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4호선 미아사거리 역에 내려 마을버스 강북 06번을 타고 가다 보면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골목길이 나온다. 가파른 경사의 골목길을 굽이굽이 올라가면 강북구 번동 마을을 만날 수 있다. 겨울엔 길이 얼고, 여름엔 폭염을 피할 수 없어 가혹한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경험해야 하는 번동에는 유독 홀몸노인과 장애인, 저소득층 가구가 많다. 번동의 노인 인구는 19%다. 주민 다섯 명 중 한 명꼴로 노인인 셈이다. 이 중에서도 25%가 홀몸노인이다. 장애인 인구 역시 8%로 전국 평균 5%를 넘는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비율도 8%로 전국 평균인 3%를 훌쩍 넘는다. 서울에서도 가장 열악한 주거 지역으로 알려진 이곳에 청년들이 하나둘 모여 활기를 만들기 시작한 건 2013년부터다.
강북구 번동과 삼양동 일대에서 활동하는 청년활동가들. 왼쪽부터 박진우, 황명진, 홍종원, 승민지, 박철우씨
“서울에서 이런 동네는 처음이야”
청년들이 느낀 번동의 첫인상이었다. 이 동네는 활기와 즐거움이 증발한 듯한 곳이었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이들은 홀몸노인이나 장애가 있는 주민 한명 한명의 집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가 의외로 하모니카를 잘 부시는 것을 알아챈 뒤, 기꺼이 하모니카 공연의 관객이 됐다. 계단을 오르내리기 어려워 밖에 나올 수 없는 어르신의 휠체어를 번쩍 들어 올려 산책 동무가 되기도 했다. 때로는 작은 마을 축제를 기획해 주민들을 초대했다. 누가 시켜서도, 월급을 받는 일도 아닌 일들을 청년들은 왜 시작하게 됐을까. 번동과 삼양동 일대에서 활동하는 동네 청년활동가 5명을 만나봤다.
동네 의사인 홍종원(32) 건강의집의원 원장의 주업은 주민들을 만나는 일이다. 의료활동이 부업이다. 그는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들을 누군가는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2013년 이곳에 왔다. “병원에서 치료하는 것처럼 마을 공동체를 만드는 일도 또 하나의 치료”라고 그는 말한다. ‘건강의집’으로 이름 지은 마을 사랑방을 만들어 주민 교류의 마당으로 만들었다. 함께 김치를 담그고, 마을 소모임을 꾸리기도 했다. 지난해 3월부터는 ‘건강의집의원’을 개소해 장애인 가정을 직접 찾았다. ‘장애인 건강주치의 사업’으로 방문진료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왕진 진료 활성화를 위한 시범 사업이 시작된 후에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 가정도 방문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그가 방문한 집은 100여 가구. 부업이었던 동네 의사 일은 이제 주업이 됐고, 병원에 가기 어려운 주민들을 주기적으로 살필 수 있게 됐다.
동네 의사 홍종원씨가 거동이 불편한 노인 가정에 방문해 진료하는 모습. 박철우씨 제공
박진우(32)씨는 집안 형편 때문에 전공이었던 음악을 포기했다. 직장에 들어가 잘 적응했지만 ‘내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1년 만에 그만뒀다. 아는 사람을 통해 참여한 우이동 청년 모임에서 다시 꿈이 생겼다. 마을을 위해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청년들에게 자극을 받아서다. 그는 주변 환경 때문에 꿈을 접는 청소년들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015년 당시 진행된 서울시 주거환경개선사업의 지역재생 활동가로 뽑히면서 번동을 찾게 됐고, 동시에 ‘메이커스’라는 단체를 만들어 마을 문화예술 교육을 시작했다. 마을의 음악 선생이 된 것이다. 최근에는 그가 가르친 제자가 새로운 동료가 되기도 했다. 지난해 대학생이 된 승민지(19)씨는 고등학생 때 만난 박진우씨를 따라 마을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지난해엔 직접 레몬청을 만들어 주민들과 나누는 활동을 했고, 노래도 곧잘 해 마을 어르신들의 아이돌이 됐다고 했다.
