 해요. 하지만 의지 없는 놈을 강제로 붙들어 놓을 수 없으니 속만 탑니다. 엄마와 아기들이 서로 헤어지지 않고도 자립해서 먹고살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정말 막막합니다.

출생등록 보장은 아동보호의 시작

파니와 쏘우는 허가받은 체류 기간을 넘긴 미등록 이주민이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이고 서로 국적이 다르다. 게다가 쏘우는 남편이나 아빠로서 역할을 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이런 복잡한 사정 때문에 아이들은 아직 어느 정부에도 출생등록을 못 했다. 비자 없는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출생등록조차 못 해 서류상으로는 없는 아이들이지만, 이 아이들은 분명 존재하며 작은 숨을 쉬고 있다. 그 숨결이 청소년으로 자라도록 서류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속절없는 경우도 있다.

아동이 여기 있으니 아동을 보호할 일차적 책임은 대한민국에 있다. 민간단체들은 오래전부터, 한국 정부가 미등록 이주민의 자녀를 포함한 모든 아동의 출생을 등록하여 그 존재를 인정하고 아동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우리 정부가 출생등록을 받는다고 해서 꼭 국적을 부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 일단 그 부담은 안 가져도 좋겠다. 아동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보육을 지원하고, 아플 때 적절하게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8살을 맞은 아동에게 취학통지서를 보내 교육받을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장한다면 또 얼마나 멋지겠는가!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가 국내 출생 모든 아동에 대해 출생등록을 보장하라고 했던 권고에 대하여, 지난달 한국 정부는 입법을 준비하고 있다는 권고이행보고서를 제출했다. 흔들림 없이 진행하기를 바란다. 출생등록 보장은 아동보호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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