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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병원 옥상에 갇힌 간호사, 그의 꿈은 이루어질까

등록 2020-01-11 09:19수정 2020-01-12 09:53

[토요판] 커버스토리
고공농성 해고노동자 박문진

6개월 넘게 옥상에서 농성중인
영남대의료원 해고노동자
나이팅게일 꿈 품고 간호사 돼

부당한 병원 문화에 저항하다
30년 노동운동 길에 들어서
의료민주화·노동법 개정 투쟁

14년 전 파업 때 창조컨설팅 개입
민주노조 파괴되고 해고로 내몰려

차별·불평등 없는 세상과
아프리카 의료봉사 꿈 위해
땅으로 내려올 날을 기다린다
대구 영남대병원(영남대의료원) 해고노동자(보건의료노조 대구경북지부영남대병원 간호사) 박문진씨가 \'노조 기획탄압 진상조사와 재발방지 및 해고자 복직과 노동조합 원상회복\' 등을 요구하며 영남대병원 본관 옥탑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대구/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대구 영남대병원(영남대의료원) 해고노동자(보건의료노조 대구경북지부영남대병원 간호사) 박문진씨가 \'노조 기획탄압 진상조사와 재발방지 및 해고자 복직과 노동조합 원상회복\' 등을 요구하며 영남대병원 본관 옥탑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대구/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내 친구의 집은 왜 저기인가.’

70m 옥상에서 6개월 넘게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박문진을 생각하며 김진숙은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다. 암 투병 중인 김진숙은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주인공처럼 친구를 향해 걸었다. “앓는 것도 사치”라고 생각했다. 박문진은 오지 말라고 울었지만, 친구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일주일 만에 도착한 김진숙은 혼자가 아니었다. 200여명이 함께 왔다.

지난달 29일 두 친구의 ‘옥상 만남’은 ‘비극적인 감동’이라고 표현되기도 했다.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맞서 부산 영도조선소 크레인에서 309일 동안 고공농성을 했던 김진숙(60)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2018년 10월 유방암 수술을 받고 투병 중이다. 지난해 7월1일 대구 영남대의료원 본관 옥상에 오른 박문진(59)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지도위원은 간호사로 일하던 이 병원에서 2007년 해고돼 14년째 복직 투쟁 중이다. 당시 파업에 노조 파괴로 악명 높은 창조컨설팅이 개입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한진중공업의 유일한 여성 용접공이었던 김진숙은 20대 중반이던 1986년 민주노조를 세우는 활동을 하다가 해고당했고 이후 두차례 투옥됐다. 박문진은 1990년 스물아홉 나이에 노조위원장이 됐고 전국병원노동조합연맹 위원장으로 의료민주화 운동을 이끌다 두번 해고, 한차례 투옥을 겪었다. 부산·경남과 대구에서 ‘투쟁하다 만나 친구가 된’ 두 사람은 환갑을 앞둔 나이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싸워야 하고 여전히 아프다. 농성 186일째였던 지난 2일 옥상 농성장에서 박문진을 만나 물었다. 왜 이곳에 올라왔나.

―고공 농성장에서 새해를 맞았네요.

“네. 방한복을 준비해 오면서도 연말에는 끝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직 있네요(웃음).”

―농성 생활이 불편하고 힘들 텐데요.

“병원이라 밤새 구급차가 다니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처음엔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지금은 좀 나아졌는데, 혼자 밥 먹는 게 좀 그래요. 밑에서 아침·점심 두 끼를 올려주는데, 앞산과 해를 바라보면서 같이 먹자고 중얼중얼하면서 먹어요(웃음).”