군 복무 중에 만난 박철우(30), 황명진(31)씨는 한지붕 아래 사는 가족이다. 이들은 박철우씨 형인 박진우씨를 따라다니며 마을 활동을 하다가 2017년부터 시작된 ‘터무늬있는집’ 사업을 계기로 활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터무늬있는집은 사회투자지원재단이 시작한 사업으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출자한 기금을 청년들에게 보증금으로 빌려주고, 보증금의 연 4% 이자를 사용료로 납부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박철우 씨와 같은 거주자는 한 달에 약 10만원 정도의 월세를 내며 생활할 수 있다. 박철우씨는 “처음엔 무료로 도와주는 데 대한 거부감도 있었지만, 공간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활동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며, “특히 내가 청년 사회주택의 당사자가 되면서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됐다”고 전했다. 황명진씨는 박철우씨와 함께 살며 좋은 자극을 받아 지난해 8월에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초보 활동가지만 의지만은 프로 못지않다. 사회주택 거주 경험을 살려 박철우씨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현재 주택대학원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사회주택과 주거환경 개선이 관심 분야다.
2017년 마을 청년들이 모여 기획한 오패산 마을축제. 먹거리 장터와 체험 부스를 운영하고, 청년들이 직접 공연을 하기도 했다. 박철우씨 제공
수년간 마을 활동을 해온 이들에게도 어려움은 있었다. 의미 있고 행복했기에 무보수로 무작정 활동했지만, 경제적 자립 없이는 활동을 지속하기 힘든 게 엄연한 현실이다. 지속가능성을 모색하던 이들은 2018년 5월 ‘로컬엔터테인먼트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이름 그대로 마을을 즐겁게 만들면서, 이윤을 창출해 활동이 선순환될 수 있도록 하는 게 가장 큰 목표다. 그동안 각자 개별적이고 단절적으로 진행하던 활동을 한데 모으자는 취지도 있었다.
조합 설립 후 2년 남짓 지났지만 많은 활동을 함께했다. 작은 규모의 지역 축제에는 장비 대여가 어렵다는 문제를 발견하고, 마을축제에 음향, 천막 등의 장비를 대여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지난해엔 서울시 청년청과 함께 쓰레기 재활용 캠페인인 ‘아트 사이클링’ 사업도 진행했다. 쓰레기 재활용 문제가 심각한 마을에 문화예술 축제를 통해 재활용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도록 고민했다. 현재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함께 번동에 있는 사회주택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터무늬있는집 3호 사업을 하고 있다. 거주자로서 경험을 살려 주거빈곤을 겪는 청년들이 보다 싼값으로 생활하면서도 공동체를 만들도록 돕고 있다. 현재 3호는 보증금 70만원에 월세 17만원 정도로 이용할 수 있다. 이런 노력 덕분에 로컬엔터테인먼트 협동조합은 지난해 서울시와 국토교통부 예비사회적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난해 서울시와 함께 진행한 ‘빈집 활용 도시재생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공간 ‘동고동락’. 한때 주민들에게 ‘흉가’라고 불리던 이곳은 지난해 12월, 동네 주민과 청년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마을에서 일식당을 운영하는 한윤교(40)씨는 “이웃들끼리 서로 인사도 안 하고 지냈는데, 청년들이 들어오고 나서는 옥상파티도 함께할 정도로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한윤교씨는 이들의 활동을 가장 가까이에서 봐온 이웃이다.
이제는 이웃에게 ‘4층 집 총각’, ‘윗집 아저씨’로 불린다는 이들은 오늘도 어떻게 하면 주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지 고민한다. 공동체가 만들어지면 마을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꿈은 단 한 가지다. 같이 살 부딪히면서 살아가는 동네 사람들끼리 앞으로도 재밌는 추억을 많이 쌓는 일이다.
글·사진 서혜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원
hyeb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