본관 엘리베이터를 타고 13층에서 내려 계단을 한 층 올라가면 옥상이 나온다. 농성장은 철제 사다리를 올라가야 하는 옥탑에 있다. 옥탑 난간은 높이가 35㎝에 불과해 가장자리에 서면 살며시 부는 바람도 무섭게 느껴진다. 한 평 남짓한 잠자리용 텐트와 바람막이 천막은 지난해 잦았던 태풍에 네댓번 무너졌다. 이곳에서 그는 전자온도계가 49.9도를 찍은 뒤 멈췄던 여름을 보냈고, 난간 위에 사과 하나와 배 하나, 포도 한 송이, 찻잔을 놓고 “차별 없는 세상을 기원”하며 추석 차례를 올렸고, 지금은 전기도 물도 없는 겨울을 견디는 중이다. 그래도 무서운 돌풍만 없다면 괜찮을 것 같다. 인터뷰 도중에도 건물 벽면으로 늘어뜨린 대형 펼침막이 날아가는 걸 막으려고 매달아 놓은 500㎖ 플라스틱 생수병 4개가 하늘로 붕 뜨더니 옥탑 위로 날아와 머리를 때렸다. 그나마 농성 초기에 득실거리던 바퀴벌레는 사라졌다.

입사 2년 만에 간호사 출신 노조위원장에

박문진은 잘 웃었고, 목소리가 쾌활했다. 그가 간호사가 된 이유는 ‘초등학교 때 나이팅게일 전기를 읽고 감명을 받아서’다.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꿈이다.

―1988년 간호사 일을 시작하셨지요.

“6남매 중 오빠 둘에 큰딸인데, 엄마가 늘 ‘여자도 자기 전문적인 직업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결혼도 하지 말라고 하셨고요(웃음). 그런 말씀에도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아버지가 고1 때 돌아가시고 형편이 어려워서 직장 생활을 2년쯤 하고 인천간호전문대학에 들어갔어요. 그땐 개신교 신자였는데,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하는 게 예수님처럼 사는 거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졸업 뒤 조산사 자격증도 땄어요. 아프리카에서 가장 필요한 게 여성을 위한 의료라고 생각했거든요. 임상 경험을 쌓으려고 병원을 알아보는데 친한 친구가 대구 가톨릭병원에 있었어요. 길어야 2년 일하고 아프리카로 떠날 예정이라 친구랑 같이 지내려 대구로 왔어요.”

―길어야 2년이 30년이 됐네요. 입사 2년 만에 노조위원장이 됐는데, 어쩌다 그렇게 됐나요.(웃음)

“분만실에서 일했어요. 요즘도 태움 문화(간호사들 사이의 직장 내 괴롭힘)가 있잖아요. 그땐 더했어요. 군대 문화에 층층시하가 법이고 진리였죠. 제 피가 뜨거웠던 것 같아요. 너무 기가 막히고, 이해가 안 가고, 자존심이 상했어요.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참고 참다가 뻥 터졌어요. 아래 연차가 위 연차한테 반항하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수간호사한테 이랬죠. ‘선생님, 좀 봅시다!(웃음)’. 그리고 평소 메모해둔 걸 보여주면서 ‘이거 이거는 안 됩니다’ 했어요.”

마침 노동조합 선거가 열렸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2년차 박문진은 동료들의 추천으로 출마해 첫 간호사 출신 노조위원장이 됐다.

―인생이 바뀌는 시점이네요.

“목사님한테 상의를 했어요. 노동 현장에서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을 위한 일, 노동조합 일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이고 지금은 아프리카 가는 것보다 그게 더 큰 일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뭣도 모르고 맡아서 30년 동안 못 가고 있는 거죠(웃음).”

5년 뒤인 1995년 전국병원노동조합연맹(보건의료노조의 전신) 위원장이 됐다. 파업을 하면 해고와 투옥이 뒤따를 때다. 그 역시 해고됐고, 대구교도소에서 8개월 수감 생활을 하던 중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첫 여성 부위원장이었다. 당시 전국병원노동조합연맹은 의료민주화와 환자 인권 보호를 주장했다. 촌지 근절과 영안실 비리 척결, 과잉진료 금지뿐 아니라 동전을 넣고 봐야 했던 병실 텔레비전 무료 시청, 보호자 침대와 냉장고 설치까지 세세한 것까지 이뤄냈다.

―처음부터 노동운동가가 되려고 한 게 아닌데, 아주 뜨거워졌네요(웃음).

“저는 노조 활동이 재미가 있었어요. 당시엔 간호사한테 담배 심부름, 은행 심부름 시키고, 호칭은 무조건 미스 박, 미스 김이었죠. 저희 임금과 근로조건도 중요하지만 과잉진료나 환자 인권과 관련한 문제제기를 우리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간호사들은 환자·보호자들과 밀접하기 때문에 부당한 일들을 많이 보거든요. 우리의 문제제기로 사회가 바뀌고 병원이 바뀌고 사람들이 바뀌는 걸 보니 재미가 있더라고요.”

―보람이 아니라 재미라고 표현하네요(웃음).

“네. 정말 해볼 만한 일이다 싶었어요. 피곤해서 입술은 허구한 날 터지는데 재미가 있고 값어치가 있으니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1996년 12월26일 새벽,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 의원들이 단체로 버스를 타고 국회에 들어가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정리해고 법제화, 파업 때 대체근로 허용, 복수노조 허용 연기 등을 담은 개악안이었다. 노동계는 ‘노개투’(노동법 개정 투쟁) 총파업에 들어갔다. 명동성당에 농성 텐트가 설치됐고, 서른다섯살 박문진도 삭발을 하고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 등과 두달여 동안 텐트에서 농성했다. 노동법 재개정을 이끌어낸 정치 파업이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사태로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이어지면서 노동자들의 삶은 피폐해지기만 했다. 박문진은 한국 노동운동사 최초의 산별노조를 만드는 활동을 마치고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병원 분만실과 노조 사무실, 서울 민주노총 사무실을 오가며 지냈다.

―2006년 파업 뒤 2007년 병원에서 두번째 해고됐는데요. 이때 창조컨설팅이 개입한 거죠?

“네. 이미 합의했던 주5일제에 따른 인력 충원,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을 요구하면서 조합원 950명 중 250명만 참가하는 부분파업을 3일간 했어요. 그런데 회사 쪽이 너무 강경하게 나왔어요. 지방노동위·중앙노동위에 사쪽 대리인으로 심종두 노무사가 나왔는데, 그때는 그런 사람인 줄 몰랐죠.”

당시 농성장이 차려진 본관 로비에는 폐회로텔레비전(시시티브이) 16대가 돌아갔다. 노사의 물리적인 충돌도 빚어졌다. 병원 쪽은 불법파업이라며 10명을 해고하고 18명을 징계했으며, 56억원의 손해배상 가압류를 신청했다. 지방노동위·중앙노동위에서 부당해고 판정을 받고 복직한 이들이 같은 사유로 다시 해고와 징계를 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노조 사무실에는 내용증명으로 보낸 똑같은 탈퇴서가 쏟아져 들어왔고, 조합원은 70명으로 줄었다. 2010년 대법원에서 7명은 부당해고 판결을 받았지만, 당시 지부장과 박문진 등 파업을 주도했던 3명은 제외됐다.

지난 2일 박문진씨가 옥탑 농성장에서 햇볕을 쬐고 있다. 70m 높이 옥탑에는 돌풍이 많이 불어 농성 텐트가 네댓번 무너졌다. 대구/강재훈 선임기자
지난 2일 박문진씨가 옥탑 농성장에서 햇볕을 쬐고 있다. 70m 높이 옥탑에는 돌풍이 많이 불어 농성 텐트가 네댓번 무너졌다. 대구/강재훈 선임기자

강경 대응 뒤에 창조컨설팅이 있었다

그런데 2년 뒤인 2012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노조 파괴로 악명 높은 심종두 노무사의 창조컨설팅이 개입한 사실이 확인됐다. 창조컨설팅이 2011년 4월 유성기업에 보낸 ‘노사관계 안정화 컨설팅 제안서’에 영남대의료원을 비롯해 민주노조를 무력화한 사업장 12곳의 이름이 나열돼 있었다. 창조컨설팅은 영남대의료원에 대한 자신들의 컨설팅 결과 ‘조합원 수가 1200명에서 60명으로 감소하고 노사관계가 안정화’했다고 적었으며, 다른 회사들에 대해서도 대부분 노조 해산 수준으로 조합원을 감소시켰다고 적었다. 창조컨설팅은 유성기업과 발레오전장에서 부당노동행위를 방조한 혐의가 사실로 드러나면서 노무법인 설립인가가 취소됐고, 심종두 대표는 2018년 8월 대법원에서 징역 1년2개월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창조컨설팅이 어떤 회사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때 해고된 박문진이 법적으로 구제받을 길은 사라져버렸다.

―파업 6년 뒤에야 창조컨설팅 개입 사실을 알게 된 거군요.

“그렇죠. 뒤늦게 의문이 풀렸어요. 보통 파업 전날 밤새 교섭을 하는데 병원 쪽이 아예 나오지 않았어요. 계속 교섭을 회피했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무엇보다 조합원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졌어요. 나이트(밤 근무)가 끝나도 노조 탈퇴서를 안 쓰면 퇴근을 안 시켰어요. 창조컨설팅 개입과 관련해 법적 대응을 해보려 했는데, 공소시효도 끝나고 자료도 없더라고요. 병원 관련자들을 찾아서 설득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그해, 2012년은 박문진에게 고통스러운 해였다. 영남대의료원 학교법인인 영남학원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알려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서울 삼성동 집 앞에서 벌인 ‘삼천배 투쟁’도 처절하게 끝났다.

―삼천배를 하면서 무엇을 요구한 건가요.

“영남대의료원 해고자 복직과 노사문제 해결, 그리고 당시 노동계의 큰 과제였던 쌍용차 문제 해결이요. 삼천배를 하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고 하는데 제가 순진했던 거죠. 57일 동안 매일 했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 박 후보는 ‘1233 에쿠스’ 차로만 들어갔다 나갔다 하고 눈길 한번 안 줬어요.”

―계속 쫓아다니며 피케팅을 하는 ‘그림자 투쟁’도 했다면서요.

“후보 일정이 있는 날은 광주고 대구고 쫓아다녔어요. 그러다 서울 종로에서 할아버지들한테 얻어맞기도 하고요.(웃음) 투표하려고 대선 전날 철수했는데, 당선되고선 내가 절하던 자리로 걸어 나오데요. 그걸 보고 밤새 대성통곡을 했어요.”

―좌절했었군요.

“너무 힘들어서 강원도 평창 상원사에 갔어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때 한진중공업 최강서 동지 소식을 들었어요.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절을 해서 이뤄질 것 같으면 다 절하겠지 생각하면서 바로 내려왔어요. 그길로 부산에 가서 조문하고 김진숙 만나고 정신을 차렸죠.(한진중 해고노동자 최강서씨는 2012년 12월21일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고 5년을 또 못 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음을 다잡고 복직 투쟁을 하던 박문진은 2016년 캄보디아 오지 마을로 의료봉사를 떠났다. 투쟁의 매너리즘에 빠져 꿈을 포기할까 봐 겁이 났고, 그렇다고 싸움을 멈추고 아프리카로 떠나면 후회할 것 같았다. 1년 예정으로 간 그곳에서 많이 아팠다.

―쉼 없이 달려와서 그랬던 걸까요.

“이상하게 많이 아팠어요. 봉사하러 온 사람이 너무 아파서 미안할 정도로요.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학교 기숙사에서 아이들 30명이랑 같이 지내고, 가족도 버린 장애인과 환자들을 돌보던 곳에도 있었어요.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 그들을 돌보는 이들을 보니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덥고 힘들었지만, 그렇게 나를 돌아보면서 스스로 치유가 되고 단단해졌던 것 같아요.”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싸움을 멈출 수 없는 이유

촛불집회 소식을 듣고 한국에 돌아왔다. 촛불 정부가 탄생했고, 2012년 꾸려졌던 영남대의료원 노동조합 정상화를 위한 범시민대책위(대책위)도 희망을 갖고 그해 말 재가동됐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래서 옥상에 올랐나요.

“네. 끝장 투쟁이죠. 땅에서 많은 걸 했죠. 그런데 아무 응답이 없고,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고…. 죽지도 못하는 나의 비루함 때문에 나 자신이 싫고…. 그러다 여기까지 왔네요.”

그의 고공농성은 ‘존재 증명 투쟁’처럼 보였다. 올라오기 전 유서를 썼고, 어머니에게는 캄보디아에 다시 간다고 둘러댔다. 어머니는 ‘더운 나라에 가면서 겨울옷은 왜 챙기냐’고 물었다. 같이 해고됐던 송영숙(43) 간호사와 함께 옥상 생활을 시작했다.

―왜 여기에서 하나요.

“서울에서 하려고 했어요. 노조 기획 파괴를 알려야 하는데 여기 대구에서는 한계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서울에 고공농성이 가능한 곳은 이제 다 막아놨다고 하데요. 일터이기도 하니까 결국 이곳으로 정했는데, 정말 조마조마했어요. 저의 마지막 투쟁인데 봉쇄돼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될까 봐요. 어렵게 ‘입주’했고, 처음 올라왔을 때 달나라를 밟은 것처럼 좋았다니까요(웃음).”

인터뷰 도중 오후 2시께 보건의료노조와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대책위가 옥상이 올려다보이는 곳에서 새해 시무식을 열었다. 박문진은 옥상 난간 가까이에 서서 휴대전화로 발언하고, 전국에서 모인 동료들이 흩어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동료들이 들고 온 대형 펼침막에는 ‘노조탄압 진상규명’ ‘해고자를 환자 곁으로’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저 문구가 여기서 내려갈 수 있는 길인가요.

“네. 노조를 기획 파괴한 거잖아요. 최소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노조가 원래대로 회복되고 해고자들은 복직해야 합니다. 비정규직 문제로도 계속 싸우고 있고요.”

―현재 조합원은 80명 정도라고 들었어요. 시간이 많이 흘러도 회복되지 않는 이유는 뭔가요.

“간호사들의 경우 저연차는 요즘 2년 정도 되면 다 바뀌어요. 고연차들은 노조에 가입하면 불이익을 받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가입을 못 하게 하기도 해요. 파업 당시 받은 충격들이 강하게 남아 있어요.”

송영숙은 농성 107일째(2019년 10월15일) 건강 악화로 내려갔다. 그는 “가족에게 내가 잘못해서 해고된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홀로 남은 박문진은 오백배를 시작했다. 김진숙처럼 응원하러 찾아오는 이들이 없다면 버티기 힘들 것이다. 지난달 13일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와 대책위는 영남대의료원까지 2㎞ 오체투지 행진을 했다. 창조컨설팅 노조 파괴의 고통을 겪은 유성기업과 발레오만도 노동자들, 가까운 경북 김천 한국도로공사 본사에서 농성하던 톨게이트 수납노동자 등 곳곳에서 찾아온 이들이 70m 아래에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보건의료노조 나순자 위원장은 9일 영남대의료원의 ‘결단’을 촉구하며 병원 로비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병원 노사는 대구노동청장이 제시한 사적 조정(제3자의 노동쟁의 조정)에 동의했고, 지난해 10월30일 ‘박문진 특별채용 후 명예퇴직’ ‘2006년 노조 탈퇴자에 대해 조합이 탈퇴 가부 의사 확인’ 등의 내용을 담은 조정안이 나왔으나 이에 대한 노사의 이견은 여전한 상태다. 병원 쪽은 “조정안을 놓고 계속 조율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복직은 어떤 의미인가요.

“노조를 파괴하고 노동자들이 파탄 난 삶을 살게 하는 세상이 진짜라는 게 너무 화가 나요. 민주노조 운동은 제 삶의 반을, 청춘을 차지하는 것이고, 영남대의료원은 동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투쟁해온 고향 같은 곳이에요. 고향으로 돌아가고, 환자들에게 돌아가고, 민주노조의 생명력을 다시 찾고 싶어요.”

―박문진이 바라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요.

“차별과 불평등이 없는 세상이요. 지금은 너무 잔인한 세상이지 않나요?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잖아요. 유투(아일랜드 출신 록밴드)가 서울 공연에서 한 말, ‘우리 모두가 평등해질 때까지는 우리 중 누구도 평등하지 않다’는 말이 굉장히 가슴에 와닿았어요. 저는 이 투쟁에 자부심을 갖고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해요. 저는 정년이 2년도 안 남았어요. 불편하고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노동운동 30년의 마지막 끝을 이렇게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프리카에 갈 거죠?

“네(웃음).”

대구/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박문진씨의 고공농성 현장을 찾은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과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조합원들이 지난 2일 영남대의료원 본관 들머리에서 2020년 새해 시무식을 겸한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대구/강재훈 선임기자
박문진씨의 고공농성 현장을 찾은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과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조합원들이 지난 2일 영남대의료원 본관 들머리에서 2020년 새해 시무식을 겸한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대구/강재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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